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겜 보며 "그럴법하다" 공감했다면, 그만큼 세상이 슬퍼졌다는 겁니다 [황동혁 단독 인터뷰]

김유태 2022. 6. 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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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포니정혁신상 수상
황동혁 오징어 게임 감독
12년 전 각본 썼을때만 해도
공감 못받으리라 걱정했는데
양극화 심해지며 현실성 얻어
12일만에 넷플릭스 전세계 1위
기자 꿈꾸며 언론 전공했지만
신림동 하숙집서 친구들과
비디오 빌려보며 영화에 푹
엄마가 준 카메라로 단편 찍어
매번 식은땀 흘리더라도
나를 시험에 들게하는 일 도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독될것
황동혁 감독. 저 이름에 담긴 무게감과 부피감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하 '오겜') 공개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드라마 오겜이 만들어낸 현실은 더 드라마 같았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당신(황 감독)의 뇌를 훔치고 싶다"며 황 감독을 극찬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묻게 된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한 사람의 두뇌로부터 발아한 이야기가 동시대인에게 이 정도로 열광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황 감독이 최근 포니정혁신상 수상자로도 결정됐다. 현대자동차 설립자인 고(故) 정세영 HDC그룹 명예회장의 애칭 '포니정(PONY 정)'에서 이름을 따와 2006년 제정된 상이다. 포니정재단은 16일 열리는 시상식에서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적인 보편성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찬사를 그에게 헌사할 예정이다.

황 감독을 최근 서울 한남동 카페에서 만났다.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 탓인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막힘없이 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근황이 궁금하다.

▷미국 '타임'에서 선정한 '영향력 있는 100인' 갈라 행사에도 다녀왔고, 넷플릭스 현지 홍보 행사도 있었다. 아무래도 시즌2 때문에 요즘 글쓰기가 주업이다.

―'오겜' 공개 이후 지난 9개월은 모두에게 진기한 후일담으로 가득했다.

▷로스앤젤레스(LA)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이 연락해 "여기, 모든 사람이 오겜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 글로벌 1위 소식을 듣기 전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오겜 시즌1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12년이 걸렸는데, 가장 인기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가 되기까지 단 12일 걸렸다.

―수없이 들은 질문이겠지만, 흥행을 예상했는지.

▷정말 경이로운 일이었다. '글로벌 1위'는 예상보다 목표였다. 서양 시청자들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서바이벌물을 즐기는 걸 알고 있었고, 해외에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줄다리기 같은 게임이 있어서 세계인의 보편적 기억을 끄집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긴 했다. 세트와 의상에 담긴 상징도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요소를 고려했기에 친근하리라 생각했다.

―이번에 수상한 '포니정혁신상'도 보편적 공감에 관한 찬사로 보인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하던 놀이로 현대사회의 경쟁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한 점을 신선하게 봐주신 게 아닌가 싶다. '혁신'이란 과분한 단어보다도 아날로그 놀이가 디지털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전 세계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낸 것, 그런 융합의 측면을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드린다. 고전적인 것으로 미래에 일어날 폐해를 이야기하기, 융합이란 그런 게 아닐까.

◆ 현실을 관통한 슬픈 개연성

―등장인물의 선명성은 오겜의 주요 특징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저 선명성이 극의 몰입도와 작품 완성도를 결정할까.

▷그런 편이다. 이주민 알리, 탈북자 새벽, 노동운동 출신 해고자 기훈, 노인 대표 일남, 경제엘리트 대표 상우 등이 모두 각 집단을 대표한다. 복잡한 인물 대신 공감이 쉽도록 집단 그룹의 대표성을 인물에 녹였다. '마이너리티' 대표들의 이야기인데, 그러기 위해선 선명해야 했다.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영화를 이해하는 분이 많다. 오겜의 흥행엔 그런 잠재의식이 깃들어 있었을까.

▷오겜이 시대정신(Zeitgeist)을 건드렸다고 들었다. 처음 오겜을 생각한 12년 전에 이 드라마가 공개됐다면 '아무리 거액을 준다고 하더라도 과연 누가 목숨까지 걸겠느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10여 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었다. 극심한 경제적 위기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한 뒤로 불평등은 심화됐다. 비트코인, NFT(대체불가토큰)로 대변되는 투기성 자금이 마구 몰려다니고 부동산이 없어 하루아침에 벼락거지가 되는 시대다. 무한한 돈 놀음, 그 옆에서 오겜과 현실 사이에 개연성이 생겨버렸다.

―오겜은 우리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심화되는 불공정과 너무 커져버린 빈부 격차, 능력주의 폐해와 자본주의 모순…. 오겜은 바로 그런 부분을 드러내고자 했다. 말도 안 되는 게임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게 되는 것,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를 시청하면서 만인이 '그럴 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것이 개연성이다. 이런 개연성은 사실 참 슬픈 일인데, 오겜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성공한 게 아닌가 싶다.

◆ 영화의 문(門)으로 들어서다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보자. 영화에 매혹된 건 언제였을까.

▷고교 시절, 엄기영 특파원이 파리에서 바바리코트를 입고 파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리포팅하는 모습을 봤다. 너무 멋져 보였다. 기자가 돼볼까 하는 마음에 신문학과를 갔다(웃음).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휴학했고, 신림동 녹두거리 하숙집에서 비디오를 빌려 친구들과 영화만 봤다. 1만원짜리 한 장 내면 비디오데크에 비디오테이프 4편을 빌려주던 시절이었다. 액션·홍콩·에로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만 봤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감독이 되진 않는다.

▷영화를 보다 보니 글 쓰는 삶을 꿈꿨고 국문과 대학원에 가볼까 하다가 학보사에 영화평도 기고하고 그랬다. 대학 4학년, 어머니께서 중고 비디오카메라를 어디서 가져오셨다. 농활이나 축제를 다니며 영상을 찍다 보니 남들이 만든 걸 '씹고 뜯고' 하는 것보다 직접 만드는 게 재미가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주신 카메라가 감독으로 들어선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서울대에 영화 한다는 사람은 없었는데, 신문학과 대학원에 가서 동아리 '씨네꼼'을 만들었고, 단편영화 비슷한 것도 2편을 찍어보고 그랬다(웃음).

―당시 어떤 영화가 인상적이었는지.

▷지금은 사라진 신림동 미림극장에서 봤던 레오 카락스의 1986년작 '나쁜 피'를 여전히 기억한다. 이미지들이 충격적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흔히 '인생 영화'라고 할 최고의 작품은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1984년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가장 추앙한다. 연기, 예술, 음악 등 모든 요소가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소중하게 아끼는 책이 있다면.

▷인생의 책을 하나만 꼽을 수 있을까. 기형도 시인을 좋아한다. 뭔가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시다가 떠나셔서 그런지 '요절한 천재 시인'이란 부분이 와닿았다. 유작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을 오래 읽었는데 어떤 여자애에게 선물로 줘서 지금은 없다(웃음).

◆ 기훈은 일남의 아들이 아니다

―오겜의 시즌2 윤곽을 여쭙지 않을 수 없다.

▷많이들 물어보시는데…(웃음). 시즌1에 벌여놓은 이야기, 해결하지 않았던 지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기훈(이정재)이 프런트맨(이병헌)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시즌2는 그 대화 이후 두 사람에게 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딱지를 든 양복남(공유)도 돌아올지 모르고, 첫 번째 게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등장했던 캐릭터 영희의 남자친구 철수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기훈의 생부가 일남(오영수)이란 설도 있다.

▷해외에서도 그 질문을 해주신 분들이 있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기훈에게 '출생의 비밀'은 없다. 그건 너무 한국적인 설정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일남의 모친 말순(김영옥)과 일남이 아무 관계도 아니란 건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다. 더 새로운 게임, 놀라운 이야기를 보여드리고자 노력하겠다.

―차기작은 영화 'KO클럽(Killing Old People Club)'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유작 에세이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그 책은 미래사회에 대한 에코의 농담 같은 예측이 담긴 책이다. 주변을 보자. 고령화와 저출산에 이은 세대 갈등이 이제 성(性) 대결로도 치닫고 있다. 이런 극단의 분열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브렉시트 당시 영국 청년은 '왜 노인들이 미래를 결정하느냐'고 항변하고, 한국 청년은 지금 '국민연금을 왜 내느냐'고 불만이다. 곧 닥칠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에코가 예견을 했더라. 현실감 있는 영화가 되리라 봤다.

―찾아보니 에코 책의 부제는 '유동사회의 연대기'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사회(액체사회) 개념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불안정성에 대한 은유적 개념으로 알고 있다. 과거 인간사회가 확고한 틀 안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일종의 고체적인 특성을 가졌다면 우리가 사는 현대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액체와 같은, 불안정성이 특성인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뭘 싫어하는지는 정확히 안다. 싫어하는 것에 대한 극단성이 분노로 표출되는데, 극단적 분노의 결과인 극단적 폭력이 'KO클럽'에 담길 것이다. 인물보다 집단의 이야기로, 폭력성 때문에 관람등급은 '19금'이 될 것이다.

시즌1서 시청자 덜덜 떨게한 영희…"다음 시즌에선 철수가 기다려"

오징어 게임 시즌2와 함께
영화 'KO클럽'도 준비
극단적 분노 가득한 세상 묘사

◆ 무거운 실화들, 그리고 허구

`오징어 게임`의 시즌2 포스터. [사진 제공 = 넷플릭스]
―감독으로서 '이걸 작품으로 연출해야겠다'는 확신은 언제 올까.

▷매번 다르다. 데뷔작 '마이 파더'와 '도가니'의 경우 둘 다 무거운 실화였다. 이후 누구나 '힐링'할 수 있는 영화, 또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를 향한 헌사를 남기는 영화로 '수상한 그녀'를 작업했다. '남한산성'은 약자들의 논쟁이란 점에 이끌려 연출을 결심했다.

―그간 작품을 보면 입양(마이 파더), 노년(수상한 그녀), 학대(도가니), 치욕(남한산성), 빈곤(오징어 게임) 영화 등 우리 사회에 유전자처럼 각인된 여러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변주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나의 흐름으로 꿰맨다면 꿰맬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남한산성의 경우 시각적 욕망이 더 컸다. 바싹 마르고 서걱거리고 추운 날의 비애미,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처절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눈 내리는 한겨울 풍경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일관된 흐름이 아니라 순간 끌리는 걸 선택하는 편이다.

―연출의 동인이 강렬한 이미지일 때가 잦은지.

▷도가니의 경우도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재판장에서 아이들이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를 듣는 부분 말이다. 가슴이 아팠고, 이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저만 볼 수 있는, 그런 이미지가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

◆ 미지의 두려움이 주는 매혹

―몇 년간 스케줄이 모두 짜여 있겠다.

▷즉흥적인 스타일이라 남들 같은 회사원이 될 자신은 없었고, 정기적으로 계획해 움직여야 하는 일을 잘 못한다. 영화감독이 그나마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웃음). 일종의 프리랜서 아티스트랄까. 오겜의 시즌2도, KO클럽도 미리 정해놓은 셈인데 그동안 제가 안 하던 방식이다. 오겜 때문에 '해야만 하는 것'이 생겼고, 그래서 조금 과부하가 걸려 있다.

―'다음'을 정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더 찬란하다.

▷굳이 말하면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닥쳐온 일부터 성실하게 잘하자'는 게 삶의 어떤 원칙이었다. 한 분야를 탐구해서 나아가는 좋은 감독님들도 많지만, 사실 저는 한 번 했던 것은 다시 하지 않을 정도로 싫증도 정말 잘 내고, 한 번 한 건 또 잘 안 쳐다보는 성격이다. 솔직히 말하면 후반 작업 후에는 오겜도 다시 안 봤다(웃음).

―감독 황동혁의 '다음'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이런 건 있는 것 같다. 싫증을 잘 낸다는 건 이미 해봤던 일들 대신 전혀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려 말하자면 저 스스로를 두렵게 만드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저 자신을 떨리게 만드는 일, 저 자신을 무섭게 만드는 일, 심지어 '내가 이런 걸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제게 주어진 '컴포트 존(안전지대)'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저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후회가 되고 식은땀이 나더라도 '매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독'이란 얘기를 듣고 싶다.

▶▶ 황 감독은…

△1971년 서울 쌍문동 출생 △서울대 신문학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대학원 영화제작학 졸업 △2007년 영화 '마이 파더'로 데뷔 △2011년 영화 '도가니', 2014년 '수상한 그녀', 2017년 '남한산성' 등 연출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연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디렉터스컷 어워즈 시리즈 부문 올해의 감독상,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연출상, 포니정혁신상 등 다수 수상 △오징어 게임으로 고섬 어워즈 최우수 신작 장편 시리즈상 수상, 피플스 초이스 어워즈 올해의 정주행 드라마상 등 수상

[김유태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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