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덕질’ 이력서
우리 회사는 K팝 팬 활동을 돕는 모바일 앱 운영 스타트업이다. 그래서 채용 공고에 ‘덕질(무언가에 빠져서 좋아하기) 이력서’란 항목이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얼마나 K팝을 좋아하는지를 담아야 한다. 이 분야 일을 하려면 ‘스펙’ 말고도 팬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모이길 바라며 만든 항목이기도 했다.
지난 2년 동안 약 300개 넘는 덕질 이력서가 모였다. 자신의 이력을 세련된 디자인의 파워포인트 형식과 재치 넘치는 스토리텔링으로 수십 장씩 적어 보낸 지원자도 많았다. 그러나 작은 스타트업 채용 인원의 한계로 많은 분에게 죄송하다는 ‘불합격’ 회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맙다’는 답신이 많이 왔다. “소중한 내 인생의 한 부분인 덕질을 물어본 회사는 처음이었다”, “떨어졌어도 덕질 이력서 만든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내가 어떤 일을 진짜 하고 싶은지 알게 된 기회였다”.
이들은 특히 ‘덕질’로 “스스로의 껍질을 깰 수 있었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처음 홀로 해외에 나가 같은 아이돌 멤버를 좋아하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며 친구가 되고, 아이돌 팬덤 친구들과 다양한 대외 활동과 봉사 활동을 다니며 내성적인 성격을 깨고 세상을 좀 더 마주할 기회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평소 ‘덕질’을 한다 말하면 ‘한심한 빠순이’ 대접을 받은 탓에 위축된 적이 많았다고 했다. 스스로 먼저 ‘최애(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가 누군지 밝히는 ‘덕밍아웃(덕질+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한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니 ‘덕질 이력서’가 그들에게는 속 시원하고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되다’가 생각났다. 주인공 월터는 포토에디터란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만 찌질한 망상가 취급을 받는다. 어느 날 자신의 잡지 표지에 실릴 사진 필름을 현상하기 전 잃어버리고, 이를 되찾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 사진작가가 ‘인생의 정수’가 담겨 있다며 넘겨줬던 그 사진 필름은 찾고 보니 공원에서 사진 고르는 일을 하고 있던 월터 자신이 찍혀있었다.
어쩌면 지원자들에게 ‘덕질’이란 월터가 히말라야 산까지 오르며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게 해 준 그 ‘필름’과도 같지 않았을까. 인재 채용 전쟁 시장 속에서 나는 오늘도 세상의 모든 월터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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