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에 희망 따위 없다"..'영끌 투자' 내몰린 불안한 세대의 초상, 연극 '자연빵'

선명수 기자 2022. 8. 3. 18: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출가 전윤환 비트코인 투자기 담은 다큐멘터리극
욕망에서 탈주하고자 시작한 섬 생활서 '욕망의 막차' 탑승
무대 위에서 빵 굽고 티켓 수익금으로 비트코인 투자
개인 경험담 불안한 세대의 이야기로 확장
4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자연빵>은 한 귀농 연극인의 비트코인 투자기를 통해 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투자에 삶을 걸게 됐는지 묻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극이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귀농 연극인의 비트코인 투자기.”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연극 <자연빵>을 소개하는 포스터 문구 중 하나다. 귀농과 연극과 비트코인이라는, 언뜻 한데 묶이기엔 어색해보이는 단어의 조합이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막이 오르면 한 남자가 무대 위에 올라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코인 하면서 농사 짓는 연극 연출가 전윤환입니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 와중 전국이 투자 열풍으로 들썩였다. 이런 광풍의 근원엔 집단적인 불안이 있었다. 착실히 돈을 모은다 해도 투자 없이는 뒤처질 수 있다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조차 누릴 수 없다는 불안이 투자 심리를 부추겼다. 열심히 일해 번 월급을 평생 모아도 내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땀 흘려 일해 번 돈만이 값지다는 고도성장기의 ‘근로 예찬’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불로소득을 통한 경제적 자유의 획득. 그것은 어느새 청년세대의 유일한 희망이자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됐다.

극단 앤드씨어터의 대표 전윤환 연출(36)의 <자연빵>은 이런 투자 열풍 속에서 무엇이 2030세대를 이른바 ‘영끌’로 내몰았는지를 비추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연극을 하며 번 전 재산을 비트코인에 투자했던, 전 연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 있다.

다큐멘터리 연극 <자연빵>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극으로 주목받는 젊은 창작자였던 전윤환은 4년 전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강화도로 이주했다. 창작자로서 늘 자기증명을 해야 하고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경쟁에 지쳤고, “대도시의 빠른 속도만큼 빨라지는 욕망을 감당할 수 없어서” 도시를 떠났다.

섬에서 텃밭을 일구고 지역의 예술가들과 창작을 이어가던 그에게도 지난해 초 뒤늦은 ‘코인 열풍’이 찾아왔다.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자본과는 가장 멀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연극, 그중에서도 ‘귀농 연극인’인 그에게도 가상통화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동료 연극인의 말은 유혹적이었다. 욕망에서 탈주하기 위해 섬으로 떠났던 그는 이 욕망의 막차에 탑승하기로 한다.

처음 100만원을 넣자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200만원이 됐다. 눈이 번쩍 뜨인 그는 200만원을 더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300만원이 900만원이 되는 데까지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연극을 하며 번 전 재산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이틀 만에 1000만원이 날아갔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대폭락’을 경험한다. 현재 수익률은 마이너스 74%. “아날로그 시장에선 어차피 안 될 테니까 디지털 세계에서 승부를 보자”던 그는 이 투자 성적표에 “나 새끼…망했다”고 털어놓는다.

‘반등’ 허락하지 않는 불안한 시간들...“끝나지 않는 연극에서 어서 탈출하세요”

<자연빵> 공연 중 전윤환은 티켓 수익금의 일부를 실시간으로 가상통화에 투자한다. 주식과 가상통화, 부동산에 ‘삶’을 건 현 시기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며 무한경쟁 체제 속 이른바 ‘흙수저’들의 열패감과 불안을 투명하게 비춰보인다. 전윤환은 연극 무대가 감상을 넘어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다수의 다큐멘터리극 작업을 해왔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코인 투자라는 개인의 경험을 “무한경쟁 속에 가루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안은 세대의 고민으로 확장시킨다.

경쟁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땅을 개척하고자 했던 그는 농사꾼으로서 “인정사정 없이” 잡초를 뽑아내면서도 “잡초가 저 같아요”라고 말한다. 검정 비닐로 밭을 온통 덮어버리고 아예 잡초가 솟아날 구멍을 주지 않는 ‘멀칭’이 ‘농사의 혁명’이라 불렸던 것처럼, “선택된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밀어내고 쓸어버리는 것”이 곧 효율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의 작동원리에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그 자신과, 그의 연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연극을 보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 ‘죽은 고양이’의 ‘반등’이 허락되지 않았던 불안한 시간들을 나직하게 털어놓는다.

피터 슈만의 ‘빵과 인형극단’처럼 빵을 구워 관객과 나누고 공동체성이 살아있는 연극을 꿈꿨던 젊은 연극인은 무대 한구석에서 빵을 구워 홀로 우걱우걱 먹는다. “이 연극에 희망 따위는 없다”고 선언한 그는 “끝나지 않는 연극에서 어서 탈출하세요”라는 말을 남긴 채 관객보다 먼저 극장을 빠져나간다. 배우가 사라진 무대 위, 가상통화 거래소의 그래프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다큐멘터리 연극 <자연빵>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자연빵>은 투자 광풍의 한복판에 있던 지난해 6월 서울 신촌극장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올해 세종문화회관의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넥스트 22’의 초대작으로 1년여 만에 다시 관객과 만나게 됐다. 전 연출은 3일 리허설을 마친 뒤 “왜 한국사회의 2030세대가 제대로 된 사다리 없이 주식이나 비트코인, 부동산 투자 열풍에 자신의 인생을 걸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올해 금융시장 상황은 지난해와 확연히 다르다. 시장에 거품이 꺼진 올해 많은 ‘개미’들이 손실을 봤다. 그는 “지난해 ‘영끌’을 해서 투자했던 이들이 올해 달라진 시장 상황에서 폭락에 금리상승까지 겹쳐 많은 대출금을 부담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작품 수정을 고민했지만 그대로 뒀을 때 (지난해 상황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층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수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윤환은 “무대에서 가짜 희망을 말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했다. 그는 “흔히 예술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다면 이 상황을 오히려 직시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연은 4~7일.

다큐멘터리연극 <자연빵>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