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급제 동기들의 60주년 자축연.. 일러야 80세 '장수·명예'의 상징

기자 2022. 6. 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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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기유사마방회도’, 1669년, 비단에 채색, 세로 41.8㎝, 가로 59.2㎝, 1609년 기유증광시의 진사과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민구가 남긴 회방연도이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정선이 그린 ‘북원수회도’, 1716년, 비단에 담채, 세로 39.3㎝, 가로 54.4㎝, 숙종 대에 공조판서를 지낸 이광적이 대과 회방을 기념해 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손창근 컬렉션)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 (4) 회방연도

생원·진사시의 장원이 주도해 매년 방회 열어

현종 10년에 81세 이민구가 85세 홍헌·91세 윤정지와 ‘소과 회방연도’ 남겨

임종 1년전 ‘대과 회방’ 맞은 이광적, 동기들 모두 세상 떠나 동네 70세 이상 노인 초대해 자축

겸재 정선에게 ‘북원수회도’ 주문

현대인들이 여러 목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많은 친목 모임 중에 가장 친밀한 유대감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무래도 동기 모임이 아닐까 한다. 입학 동기, 입사 동기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입시학원 동기와 산후조리원 동기까지 형태도 다양하며 결속력도 더 강한 것 같다. 같은 목적을 향해 힘들게 걸어온 시간을 공유하며 앞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돼 줄 수 있다는 신뢰를 자연스럽게 쌓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선 시대에도 갖가지 친목 모임이 사대부 사회에 결성돼 있었는데, 그중에서 평생 끈끈하게 이어지는 동기 모임은 바로 과거 합격 동기생들의 방회(榜會)였다.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인 생원·진사시, 즉 사마시(司馬試)의 동기들은 합격한 그해부터 장원의 주도로 모이기 시작해 매년 돌아가면서 방회를 열었다. 지방관 부임으로 전국 각지로 흩어지더라도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근무지에서 방회를 열곤 했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지 만 60년이 되는 것을 회방(回榜)이라고 하는데, 평균적으로 20대에 사마시를 통과했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사마시 회방은 80세가 넘어야 가능했다. 그래서 회방을 맞았어도 동기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방회를 열거나 회방연을 치르기란 무척 드문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 귀한 회방연을 동기생들과 열게 돼 그 모습을 ‘만력기유사마방회도(萬曆己酉司馬榜會圖)’로 남긴 이가 1609년(광해군 1) 기유증광시의 진사과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이다. 사마시 합격 후 6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81세가 된 이민구, 91세의 윤정지(尹挺之, 1579~1670), 85세의 홍헌(洪憲, 1585~1672) 등 세 명이 이민구의 집에 모여 회방을 기념한 것이다. 이민구와 윤정지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한꺼번에 통과했는데, 이민구는 진사시뿐만 아니라 1612년 증광문과시에서도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들 셋은 이미 회방을 맞기 전에도 매달 돌아가며 방회를 열고 있었으니 노년에 지나가는 시간을 아껴 자주 만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만력기유사마방회도’의 배경은 이민구의 집이다. 집 마당에 설치한 차일 아래 병풍을 치고 양쪽에 커다란 화준(花樽)으로 행사 공간을 꾸몄다. 병풍을 등지고 회방인(回榜人) 세 명이 음식상을 앞에 놓고 앉았는데, 시험 성적에 따라 중앙의 이민구를 중심으로 그 왼쪽과 오른쪽에 홍헌과 윤정지가 각각 자리 잡았다. 동기생 사이에서는 장원을 특별히 우대하는 풍습이 있었고 합격 성적이 중요했으므로 방회에서도 나이나 품계와 상관없이 장원이 가장 상석에 앉았다. 회방인과 마주 보고 앉은 다섯 명은 이날 회방연에 초대된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예조판서 박장원(朴長遠, 1612~1671), 심유(沈攸, 1620~1688), 이정(李程, 1618~1671), 권해(權해, 1639~1704) 등이다.

기녀 5명과 남자 악사 4명이 음악을 연주하고 부용관을 쓴 두 명의 무동이 두 팔과 오른 무릎을 들어 올리는 춤사위에는 율동미가 충만하다. 행사장 한쪽에 설치된 막차(幕次) 안에는 음식과 술이 충분히 준비돼 있다. 대문 밖에 쉬고 있는 말은 색색의 안장과 다래를 갖추었고 종2품 이상만이 탈 수 있었던 초헌이 대기 중인 것을 보면 가선대부의 품계로 벼슬에서 물러난 회방인 세 명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만력기유사마방회도’는 과거 합격을 계기로 맺어진 동기생들의 인연이 평생에 걸쳐 이어져 갔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며 그만큼 조선 시대 사대부들에게 과거 합격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관문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사마시 회방보다 더 맞이하기 어려운 것이 대과 회방이다. 숙종 대에 공조판서를 지낸 이광적(李光迪, 1628~1717)은 대과 회방을 기념해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 화첩을 제작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정선은 산수화 외에도 고사인물화, 화훼화, 영모화 등 다양한 화목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기록화도 몇 점 남겼는데 이 그림이 그중 하나다. 90세의 수를 누리면서 세 명의 왕을 두루 섬긴 이광적은 1652년(효종 3) 증광시에서 생원·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했고 4년 뒤인 1656년에는 별시 병과에 급제했다. 이광적은 사마시 회방을 거쳐 1716년(숙종 42) 대과 회방인이 됐지만 다른 합격 동기생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은 이광적 자신뿐이었다.

홀로 남은 이광적은 같은 동네에 사는 70세 이상된 기로(耆老)들을 초대해 회방을 자축하고 그날의 모습을 정선에게 그림으로 주문했다. 모임의 장소는 인왕산 기슭의 장의동(莊義洞)에 있는 이광적의 집이었으며 기로들은 장의동에 살지 않으면 참석할 수 없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초대됐다.

사랑채가 있는 넓은 후원, 마구간, 샛담을 사이에 두고 연결된 안채 등 잘 가꾸어진 저택에서 영위하는 노년의 편하고 여유로운 삶이 느껴진다. 담장 밖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모임이 열리고 있는 사랑채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한 구성은 화원의 방식과는 다른, 사대부 집안 출신의 화가다운 면모다. 화면에서 차지하는 사랑채는 비교적 작은 비중으로 그려졌지만 섬세한 필치로 표현된 세부는 다른 어느 그림보다도 이야기가 풍부하다.

사랑채를 들여다보면, 대청과 온돌방 전체에 푸른색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지의(地衣)를 깔았고 온돌방에는 수묵산수화 병풍을 설치했다. 이날 참석한 기로는 이광적을 포함해 모두 11명으로 온돌방에서 마당을 바라보고 정면으로 앉은 이가 바로 주인공 이광적이다. 두툼한 방석 위에 자리한 이들은 기로들이며 나머지는 기로들을 모시고 따라온 자손이다. 분홍, 노랑, 파랑 등 색옷을 입고 배석한 어린아이들은 이광적과 이속(李涑, 1647~1720)의 손자들이다. 이속은 다름 아닌 정선과 친밀하게 교유한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부친이다.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인연도 초대받은 기로 중에 이병연의 부친이 있었고 또 자신의 외숙부 박현성(朴見聖, 1642~1728)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박현성은 병으로 행사 당일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기단 위에는 기로들이 몸을 의지하고 온 비둘기 장식이 달린 구장(鳩杖) 4개가 기대져 있고 벗어놓은 신발도 보인다. 흑칠 원반에 차려진 음식이 보자기로 덮여 있고 술병도 준비돼 있으며 시중을 들 여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로들의 환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채 문밖의 마구간에는 말과 하마석도 그려져 있다.

이광적의 대과 회방은 조정에서도 주목해 그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숙종은 비록 법전에 규정돼 있지는 않지만 송순(宋純, 1493~1582)의 고사를 계승해 꽃을 만들어 내리라고 내자시에 명했다. 이광적은 하사받은 꽃을 머리에 꽂고 전문(箋文)을 받들고 궁궐로 나아가 왕의 은덕에 감사함을 나타냈다. 이에 또 숙종은 술과 음식을 내려 노인을 우대하는 정성을 드러냈으며 90세가 된 이듬해에는 종1품 숭정대부로 품계를 바꾸어 주었다. 이광적에 대한 이러한 왕의 은전은 이후 조정에서 회방인에 대한 우대를 논할 때 늘 기준이 됐다.

정조 대에는 대과든 소과든 회방인에 대한 특전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았다. 치사를 청하지 않아도 궤장(궤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회방인을 궁궐로 불러 60년 전 방방일(放榜日)의 의례를 재현했다. 회방인은 자손들을 거느리고 입궐해 궁궐 뜰에서 방목에 따라 호명되면 합격증서인 회방백패 혹은 회방홍패와 어사화를 하사받았으며 자급을 올려받았다. 때로는 회방연에 필요한 물자와 음악을 보조하고 아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정조는 노쇠해 상경하지 못하는 지방의 회방인에게는 수령에게 대신 전달하게 하는 등 지방에 거주하는 회방인들이 누락되지 않게 많은 신경을 썼다.

회방인을 회방노인이라고도 불렀듯이 조선 시대에 회방은 노인을 우대하는 풍습과 중첩돼 시대가 흐를수록 인생행로의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회갑, 회혼, 그리고 회방은 장수의 염원과 함께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림으로도 남겨지게 됐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송순의 고사

송순은 한성판윤과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관직을 떠난 뒤에는 고향 담양에 면앙정(면仰亭)을 짓고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1579년 대과 회방을 맞은 송순을 위해 정철(鄭澈), 고경명(高敬命), 기대승(奇大升), 임제(林悌) 등 제자들과 가족은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계획했다. 마침 이 소식이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가 마치 과거에 처음 합격한 사람에게 내리듯 술과 함께 특별히 꽃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 후대에 하나의 고사로서 참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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