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웅의 고지도] 대영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베스콘테 세계지도'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고문 2022. 7. 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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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년 베스콘테가 제작한 세계지도(출처: The British Library)

14세기 초 베네치아의 정치가이자 지리학자인 마리노 사누도 토르셀로Marino Sanudo Torsello(1270년경~1343)는 평생을 십자군Crusaders 정신과 운동을 부활시키기 위해 진력했다. 그는 1306년에서 1307년에 걸쳐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촉진시키기 위한 <충실한 십자군을 위한 비밀의 책>을 집필해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에게 헌정했다. 그 뒤 개정과 증보를 거듭해 1321년에는 지도를 수록한 2권의 책을 펴내 교황 요한 22세John XXII에게 헌정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o II가 당시 이슬람 셀주크 튀르크의 점령 하에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전쟁을 호소하면서 일어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으로, 1272년까지 127년간 9차에 걸친 종교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사누도가 십자군 운동을 펼치던 때는 이미 십자군 원정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베네치아의 소위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교역로를 확보해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지도 한켠에 '베스콘테' 서명

사누도의 책은 그후에도 여러 차례 복제되어 호화로운 삽화가 수록된 판본은 유럽 전역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현재 적어도 11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가운데 대영도서관 소장본은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는 모두 8장으로, 포르톨라노와 항해도는 대서양 연안Atlantic coastㆍ지중해 중심Central Mediterraneanㆍ지중해 동부와 홍해Eastern Mediterranean and the Red Seaㆍ지중해 동부Eastern Mediterraneanㆍ흑해Black Sea 5장이고, 세계지도Mappa mundi 1장, 성지지도Map of the Holy Landㆍ아크레와 예루살렘Acre and Jerusalem 등이다.

사누도의 책에 수록된 지도는 오랫동안 사누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지도에 '피에트로 베스콘테Pietro Vesconte'의 서명과 '1320년'이란 연도가 적힌 책이 발견되면서 베스콘테의 제작으로 밝혀졌다. 피에트로 베스콘테는 생몰연대는 물론 생애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1310년경부터 1330년까지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지도를 제작해 14~15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카탈루냐Catalán의 지도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 해도 중 가장 오래된 해도 제작

베스콘테는 주로 중세의 해도인 포르톨라노Portolano를 제작했는데, 1311년에 제작한 지중해 동부의 포르톨라노는 현존하는 중세 해도 가운데 서명과 날짜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해도로 알려져 있다. 1318년에는 지중해와 흑해ㆍ대서양 연안을 정확하게 묘사한 해도 9매를 묶은 '비엔나 아틀라스Vienna Atlas'를 제작했다. 하지만 베스콘테의 작품 중 단연 돋보이는 지도는 1321년경에 제작된 세계지도로, 현존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꼽힌다.

대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누도의 책 187~188쪽에 수록된 원형의 세계지도는 좌우에 각 대륙의 해설이 실려 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42.7cm, 세로 29.3cm이다. 이 세계지도에는 16개 방위반compass winds에서 뻗어나간 항정선rhumb line 네트워크가 지도 전체에 교차하고 있어 해도처럼 보이지만, 이 항정선 네트워크는 실제 해도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공간을 격자화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의 방위는 위가 동쪽이나, 지상낙원은 보이지 않고, 16개 항정선이 교차하는 지도 중앙에 예루살렘이 위치한다.

지도의 테두리는 두터운 적색 선으로 그리고, 그 안쪽은 녹색의 환해Oceanus가 기지의 세계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나, 종래의 세계지도와 달리 홍해는 적색이 아닌 여느 바다와 동일하게 채색돼 있다. 바다와 호수ㆍ강은 녹색이고, 산맥은 톱니 모양의 갈색, 육지는 지도의 바탕색이며, 주요 도시는 적색의 왕관과 성城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명과 설명주기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표기되고, 일부 주요 지명은 적색으로 돋보이게 했다. 환해에는 대륙의 명칭이 적색으로 표기되었는데, 'ASIA'는 지도의 위쪽 반, 'AFRICA'는 지도 아래 오른쪽, 'EUROPA'는 아래 왼쪽에 간격을 벌려 쓰여 있다.

플랑드르에서 흑해 북부의 해역인 아조프Azov까지 이탈리아 선원들에게 잘 알려진 지중해 연안은 자신의 '비엔나 아틀라스'를 참조한 탓인지 매우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지중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시대부터 유럽 탐험가들에 의해 전해진 새로운 지리적 지식의 흔적이 거의 없다. 지도 상단의 많은 섬이 있는 만입 바로 아래는 곡Gog과 마곡Magog의 땅이며, 그 바로 아래 '시르카Sirca'는 중국을 가리키고, 중국 오른쪽 끝의 돌출된 둥근 반도는 '인도반도'이다.

중국 바로 아래 산맥에 둘러싸인 섬 3개가 있는 호수에는 '카스피해mare caspia'라고 쓰여 있으나, 위치로 봐서는 아랄해이고, 그 아래 뾰족하게 생긴 호수가 카스피해로 추정된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가로 놓인 산맥이 코카서스산맥이고, 산맥에 그려진 네모 난 큰 문은 '철의 문Porte Forree'으로, 페르시아인과 튀르크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문을 '카스피해 문'이라고 부른다. 카스피해 오른쪽 산맥 너머의 적색 지명은 페르시아Psia이고, 페르시아 아래쪽의 적색 지명은 바그다드baldac이다. 바그다드 오른쪽의 아라비아반도에 한자 '山'처럼 생긴 적색 기호는 메카Mecha를 표시한 것이다.

남반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프리카는 소말리아반도가 지나치게 크게 돌출되고, 남쪽이 실종된 매우 부정확한 형태이고, 서쪽에는 기니만이 표현되어 있다. 나일강은 구분할 수 없는 산에서 발원하여 북상해 이집트Egyprus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들고, 강을 따라 많은 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서西나일은 사하라사막을 횡단해 대서양으로 유입되고,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서는 아틀라스산맥이 길게 뻗어 있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은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돼 발칸반도와 이탈리아반도, 이베리아반도 등은 쉽게 구분할 수 있으며, 둥그스름한 산맥은 알프스산맥이다. 영국Anglia과 아일랜드Ybernia, 유틀란드반도, 발트해, 스칸디나비아반도 등도 형태는 이상하지만, 지세 파악은 할 수 있는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독일Germania과 프랑스Francia, 파리, 이스파니아Yspania 등은 적색 지명으로 표기돼 있고, 노르웨이Norvegia와 스웨덴Gotia의 출현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한 종래의 지도로부터 진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의 공간 개념 확대에 큰 영향

원형의 지도 왼쪽 상단은 아시에 관한 해설이고, 간격을 띄워 유럽에 관한 해설이 적혀 있다. 우측 상단은 유럽의 해설이 계속되며, 간격을 띄워 그 하단이 아프리카에 관한 해설이다. 해설은 주로 지방에 관한 역사와 특징에 관한 것인데, 그 내용의 일부는 이렇다. "지도에 콜키스Colchis(고대 조지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조지아Georgia 왕국은 처음 등장하며, 그 동쪽에 크고 하얀 산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아르메니아Armenia가 있다. 아르메니아 왕국 동쪽에는 화레즘Khawrazm(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 왕국이 있고, 그 북쪽에는 니시아Nisia 왕국이 있으며, 가장 큰 도시는 사라이Sarai(킵차크 칸국의 옛 수도)다."

베스콘테의 원본 세계지도는 남아 있지 않지만, 사누도의 <충실한 십자군을 위한 비밀의 책>에 그 원형이 남아 있으며, 1611년 요한 봉가르스Johann Bongars의 <동방 탐험의 역사>에 처음 인쇄물로 재현되었다. 베스콘테/사누도의 세계지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만큼 널리 보급되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14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지도로 평가되며, 중세의 공간 개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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