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 영랑의 사랑은 '현재진행형'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2. 6. 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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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아직도 기다릴까···찬란한 슬픔의 봄을/스무살 청년 영랑과 ‘전설의 무희’ 최승희 애절한 사랑 ‘시극’으로 다시 태어나/출연 배우들 모두 강진 주민/다산 유배때 머물던 사의재엔 노랑 꽃창포 활짝/한옥체험관선 제철 식재료로 팜파티 즐겨

강진 시극 '모란이 피기까지는'
하늘거리는 연보랏빛 원피스와 하얀색 망사 모자로 멋을 낸 신세대 여성. 무대에 올라 ‘불꽃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그녀는 모란을 닮았다. 남도 바다를 그대로 닮은 쪽빛 슈트와 중절모 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에 한눈에 반할 수밖에. 끝없는 구애 끝에 마음이 움직인 여자는 남자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시인 영랑 김윤식과 ‘전설의 무희’ 최승희의 애절한 사랑. 현실에선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영랑은 지금도 노래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강진 사의재 정원 연못
◆이루지 못한 시인의 사랑

전남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조선시대 개혁정신의 상징이자 실학의 정점, 다산 정약용을 들 수 있다.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사건 때 겨우 목숨만 건진 뒤 머나먼 귀양길에 나선 다산이 1801년 도착한 곳이 바로 허름한 강진의 주막 동문매반가. 다산은 강진에서 18년을 보내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초기 유배생활 4년을 지낸 주막이 현재 강진읍에 남아 있는 사의재(四宜齋)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 4가지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뜻으로 강진군에서 오랜 고증을 거쳐 2007년 우물가 주막 집터를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사의재와 주모상
짚으로 지붕을 엮은 사의재로 들어서자 연못가에 노란 꽃창포 활짝 피어 여행자를 반긴다. 처마에 청사초롱 등불을 매단 주막, 다산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동문매반가 할머니와 외동딸이 술병을 들고 선 ‘주모상’, 연못가 원두막이 어우러져 조선시대로 점프한 듯하다. 사의재 주변도 저잣거리로 꾸며졌고 고풍스러운 한옥체험관들이 늘어서 사극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초여름이면 사의재 연못가에는 탐스러운 수국이 지천으로 피어 예쁜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강진 영랑 생가
영랑 생가 장독대
다산과 함께 강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시인 영랑. 1903년 강진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살던 생가가 강진읍 남성리에 잘 보존돼 있다. 사의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영랑은 휘문의숙 재학 시절인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귀국한 스무 살 청년 영랑은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데, 바로 최승희다. 영랑은 문단 일로 서울을 오가다 영화제작자이던 최승일을 통해 여동생 최승희를 소개받으면서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강진 영랑 생가 안채
하지만 둘의 사랑은 양쪽 집안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영랑이 자살까지 시도한 걸 보니 실연의 아픔이 무척 컸던 모양이다. 그런 2년여 열애의 추억과 실연의 아픔을 서정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꾹꾹 눌러 담은 시가 바로 1934년 ‘문학’에 발표하고 1935년 ‘영랑시집’에 수록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영랑이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며 노래한 모란이 바로 최승희.
강진 세계모란공원 영랑 동상
영랑 시비가 지키는 생가 대문을 지나 안채 툇마루에 앉는다. 지천으로 피어 5월의 생가를 화사하게 꾸미던 모란은 그의 시처럼 뚝뚝 떨어지고 없다. 사랑을 잃고 매일 밤을 고통으로 지새우던 영랑을 떠올리니 가슴 한 귀퉁이가 쓸쓸하다. 박용철·정지용 등과 1930년 ‘시문학’ 동인을 결성해 섬세한 언어로 순수서정시를 개척한 영랑은 1950년 6·25전쟁 당시 포탄 유탄에 맞아 생을 마감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구식 현대무용을 창작·공연하며 동양 춤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의 삶도 기구하긴 마찬가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서 활동하던 문학운동가 안막과 결혼해 1946년 월북했지만 1969년 숙청당하고 만다. 만약 둘의 사랑이 이뤄졌다면 그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까.
강진 시극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극으로 다시 핀 영랑의 ‘모란’

다산과 영랑의 흔적을 따라가는 강진 여행이 요즘 더욱 풍성해졌다. 지난달 20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6시30분 영랑 생가 인근 세계모란공원 야외에서 열리는 ‘시극’ 덕분이다. 모두 4개 공연이 무대에 올려지는데 첫 무대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최승희가 무용가라는 점에 착안해 창작무용으로 풀어 가며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5분의 공연에 담았다. 최승희가 나비처럼 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배경곡은 국악그룹 동화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애절한 목소리와 구슬픈 가락이 영랑의 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실연의 아픔을 극대화한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매우 뛰어난데 놀랍게도 모두 강진 주민들. 영랑 역을 맡은 박부균(52)씨는 농사를 짓고 최승희를 연기한 일본인 안도 아이리(50)씨는 보험설계사. 선이 아름다운 한국무용의 미를 선보여 눈길을 끄는 안도씨는 강진 남자와 결혼해 20년째 이곳에 살고 있단다.

강진 시극 '초의선사 드림'
두 번째 ‘초의선사 드림’(Dream)은 다산과 학문을 나누던 초의선사의 꿈을 그렸다. 다산은 유배생활 중 대흥사 임지암에 거처하던 초의선사에게 마음속 얘기들을 털어놓으며 외로움을 달랜 것으로 전해진다. 초의선사도 다산과 함께 시를 쓰며 학문의 회포를 풀었는데 다산을 만날 때마다 시를 그림으로 표현해 선물했다. 초의선사 시로 만든 창작곡이 불리는 동안 초의선사가 그림 한 편을 완성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역시 출연진은 강진에 사는 방과 후 강사, 도예가, 생활지도사.

세 번째 무대 ‘어느 날 어느 때고’는 중년의 삶을 노래한 같은 제목의 영랑 시를 모티브로 진행된다. 매일 싸우면서도 헤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어 가는 중년 부부의 삶을 복싱이라는 소재로 코믹하게 풀어 강렬한 웃음을 선사한다. 강진 시인 김현구가 냉철한 시각으로 광복을 바라본 시 ‘을유년 팔월십오일’로 꾸며지는 마지막 무대는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싸우던 시대 상황을 변사가 진행하는 무성영화 형식으로 풀었다. 시극 연출가 유선경씨는 “아마추어 배우의 진솔한 연기에 관객이 ‘공연이 끝난 뒤에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동이 크다’고 말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귀띔했다. 매주 토·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는 마당극 ‘청자조작단’이 무대에 오른다. 강진은 고려청자의 본고장. 백자가 유행하던 조선시대에 고려청자 복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프닝이 신명 난다. 공연은 7월 둘째 주까지 진행되고 무더위가 심한 8월 말까지 잠시 쉰 뒤 9월부터 재개될 예정.

강진 한옥체험관 팜파티
강진 한옥체험관 팜파티
◆강진 식재료로 즐기는 건강한 팜파티
하반기부터는 ‘강진의 맛’도 더해진다. 바로 강진의 건강한 계절 식재료로 식탁을 꾸미는 ‘팜파티’다. 상반기 시극 마지막 공연 때 시범적으로 선보인 뒤 9월부터 시작된다. 본격적인 운영을 앞두고 식탁 메뉴 일부가 공개됐다. 한옥체험관 마당으로 들어서자 미식관광콘텐츠 기업 팜파티아 김은영 대표가 스파클링 음료 한 잔을 건네며 반갑게 맞는다. 국내 최초로 차에 상표를 붙여 제조·판매한 강진 이한영전통차문화원 백운동판차를 차가운 스파클링으로 천천히 내렸다. 녹차 스파클링을 한 모금 마시자 입에서 톡톡 터지는 버블과 쌉싸름한 녹차향이 잘 어우러지며 섭씨 30도를 웃도는 초여름 더위를 단번에 씻어 준다.
미나리전
바지락전
항아리 돼지 바비큐
입안에서 바스락거리다 눈 녹듯 사라지는 아스파라거스 튀김, 깊고 진한 맛이 일품인 매실에 절인 흙토마토를 비롯해 파프리카, 버섯, 바지락 등 모두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강진의 건강한 맛을 잘 살렸다. 그중 압권은 항아리 돼지 바비큐. 항아리 바닥에 뜨거운 숯불을 넣고,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꼬챙이 끼워 항아리 입구에 걸친 뒤 뚜껑을 닫아 한 시간 이상 천천히 굽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조리한다. 강진에서 옛날부터 사용하던 요리법으로 기름을 쏙 뺀 담백한 고기에 토하젓을 쓱쓱 발라 먹으면 강진 ‘병영설성 생막걸리’ 한 잔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강진=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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