보이지 않는 향의 매력적인 세계

서울문화사 2022. 8. 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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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의 세계에 빠지면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다.


코는 정말이지 이상한 기관이다. 어떤 장소에 들어서면 우리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언제나 후각이다.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 역시 냄새다. 20년 전 소개팅으로 만나 잠시 사귀었던 애인의 얼굴을 한 번 떠올려보시라. 그의 얼굴은 종종 추억으로 보정이 된 채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 그럴 땐 싸이월드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을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분명 그의 얼굴은 당신의 기억 속에 근사하게 보정되어 빛나는 얼굴과 조금 다를 것이다. 냄새는 그렇지 않다. 나는 20년 전 사귀었던 사람의 냄새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캘빈클라인 ‘CK ONE’ 냄새다. 향수가 그렇게까지 대중화된 시대는 아니었던 터라 모두가 유행하는 브랜드의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니치 향수 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던 시대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구입한 향수는 캘빈클라인의 ‘옵세션’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나는 유서 깊은 수포자로서 수능 성적을 잘 받는 데 딱히 관심이 없었다. 사실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도 지나칠 정도로 희박했다. 그래서 나는 캘빈클라인이나 게스, 마리떼 프랑소아 저버 청바지를 몰래 가방에 넣고 학교에 간 뒤 수업이 끝나면 바지를 갈아입고 보충수업을 땡땡이친 뒤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다녔다. 당시에는 그 세 브랜드의 청바지라면 결코 실패할 일은 없었다. 잠시 딴 이야기를 하자면, 얼마 전 홍대 앞에 갔다가 마리떼 프랑소아 저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Z세대 소년들을 목격했다. 나는 잠시 타임슬립을 통해 1990년대로 복귀한 것은 아닌가 볼을 꼬집고 싶어졌다. 세상의 많은 것은 결국 20~30년을 주기로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트렌드에 뒤처진 옷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어쨌든 1990년대의 아이들은 청바지에 목숨을 걸었다. 영화 관람료가 4000원이던 시절에 어떻게든 용돈을 모아 20만원짜리 청바지를 사 입는 사치를 부렸다. 잠뱅이와 행텐 청바지를 입는 아이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만 했다. 어느 날, 항상 같이 수업을 땡땡이치는 친구들과 함께 부산의 좀 노는 애들이 모여드는 광안리로 갔다. 거기서 우리는 비슷하게 멋을 부린 친구들과 금세 친해졌다. 한 친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니, 코에 띄었다. 냄새가 달랐다. 내 몸에서 나는 담배에 전 땀 냄새와는 달랐다. 농밀하면서도 뭔가 관능적인 냄새가 났다. 남자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10대 남자들의 냄새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땀구멍을 통해 배출되는 끓어오르는 호르몬의 냄새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래서 오늘도 사춘기 남자아이를 키우는 어머님들은 아들 방에 들어가기 전에 코를 막고 페브리즈로 무장을 하는 것이다.

친구는 말했다. “누나 향수 뿌리고 나온 거야. 캘빈클라인 옵세션”. 유레카. 비밀은 밝혀졌다.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향수라는 걸 사본 적이 없었다. 향수라는 건 엄마의 화장대에 올려져 있는, 끈적한 노란 액체가 담긴 사각병밖에 몰랐다. 나는 그걸 ‘엄마 냄새’라고 불렀다. 넘버 파이브를 만든 코코 샤넬이 듣는다면 기겁할 소리지만, 어쨌든 1990년대의 10대 소년에게 향수라는 건 엄마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더는 아니었다. 캘빈클라인 청바지를 입는 나에게 캘빈클라인의 향수라는 건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신문물이 됐다. 나는 차곡차곡 용돈을 모은 뒤 옵세션을 샀다. 그게 여자 향수인지 남자 향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18세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마침내 깨달았다는 사실이었다.

대학에 올라가자마자 CK ONE이 나왔다. 1994년이었다. ‘젠더리스’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전에 젠더리스를 표방한 그 향수는 그야말로 1990년대의 향기였다. 어딜 가도 CK ONE 냄새가 났다. 나는 뭔가 좀 다른 것을 원했다. 누구도 뿌리지 않는 나만의 향기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1990년대는 한국에서 패션이라는 것이 마침내 진지하게 이야기해도 좋은 문화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모든 것이 그제야 출발점에 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화점에 가도 향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코너는 너무 협소하거나 아예 없었다. 그래서 옷 좀 입는 남자 대학생들에게서는 CK ONE 아니면 랄프 로렌의 ‘폴로 스포츠’ 향이 났다. 여자에게는 꽃향기가 났고 남자에게는 독한 시트러스 냄새가 났다. 후각이 발달한 사람에게는 조금 지루한 시대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향의 세계로 빠져든 건 2003년 영국에서 잠시 살던 시절이었다. 고풍스러운 런던 백화점은 입구에서부터 근사한 향이 났다.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향수들이 진열된 매장은 향기의 놀이터라고 부를 법했다. 거기서 나는 놀라운 신문물을 발견했다. 향초였다. 놀랄 정도로 진한 장미 향이 나는 향초에 코를 박자 눈앞에서 베르사유의 장미 정원이 펼쳐졌다. 아니다. 솔직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의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화적 과장법은 어느 정도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처음으로 향초의 냄새를 맡아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당신 역시 “하다 하다 이제는 향수가 뿌려진 초도 100달러를 넘게 주고 사게 생겼네”라고 한탄하면서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내가 맡은 향초는 딥티크의 베이 향이었다. 나는 그 향초의 디자인을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 시리즈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는 겨우 일간지 하나에 섹스 칼럼 하나를 쓰는 주제에 지미추와 마놀로블라닉에 수천 달러를 갖다 바치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환상의 존재였다. 칼럼 하나를 팔아서 한 달을 살 수 있다면 나도 진즉 뉴욕에 가서 섹스 칼럼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건 내가 ‘향초’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향수를 내 몸이 아니라 집에도 뿌릴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던 걸까. 내 집에서는 언제나 담배 냄새 아니면 젖은 빨래 냄새가 났다. 혼자 사는 남자가 뿜을 수 있는 향기는 그 정도뿐이었다. 나는 딥티크 향초를 당시로서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을 주고 구입했다. 집에 와서 향초에 불을 붙이자마자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하우스메이트가 방으로 쳐들어왔다. “향수라도 쏟았어?” 그게 첫 마디였다.

지금 내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향초와 디퓨저와 룸 스프레이가 있다. 여전히 나는 딥티크의 제품들을 사랑한다. 딥티크의 많은 향초와 디퓨저를 사봤지만 결국 돌아가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약간 독한 장미 향의 ‘베이’다. 딥티크의 가장 멋진 제품은 모래시계처럼 뒤집으면 향수가 가운데의 옴폭 파인 부분을 통과하며 향을 은은하게 발산하는 디퓨저다. 이건 더는 딥티크에서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깨뜨리지 않으려 언제나 주의를 하며 향수를 교체해준다. 이솝의 룸 스프레이는 중년 남자의 담배와 땀 냄새에 전 침실에 누군가를 초대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사실 나의 팁은 룸 스프레이와 샤넬 넘버 파이브를 살짝 섞어서 뿌리는 것이다. 샤넬 넘버 파이브는 몸보다 방에 더 잘 어울린다!). 요즘은 ‘바트밋’이라는 한국 브랜드의 디퓨저도 종종 구입한다. 나는 고양이를 키운다. 고양이는 보기와는 달리 간이 약한 동물이라 몇몇 종류의 천연 에센셜 오일을 잘 해독하지 못한다. 바트밋은 고양이에게 안전한 에센셜 오일만을 이용해서 디퓨저를 만든다. 만약 당신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향초와 디퓨저를 구입하기 전에 꼭 인터넷으로 ‘고양이에게 해로운 에센셜 오일’을 검색하길 당부드린다. 어쨌든 안전한 게 제일이다.

얼마 전 나는 이솝 매장에 갔다가 제법 거대한 향초를 하나 샀다. 패션 디자이너 릭 오웬스와 협업으로 내놓은 제품이었다. 릭 오웬스라니. 나는 릭 오웬스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는 거의 조각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남자지만 내가 소화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둡다. 하지만 나는 협업에 약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한정판에 약한 사람이다. 이솝 매장 직원은 ‘향초치고는 조금 비싸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 말했다. “한정판이라 참 예쁘게 나왔죠. 향도 릭 오웬스라는 이름치고는 아주 은은하고요.” 나는 1993년 어느 날 캘빈클라인의 옵세션을 구입하던 그 마음으로 카드를 빼 들고 말했다. “제일 큰 걸로 주세요.” 나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향초가 휘발하는 것이 너무 아까운 나머지 좀처럼 불을 붙이질 못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방 역시 불을 붙이지 않은 향초로 가득할 것이다. 틀림없다.

글쓴이 김도훈

오랫동안〈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편집장을 거쳐《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에디터 : 심효진  |   글 :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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