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야생화 여행의 성지..초록 융단길 걸음마다 꽃대궐

신용석 기자 2022. 6.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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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곰배령..봄~가을 화원, 겨울 설국
향기에 취해 걸으니 '원시림 터널'..느릿느릿 나와의 대화
곰배령 풍경. ‘작은 점봉산’ 밑에 펼쳐진 신들의 초원 © 뉴스1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우리나라 산의 1000m 이상 고지에서 가장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점봉산 곰배령’을 치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높은 산에도 야생화가 많지만, 호젓한 숲길을 편안하게 올라 온갖 종류의 야생화를 ‘한 곳에서,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곰배령 길은 야생화 여행의 성지다.

설악산국립공원의 일원인 점봉산(1424m)은 한계령을 경계로 설악산과 마주하고 있는, 남설악의 중심이다. 봉황이 점을 찍고 날라가서 점봉산(點鳳山)이라는 설도 있고, 둥그스럼해서 덤봉산으로 부르다 한자로 점봉산이라 표기했다는 설도 있다. 점봉산의 북쪽 오색지구는 설악산처럼 뾰족뾰족한 돌산이지만, 남쪽은 부드러운 흙산으로 한반도 식물의 20%에 해당하는 854종이 자생할 정도로 생물다양성이 높다.

곰배령(1164m)은 점봉산이 남쪽으로 흘러내린 작은점봉산(1295m) 밑에 들어선 평편하고 드넓은 초원이다. 그 모습이 하늘을 보고 누운 ‘곰의 배’, 또는 고무래(밭의 흙을 고르게 펴는 농기구)의 강원도 사투리인 ‘곰배’와 닮아 곰배령이다. 그만큼 산세가 순하다. 곰배령에 야생화가 많은 이유는 첫째, 편마암이 부서진 오래된 흙에 양분이 많고, 둘째, 강수량이 풍부하고 안개도 많아 수분이 충분하고, 셋째, 이 일대의 숲이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없었던 극상림(성숙한 원시림)이기 때문이다.

곰배령은 아무 때나,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곰배령 일대는 국립공원과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생태계 보호를 위해 예약제를 하고 있다. 진동리 강선마을에서 가려면 산림청의 ‘숲나들e’ 예약시스템에서(왕복 10.5km), 귀둔리에서 곰배골로 오르려면 국립공원공단의 예약시스템에서(왕복 7.4㎞) 예약해야 한다. 1일 최대 입장객 수는 강선마을 900명(예약객 450명/숙박시설이용객 450명), 곰배골 350명이다. 두 시스템 공히 매주 월, 화요일과 봄, 가을의 산불조심기간은 운영을 중지하므로 해당 홈페이지에서 상세한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산림생태관리센터-강선계곡-곰배령 5.1㎞ “스르르 걸어가는 소풍길 끝에 평화롭고 펑퍼짐한 초원”

곰배령 가는 길. 왼쪽 물소리가 시원한 강선계곡, 오른쪽 울창한 숲속 탐방로 © 뉴스1

곰배령 입구의 여러 마을은 예전에 설피밭으로 불렸다. 다래넝쿨을 얽어서 만든 넓적한 설피(雪皮)를 덧신으로 신고 다녔을 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 폭설이 내리면 길도 끊겨 겨울내내 고립되던 오지는 이제 펜션과 맛집이 즐비한 관광지로 변신했다.

주차장에 내린 사람들은 서둘러 산림생태관리센터에서 입산허가증을 받는다. 입산은 11시에 마감된다. 길을 들어서자마자 컴컴하고 서늘한 흙길이다.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나란히 가는 강선(降仙)계곡 물소리도 청량하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계곡이다.

30분쯤 걸어 강선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이라기보단 집 몇 채 있는 산골 구석이다. 길 양쪽의 두 주막에서 파는 초록 산나물전과 노란 옥수수막걸리를 지나치지 못한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다. 기름냄새가 진동하는 참새방앗간이다. 입에 침이 고여 자꾸 그쪽을 쳐다보게 된다.

마을 끝에서 다리를 건너, 초소에서 입산허가증을 검사받고, 좁아진 오솔길을 스르르 올라간다. 갈수록 산은 깊어져 서어나무, 들메나무, 전나무, 신갈나무 등의 고지대 나무들이 많아지고, 숲 바닥은 어느새 관중과 고사리류 식물들이 지배하고 있다. 숲 바닥은 초록융단을 깐 것처럼, 숲 허공은 나뭇잎들이 떠 있는 것처럼 온통 녹색이다. 식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아, 원시림이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걷기를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벌써 지나갔고, 야생화 관찰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한참 뒤떨어졌다.

곰배령 원시림 오솔길. 깊은 숲 그늘에 사는 양치식물인 관중(貫衆) 옆으로 슬슬 올라가는 사람들 © 뉴스1
물참대 꽃과 모시나비. 모시나비의 날개가 꼭 모시 옷감처럼 생겼다 © 뉴스1

곰배령을 1.3㎞ 앞둔 계곡상류의 쉼터에서 물 한모금 먹는데, 옆에 앉은 어르신이 “당이 떨어지면 안된다!”고 초콜릿 한 조각을 건넨다. 여기서 나무다리를 건너니, 평편하던 길이 서서히 가팔라지고, 하늘과 햇볕이 점점 열리면서 야생화 종류도 많아진다. 앙증맞은 물참대 꽃송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데, 마침 모시나비가 살며시 앉아 포즈를 잡아준다.

드디어 곰배령에 올라섰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갑자기! 밝은 세상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 밑에 펼쳐진 녹색 바다! 거기에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멀리 북쪽 능선 너머로 중청봉과 대청봉의 오목한 스카이라인이 반갑다. 고개를 남쪽으로 돌려 가칠봉 방향으로 봉긋한 호랑이코빼기(1219m)와도 재회한다.

곰배령 정상 풍경. 정상석 앞에 긴 줄이 섰다. 오른쪽 먼 산은 설악산 대청봉 © 뉴스1

어떻게 이 고지대에 학교운동장 10배가 넘는 평편한 초지가 펼쳐져 있을까? 신들이 내려와 축구시합을 했을까? 골프를 했을까? 나무가 자라지 못할 만큼 바람이 센 혹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이런 가녀린 풀들이 자라 꽃을 피우는 것일까,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이 정말 맞는 말이구나! 드넓은 초원에는 요기만 밟고 다니라는 데크가 설치되어 바깥의 풀밭을 보호하고 있다. 데크가 없었을 때에는 발 들이기가 미안했던 꽃밭이었다.

미나리아재비. ‘미나리아저씨’라는 뜻이지만, 미나리와는 다른 식물이다. 꽃잎에서 발산하는 노란 빛이 강렬하다 © 뉴스1

◇ 곰배령-능선길-산림생태관리센터 5.4㎞ “울창한 숲길에서 산과, 자신과 대화”

봄부터 가을까지 수백 종의 야생화가 피고 지는 곰배령이 항상 ‘꽃대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풀마다 나무마다 꽃 피는 시기가 달라 방문시기에 따라 꽃이 가득할 수도, 드문드문할 수도 있다. 6월초 오늘은, 봄꽃 무리들이 거의 사라지고, 이제 여름꽃들을 기다리는 ‘시골 정류장’ 같은 분위기다.

전체적인 풍경은 녹색 풀밭이지만, 그 안에서 노란색 미나리아재비, 보랏빛 쥐오줌풀, 하얀색 전호가 바람에 쏠리며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다. 초원의 테두리 그늘에서는 풀솜대의 연둣빛 꽃이 단아하고, 눈개승마의 흰꽃송이들이 너울너울하며, 붉은병꽃나무의 선홍색 꽃송이가 주렁주렁하다. 그 앞에서 야생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기를 만난 엄마처럼 반가운 표정이다.

전호(前胡). 중국식 이름이라 한글 이름을 지었으면 한다. 다섯 장의 꽃잎 크기가 서로 다르다 © 뉴스1
눈개승마(升麻). 초봄에 ‘눈을 뚫고 나오는 식물’이란 이름뜻이다 © 뉴스1
붉은병꽃나무에 주렁주렁한 ‘붉은 병’ 꽃송이들 © 뉴스1

곰배령처럼 생긴 작은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마친 사람들은 곧 반대쪽 언덕에 설치된 데크 전망대로 올라간다. 여기서 곰배령과 작은점봉산, 그리고 멀리 설악산의 대청봉 능선을 조망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즐기는 도시락 장소이기도 하다. 하산은, 왔던 계곡길 5.1㎞를 되돌아 가려면 2시 이전에, 작은 봉우리 3개를 넘어가는 능선길 5.4㎞로 내려가려면 1시30분 이전에 출발해야 한다. 때가 되면 근무자들이 ‘쫓아낸다.’ 이 시간이 넘으면 곰배령에 곰이 찾아오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산길은 능선길을 택했다. 곰배령 전망대에서 500m를 올라선 첫 번째 봉우리에 점봉산과 설악산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온다. 가까운 점봉산은 부드럽고 멀리 설악산 능선도 나른하게 보인다. 이 하나의 장면에서 많은 기억들이 돌아온다. 비바람이 몰아쳐 거목들이 아우성을 치던 점봉산, 눈보라가 맹렬해 전진할 수 없었던 설악산, 오늘 여기서는 아무 일도 없었을 것 같은 고요한 원경(遠景)이다.

앞산 점봉산과 뒷산 설악산. 다가서면 험준한 곳이지만, 멀리서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 뉴스1

이어서 약간의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면서 중간에 ‘오래된 주목숲’과 ‘젊은 철쭉숲’을 통과한다. 바람에 눌려 가지가 옆으로 아래로 휘어져 뒤엉킨 나무들이 많다. 주름살이 깊은 노목들도 가지 끝에 어린아이 손바닥 같은 잎을 틔웠다. 최선을 다해 꽃을 크고 화려하게 피워냈지만, 잎은 벌레들에게 먹혀 시들한 나무도 있다. 예쁜 꽃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벌레들이 동분서주하며 들락날락하는 생존의 현장이다. 꽃만큼은 사람보다 곤충들이 더 아름답게 볼 것이다. 이런 생태여행과 더불어, 이 길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가면서 자신과 대화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울창한 숲에 비해 사람이 적어 적막하고 고요하다. ‘빨리빨리!’ 가는 사람들에겐 그냥 심심하게 지나가는 곳이다.

능선길의 마지막 1.5㎞ 내리막에 급경사 계단이 많아서, 소풍차림으로 온 사람들이 낑낑 끙끙댄다. 계곡을 만난 후 평탄한 길도 돌뿌리가 많아 조심해야 한다. 신발은 꼭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곰배령 왕복 3시간, 머물기 30분, 중간휴식 10분의 꽃산행을 끝내고 입산허가증을 반납했다. 산림생태관리센터 곁에는 곰배령의 나무와 풀을 공부할 수 있는 자연관찰시설이 있다.

곰배령 산행에서 옥의 티는 ‘행정’이다. 곰배령에서 국립공원공단, 산림청 두 기관이 별도의 예약시스템을 운영하고, 예약한 지점으로 반드시 원점회귀해야 하는 이유는 이 지역에 국립공원인 곳과 아닌 곳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 입장에서나 생물들 입장에서나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개 기관이 관리하는 것처럼 협력하기 바란다.

점봉산 주목. 연중 비바람이 몰아치는 혹독한 환경에서 천 년을 견디는 시련이 온 몸에 나타나 있다 © 뉴스1

요즘은 꽃산행과 힐링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곰배령이지만, 예전에는 삶의 애환과 고단함이 깊게 서렸을 길이다. 여름에는 땀 범벅이 되어,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눈더미를 가르며 오르내렸을 등짐장수들의 길, 화전민들의 길이었을 것이다. 가수 임영웅이 부른 ‘곰배령’의 가사를 적어본다. “구불구불 산을 넘으면/ 하루가 다 간다, 점봉산 마루/ 나그네도 길을 멈추면 곰배령의 구름이 되네/ 사랑 두고 님을 두고 그 누가 넘어가나/ 하늘고개 곰배령아”

꽃산행과 더불어, 이런 스토리가 넘치는 인문여행지로도 각광받는 곰배령이기를 바란다. 설피밭이라 불릴 만큼 폭설이 내리고 눈꽃과 상고대가 아름다운 설국이니 겨울여행의 명소로도 사랑받기 바란다. 예전에 살았을 반달가슴곰이 다시 찾아와 진짜 곰배령이 되는 생태천국이 되기를 바란다.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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