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럽게도.. 발렌시아가에서 '군납' 슬리퍼를? [ESC]

한겨레 2022. 6. 1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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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코로나19 시대의 슬리퍼
군용 '비브라늄 슬리퍼' 닮은꼴 등
내구성·실용성과 함께 디자인 뽐내
마실용 넘어 존재감 다시 드러내길
1. 보테가 베네타 리조트 테디. 2. 디오르 알파 샌들. 3. 머렐 하이드로 목. 4. 아디다스×이지 폼 러너 설퍼. 5. 살레헤 뱀버리×크록스 폴렉스 클로그. 6. 발렌시아가 몰드 슬라이드 샌들. 7. 수이코크 닌-사보. 각 사 제공

주말이면 밀린 빨랫감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셀프 빨래방을 찾는다. 건조기 냄새에 취해 빨래통이 돌아가는 장면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도 같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말 셀프 빨래방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다. 한 날은 심상찮은 옷차림을 한 사내를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오 저건!”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을 뻔했다.

남자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거기에는 ‘KOREA ARMY’와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진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바로 슬리퍼다. 2010년대 이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슬리퍼. 맞다. 일명 ‘비브라늄 슬리퍼’로 통하는 군용 보급 슬리퍼였다.

 발매 즉시 ‘솔드아웃’되는 슬리퍼

초록색 군용 슬리퍼가 비브라늄(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가상의 금속 물질) 슬리퍼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터무니없이 강력한 내구성 때문이다. 아직 군 복무 기간이 21개월이었던 시절, 나는 입대 1주차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그 슬리퍼를 처음 건네받았다. 슬리퍼는 전역하는 날까지 단 한번도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지 않았다.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군대에서 신는 신발은 워커, 운동화, 슬리퍼 세가지밖에 없다. 군 생활 3분의 1을 슬리퍼 하나로 견뎌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도 구글 검색창에 ‘비브라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비브라늄 슬리퍼가 떠오르는 이유도 이러한 내구성 때문이다.

빨래방 이후로 비브라늄 슬리퍼를 본 것은 당혹스럽게도 발렌시아가 공식 웹사이트에서였다. 색깔은 달랐지만 아무리 봐도 보급품으로 받았던 그 슬리퍼였다. 결국 위아래로 찍은 상세 이미지를 보고 나서야 이 슬리퍼가 ‘몰드 슬라이드 샌들’이라는 다른 제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몰드 슬라이드 샌들을 보면 ‘발렌시아가에 대한민국 예비군 출신 디자이너가 입사했구나’ 생각마저 들게 한다. 발렌시아가에서 눈여겨봐야 할 슬리퍼는 몰드 슬라이드 샌들 말고도 또 있다. 발렌시아가는 최근 수년간 크록스와 협업을 펼쳐오는 중이다. 현재 발렌시아가 공식 웹사이트에서 팔고 있는 협업 제품의 이름은 ‘풀 크록스’다. 해당 신발은 크록스 클로그의 실루엣을 대부분 유지했지만 앞코 부분이 뚫려 있고, 키높이 구두 못지않게 높은 두께의 밑창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가격은 71만5000원. 2022년 기준 대한민국 병장 월급을 고스란히 쏟아부어도 못 살 가격이다. (병장 월급은 67만6100원이다.)

크록스의 인기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한때 크록스는 병동 의사들이 즐겨 신는 슬리퍼로 소문이 났지만, 코로나19 이후 판매고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지난 1월 <뉴욕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2021년 4분기 동안 크록스 매출은 무려 42%나 급증했고, 주가는 2021년 한해 동안 93%나 상승했다. 가뜩이나 높은 크록스의 인기에 부채질을 한 것은 살레헤 뱀버리와의 협업이다. 살레헤 뱀버리는 전 베르사체 스니커 부문 부사장이자, ‘스니커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풋웨어 뉴스 어치브먼트 어워드’에서 ‘2020 올해의 디자이너’를 수상한 인물이다. 그는 손가락 지문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패턴을 새긴 협업 폴렉스 클로그를 디자인했고, 해당 신발은 지금 국내 리셀 플랫폼 ‘크림’에서 출고가의 약 1.5배에 가까운 금액에 팔리고 있다.

발매될 때마다 품귀 현상을 빚는 슬리퍼는 아디다스에도 있다. 아디다스는 카녜이 웨스트가 이끄는 이지와 함께 ‘이지 폼 러너’를 출시해오고 있다. 이지 폼 러너 역시 비브라늄 슬리퍼와 마찬가지로 어퍼가 하나의 몰딩으로 완성됐다. 신발은 이브이에이(EVA) 폼 러너 소재로 만들어져 러닝화 못지않은 착화감을 제공한다. 정확히 슬리퍼라고 할 수 없지만, 또 운동화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디자인이다. 확실한 것은 이지 폼 러너가 다른 이지 라인업 스니커에 뒤지지 않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또 다른 슬리퍼는 머렐의 ‘하이드로 목’이다. 1981년 창립한 머렐은 미국 유타에서 카우보이용 부츠를 제작해온 노하우로 다양한 아웃도어 신발을 선보여왔는데, 이러한 기술력은 슬리퍼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하이드로 목은 탄성이 뛰어난 이브이에이 소재로 만들어져 장시간 착용해도 피로감이 적고, 방수 기능을 적용해 신발이 젖지 않는다. 밑창은 ‘논슬립 패턴’으로 제작해 접지력까지 챙겼다.

내구성이 뛰어난 건 수이코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출발한 수이코크는 주로 아웃도어 부츠에 사용되는 비브람 솔을 샌들에 적용하고 있다. ‘무좀 양말’을 연상케 하는 ‘닌-사보’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까 의문이긴 하지만, 현재 판매되는 수이코크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제품 중 하나다. 비브람 제품이 아닌 오리지널 솔을 적용한 ‘모토-캡’도 있다.

 고급 슬리퍼 끝판왕 ‘리조트 테디’

내구성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의 슬리퍼도 있다. 보테가 베네타가 국내 판매 중인 ‘리조트 테디’의 가격은 무려 248만원이다. 복슬복슬한 어퍼는 부드러운 촉감의 인타르시아 시어링 소재로 마감됐으며, 물결 모양의 삼각형 패턴은 수작업 스티칭으로 완성됐다. 신발에는 고무가 아닌 램스킨이 사용됐다. 웬만한 럭셔리 브랜드 미니백과 비슷한 수준의 가격이지만 현재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일부 사이즈가 이미 품절된 상태다. 보테가 베네타 특유의 가죽 직조 기법인 ‘인트레치아토’를 양각 패턴으로 새긴 ‘슬라이드’도 눈여겨볼 만하다. 참고로 ‘슬라이드’의 가격은 65만원으로, 이탈리아에서 제조된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19도 어느새 끝이 보이는 듯하다. 코로나19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바꿨다. 슬리퍼도 그중 하나다. ‘동네 마실용’, ‘욕실용’ 딱지를 뗀 슬리퍼들은 세상 밖으로 나와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내 마음속 최고의 슬리퍼는 대한민국 국방부가 보급한 초록색 슬리퍼이지만, 새로운 슬리퍼의 등장은 늘 반갑기만 하다. 빨래방에서 보테가 베네타 슬리퍼를 신은 사람이 들어온다면 그때는 꼭 “오 이건!” 하고 인사해봐야지.

주현욱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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