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동 골목길-평화가 없던 시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골목 내시경]

2022. 6. 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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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오장동엔 함흥냉면집이 있다. 예전엔 3곳이 있었으나 이제는 2곳만이 남아 있다. 아직도 그 명성은 대단해 오장동을 검색하면 온통 함흥냉면집 이야기뿐이다. 오장동 일대에는 또 국내에서 가장 큰 건어물 시장인 중부시장이 있다. 이 또한 함흥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중부시장 일대에 자리 잡으면서 함흥냉면집도 따라왔다. 흥남은 조선시대부터 명태 등 건어물의 주산지였으니 그 특기에 맞춰 중부시장이 국내 최대 건어물 시장이 되는데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이남으로 온 평안도 출신들이 남대문시장 일대를 터전으로 삼았다면 함경도 피란민들은 중부시장에 터를 잡았다. 피란은 개인과 가족의 개인사를 넘어 한 지역의 문화가 고스란히 이식되는 경로가 되기도 한다.

함흥냉면은 오장동의 상징이 됐다.


일제강점기 오장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오장동과 맞닿은 묵정동엔 일본인 유곽이 있었다. 그런저런 영향으로 오장동 골목길엔 일본인들이 지은 목조 이층집이 많이 남아 있다. 상당 부분은 헐려 상업용 건물 등으로 다시 지었지만, 사이사이 적산가옥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주말엔 인적 뜸해져

대부분의 다른 도심과 마찬가지로 오장동 집들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다. 시내 한복판이라는 지리상의 이점에 맞춰 상업지역이거나 공장이 됐다. 충무로 인쇄골목이 팽창하면서 대부분의 집에 인쇄공장이 들어섰다. 간간이 지업사가 보이고 인쇄물과 종이 등을 운반하는 삼륜 오토바이며 지게차도 보인다. 충무로와 인현동, 필동과 오장동 일대가 거대한 인쇄단지를 만들었다. 업종과 업종이 맞물려 한단계 작업이 끝나면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편리함이 있다. 인쇄소 골목의 활기찬 소음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대부분 사라진다. 주말이면 인기척을 찾기 어려워진다. 거주민이 없고 아이들의 활기찬 뜀박질을 볼 수 없는 곳이라면 아무리 발전이 된다 한들 골목길은 공허한 그늘로 남는다. 역삼동으로 이사를 간 충현교회가 있던 자리는 대형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그뿐 아니라 중부시장 쪽 골목길 안에도 오피스텔이 들어섰고, 또 들어설 예정이다. 나름 서울지하철 3개 노선(2·3·5호선)이 지나는 역세권이라 개발업자들이 매력을 느끼는가 보다.

오장동 뒤편인 퇴계로 5가는 오토바이 거리라 골목길 안에도 관련 업체들이 들어서 있다. 부품가게엔 주문받은 부속을 배달하느라 하루종일 오토바이 출입이 분주하다. 부품가게 한곳에서 일대의 수요를 모두 처리해야 하니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배달업종의 수요가 높아진 것은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배달대행업체의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작 오토바이가게들은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충무로 경력 40년 차인 가게 주인은 “배달에 쓰는 오토바이들은 아주 실용적이고 기본적인 기종이다. 취미로 바이크를 타는 이들이 씀씀이가 큰데 알다시피 코로나19 사태로 모두 지갑을 닫았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토바이를 정비하고 있던 배달기사에게 경기를 묻자 “이것도 열심히 하면 돈이 되긴 한데 오래 하기엔 위험도 따르고 이런저런 장애가 있다”라고 말을 아꼈다. 남의 떡이 커 보여도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은 없는 법이다.

오래된 목재상과 목공소도 오장동 골목의 주인이다.


오장동 골목길은 다양한 모습을 지녔다. 중부시장을 한바퀴 돌아 인쇄공장, 목재소, 목공소, 가구점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내 한복판에 남아 있는 다채로운 모습이다. 을지로 일대엔 건축자재 업소가 많아 이와 관련된 목재소와 목공소가 오랜 세월 문을 열고 있다. 목공소들은 예전엔 목재용 선반기계를 갖추고 요구에 맞춰 뚝딱뚝딱 가공을 해줬지만 그런 공장은 대부분 사라졌다. 인테리어 관련 일을 주종목으로 삼거나 학생 작품을 맡아 해주는 업소가 늘었다. 목재상은 건축용 합판부터 방부목이며 원목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업종상 단점도 되지만 접근과 운송이 빠르다는 장점도 있다. 오장동 목재상과 목공소가 아직도 살아남은 이유다. 을지로 4가와 5가 사이 가구점 거리 뒤편 골목은 온통 가구 관련 창고가 있거나 작은 가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원목 상판으로 주문형 테이블을 짜주는 업체도 있고, 일반적인 가구상점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상품도 눈에 띈다. 이곳의 가구는 업소용 제품들이 주를 이룬다.

골목 곳곳에 일제강점기 적산주택의 흔적이 보인다.


밝고 깨끗한 중부시장

중부시장의 규모가 커 상인들이 이용하는 맛집 식당도 곳곳에 있다. 오장동 냉면집이야 말할 나위 없고, 냉면집만큼 역사가 긴 갈빗집도 2곳이나 된다. 시장 사람들 사이에서 왕갈비탕이 일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와인을 파는 시장 지하 국숫집도 있다. 국수보다 안주와 와인이 더 유명한 곳이다. 매일 반찬이 바뀌는 백반집도 평이 좋고 국밥집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부시장은 진작부터 현대화가 잘 이뤄졌다. 시장은 밝고 깨끗한 분위기다. 대부분의 상인은 도소매를 함께한다. 주 통로의 상점은 멸치 등 건어물과 김을 파는 가게가 주를 이룬다. 명성에 걸맞게 가게마다 수십 종류의 상품을 갖추고 있다. 김만 해도 요즘 인기라는 곱창 돌김부터 파래김과 재래김, 김밥용 김과 구운 김 등 품종과 용도별로 상품이 다양하다. 요즘엔 홈페이지를 통해 주문을 받아 미국까지 배송해주는 서비스도 한단다. 전통시장이 어디까지 진화할지 더 두고 볼 일이다.

중부시장은 국내 최대 건어물 시장이다.


시장을 찾는 손님도 차츰 늘고 있다고 한다. 멸치가게 주인은 “한때 집단감염으로 시장이 잠깐 폐쇄된 적도 있었다. 손님들이 확 줄었는데 요즈음 늘어나는 것이 실감이 된다. 시장에 활기가 있어야 세상이 편한 법이다”라고 말했다. 중부시장은 몇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창고를 가지고 수입을 하거나 대량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상가도 있고,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모여 있는 업종별 골목도 있다. 멸치가게가 모인 골목이 있고, 굴비골목이라 이름 붙은 굴비 전문 상점가도 있다. 굴비골목에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간을 해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게마다 대형 냉장고가 눈에 띈다.

건어물 시장이라 해서 바다에서 난 것들만 있지는 않았다. 고사리, 표고버섯 등 말린 나물과 견과류도 중부시장에서 취급하는 주 품목이다. 걷다 보면 시식용으로 내놓은 주전부리나 술안주용 마른 과일도 맛볼 수 있다. 일반업소나 술집용 안줏거리를 취급하는 골목도 있다. 업소에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면 바로 배달해 준다는데, 가게 밖에서 얼핏 살펴봐도 얼마나 많은 품목을 갖추고 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굴비골목, 오징어골목 등 건어물 이름이 붙은 골목이 있다.


주 통로의 노점 좌판은 주로 젓갈 등을 팔고 있다. 북태평양산 명란젓과 창난젓, 통 멸치젓과 새우젓까지 한눈에 봐도 입맛 도는 물건이 가득 쌓여 있다. 명란젓을 묻자 저염품과 일반품이 따로 있단다. 보통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젓갈 사이에서 한 가지 독특한 물건이 보인다. 가자미식해. 가자미를 삭힌 함경도산 젓갈이다. 이곳에 뿌리내린 흥남 사람들의 또 다른 자취다. 오장동에 가면 함흥냉면뿐 아니라 가자미식해도 한번 맛보면 좋겠다.

세상을 엮은 인연의 그물은 생각보다 촘촘해 시장 좌판에서도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명란젓 가격이 올랐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북한산 마른 표고가 자취를 감춘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해지자 들기름값이 치솟았다. 따져보지 않고는 인과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흔하게 널려 있다.

주변에 주거지역이 없어서인지 보통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상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채소가게 손님도 대부분 식당이나 업소라고 한다. 그래도 골목 하나는 정육점과 채소가게, 방앗간과 생선가게가 자리 잡고 있어 들른 김에 장을 보기에는 적당하다. 가격대도 마트보다 저렴해 보였고 물건도 신선하다. 시장을 한바퀴 돌아나오다 보면 군것질용 호떡집과 꽈배기가게와 마주친다. 뻥튀기만 쌓아 놓은 곳도 눈에 띈다.

충무로에서 넘어온 인쇄공장도 오장동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마른오징어가게에서 주인으로부터 오징어 잘 굽는 법을 전수받았다. 그는 “오징어는 불이 닿으면 바로 오그라든다. 물에 살짝 담그거나 분무기로 물을 뿌린 후 구우면 타지도 오그라들지도 않게 구을 수 있다”며 비법을 전했다. 가게마다 취급하는 상품마다 상식을 뛰어넘는 고수만의 비법이 있었다. 시장을 걸으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은 모르면 주저 말고 물어보자는 질문의 정신이었다. 대부분의 상인은 물으면 아는 만큼 답해주고, 자신도 모르겠으면 다른 이에게 물어 대답해주었다. 시장에서는 상품뿐 아니라 정보와 착한 마음도 함께 거래된다.

함흥냉면에는 본디 홍어회무침을 올려줬다는데, 사정이 달라져 명태살 무침으로 변했다. 함흥의 회국수는 본디 감자 전분으로 면을 뽑았다고 하나 이남에선 고구마 전분을 쓴단다. 막히면 돌아가고 없으면 다른 것을 찾는 일이 세상사니 홍어회를 고집하고 감자 전분을 쓰지 않는다고 함흥의 맛이 아니라며 마음 상할 필요까진 없다. 오장동의 함흥냉면집 간판을 보면서 세상일이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복잡한 사정 숨은 골목길

오장동 골목길엔 참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부터 한국전쟁의 피란사까지. 일부러 캐묻지 않으면 길 위의 사연은 대부분 잊고 지나치게 된다. 그중에선 잊어야 좋을 일도 있겠지만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할 일도 있다. 식민지 역사나 전쟁의 참화는 잊어선 안 될 일이다. 오장동에 들르면 함흥냉면 한그릇 들어보자. 골목길을 걸으며 남아 있는 적산가옥도 살필 수 있다. 중부시장에선 함경도 별미라는 가자미식해를 찾아 맛을 볼 수도 있겠다. 모르면 물어 가라고 건어물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게 있다면 상인에게 꼬치꼬치 캐물어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는다. 평화의 시기가 이어지고 있는 오늘, 오장동 골목에서 평화롭지 않았던 어제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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