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집은 그리워도.."학교 가자" 응원에 막심 토마토는 오늘도 자란다

하어영 2022. 5. 2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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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난민][한겨레S] 커버스토리
우크라 전쟁난민 알비나와 막심의 하루
광주 고려인마을 24시간 동행 취재..포성의 기억 그대로지만
막심은 통역 없이 분투, 누나 알비나는 대안학교서 빠른 적응
"학교 가자, 막심!" 친구들 응원..교사도 번역 앱으로 진심 도와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앞에서 우크라이나 10대 전쟁난민 김알비나(14), 최마르크(13), 코가이 올레그(11·위쪽 가운데부터 시계방향)가 다른 고려인 친구들과 함께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광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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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남은 다른 가족들은, 친구들은 어찌됐을까….’

체리 가득한 고향집 앞마당이 여전히 그립다. 고향에 남은 친구를 하나라도 더 만날까 휴대전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떠나지 못한다.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상흔은 대한민국에서 7500㎞ 떨어진 우크라이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시차 때문만일까.

우크라이나 국적 고려인(옛 소련 지역 거주 한민족) 알비나(14)와 동생 막심(10)은 엄마 김나탈리야(39)와 함께 지난달 15일 입국했다. 2월24일 러시아 침공이 시작된 뒤로 고향인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미콜라이우에 러시아군의 폭격이 계속되면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이들은 국경을 넘어 몰도바로 탈출했다. 아빠 김빅토르(42)는 코로나19 한해 전 한국으로 건너와 광주 평동공단에서 일하고 있었다. 빅토르는 몰도바에 있는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와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때 이 사연을 알게 된 광주고려인마을이 이들에게 항공권과 입국에 필요한 지원에 나섰다.

전쟁이 일어난 뒤 국내에 들어온 우크라이나 난민은 대부분 이런 경로를 거친다. 하지만 이들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공식 통계조차 없다. “현재 입국 대기하는 이들까지 더하면 1000명은 넘을 것”이라는 민간단체 어림셈이 전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먼저 보호받아야 할 알비나와 막심 같은 아동·청소년 난민의 삶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9~10일 이틀 동안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터를 잡은 이들의 집에 머물며 알비나와 막심의 하루를 따라가봤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온 김알비나·막심 남매가 엄마 김나탈리야, 아빠 김빅토르와 함께 지난 10일 광주 광산구 대산동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전쟁 전 일자리를 찾아 먼저 한국에 온 아빠가 살뜰하게 반찬을 챙겨 주고 있다. 광주/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9일 20:00, 당근 김치와 보르시 수프

“비행기 값이 또 올랐네.”

9일 저녁 8시. 알비나가 사는 곳을 향해 운전하던 이천영 광주고려인마을(고려인마을) 공동대표의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렸다. 항공권 값을 알려주는 문자메시지는 폴란드·몰도바·루마니아·독일 등에서 우크라이나 고려인 난민을 데려오기 위한 비행기표 값이 또 올랐다고 알려준다. 여기에 난민이 된 가족·친지들의 한국행을 도와달라는 국내 고려인들 전화가 뒤섞인다. 고려인마을 주민들이 낸 성금으로 구입한 항공권은 난민들에게 무료로 전달된다. 이 대표는 “요즘 들어 아침저녁으로 비행기 값이 오르는데 한국에 오려는 사람은 늘어만 간다”고 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성금이) 바닥날 때까지 하겠다”고 했다.

차로 20분 남짓 달리자 한적한 농촌 마을이 나타났다. 알비나 가족으로선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고 아빠 일터인 하남공단도 근처라 거주 환경이 나쁘지 않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ㄷ자로 배치된 집 세 채가 한눈에 보였다. 이 대표가 10여년 전 산 집인데 최근 우크라이나 고려인 난민을 위한 숙소로 내놨다. 알비나 가족이 1호 입주자인 셈이다. 나머지 건물에도 비슷한 처지의 고려인들을 받을 예정이다. 거실로 들어서니 이미 가족들이 양반다리를 한 채 밥상에 둘러앉아 있다. 식탁에는 쌀밥과 김치 두 가지, 햄, 빵, 닭고기볶음 등이 놓였다. 토마토, 비트, 감자, 닭고기 등을 넣어 끓인 우크라이나 전통음식인 보르시 수프와 고려인 식단이 어우러진 밥상이다.

엄마 나탈리야가 부엌으로 향했다. 1구짜리 전기화로 위에서 닭고기볶음이 끓고 있다. 부엌 옆 화장실은 대개의 가정이 그렇듯 샤워시설을 겸한다. 방이 셋 있으니 네 식구가 임시로 거주할 시설로는 나쁘지 않다. 고려인마을에선 이곳을 ‘기숙사’ 또는 ‘숙소’라고 한다. 한국에 온 우크라이나 전쟁난민이 모두 알비나 가족 같은 환경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고려인마을 공동체가 있는 광산구 월곡동에 짐을 풀었다. 원룸 한칸에 가족 서너명이 사는 게 흔하다. 알비나 가족은 도심 대신 농촌 거주를 택해 공간이 넓어졌다.

국제이주기구 및 유엔난민기구 협력하에 만들어진 ‘이재민 임시수용시설 안내서’를 보면, 이재민 1인당 필요한 최소 공간은 3.5㎡(약 1평)에서 10㎡(3평)까지다. 해당 지역과 그 지역의 문화·종교 등에 따라, 난민을 책임지는 주체가 정부·국제기구·민간단체인지 등에 따라 공간 편차가 크다.

주방, 화장실 등을 둘러본 뒤 앉은 식사 자리에 막내 막심이 보이지 않는다. “막심은 입이 짧고, 낯을 가린”(나탈리야)다. 막심의 방문을 슬며시 여니 눈길도 주지 않고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있다. 취재차 찾아온 낯선 이가 식사 뒤 옆집으로 건너가자, 막심이 뛰놀며 지르는 소리가 엄마, 아빠의 웃음소리와 섞여 마당에 가득하다.

10일 07:00, 그래도 집이 그리워

다음날 오전 7시. 알람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아이들 방에 불이 켜진다. 거실에 들어가 앉았다. 빗질 소리가 들린다. 방음이 아쉽다. 알비나가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나선다. 막심은 빼꼼 얼굴을 내밀더니 다시 방으로 기어가듯 들어간다. 여전히 손에 들린 휴대전화에는 우크라이나 드라마가 소리를 잃은 채 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 배우들 표정에 따라 막심 얼굴이 싱글거렸다. 결국 엄마가 막심을 밥상 앞에 앉혔다. 막심은 음식을 쓱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통역이 따라붙기 어려운 시간대여서 번역 앱을 통해 ‘평소에도 잘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주 드물게 먹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탈리야는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번역 앱은 “직업별 과자 장수”라고 답했다. 그게 뭘까. 번역기는 오리무중이었다. 내친김에 몇마디 더 요청했다.

―가장 힘든 건 무엇인가요?

나탈리야 : “모두 집이 그리워.”

―막심은 원래도 조용한가요?

나탈리야 : “수줍음이 많고 말이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혹시 한국에 와서 불안해하거나 그러지는 않나요? 알비나는 활발해 보여서 괜찮아 보입니다만, 막심은 걱정이 될 듯합니다.

나탈리야 : “그들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 침착하다.”

―막심은 원래 유튜브를 자주 봤나요?

나탈리야 : “원래는 아니었다.”

나탈리야가 휴대전화 번역 앱으로 막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광주/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알비나는 3월의 어느 새벽, 천둥인 줄 알았던 포탄 소리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원래 조용하던 막심은 말수가 더 줄었다. 학교에 가면 하루 종일 연필을 깎고 또 깎아가며 고향 그림을 그린다.

오전 8시10분이 되자, 칭얼대던 막심이 시계를 보더니 엄마보다 먼저 벌떡 일어선다. 한국에 와서 세번째 등굣길이다. 알비나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 책가방을 챙기고, 막심은 엄마보다 먼저 등굣길에 나선다. “한국에서 둘은 다른 모습으로 적응해가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모두 침착하다”(나탈리야)는 것.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은 이들 모두 살던 곳을 떠나 먼 나라로 피난 온 전쟁난민이라는 것이다. 막심이 다니는 삼도초등학교까지는 7.1㎞로, 통학버스를 타야 한다. 집 밖으로 나와서도 막심은 엄마 손을 놓고 몇 걸음 앞선다. 길가에 노랗게 핀 들꽃을 만지고 살핀다. 엄마가 다가가 막심 손을 잡아끈다.

8시14분, 통학용 24인승 미니버스가 도착했다. “막심, 여기 앉아.” 막심이 차에 오르자 같은 반 지율이가 손을 흔들며 옆자리를 토닥거린다. 버스는 마을 곳곳을 들르며 빈자리를 거의 채워 20여분 만에 학교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들이 달린다. “막심, 가자!” 지율이가 외치며 앞장선다. 막심이 따라 뛴다.

오전 8시15분. 통학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나서는 나탈리야와 막심. 나탈리야는 아들이 차에 오를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광주/하어영 기자

10일 09:00, 학교도 막심도 ‘긴장’

“학교도 초긴장 상태입니다.”(김숙자 교장)

앞서 막심이 첫 등교를 한 지난 4일 김 교장은 3학년 전체 학생 11명을 모아놓고 “‘우리도 (과거에) 전쟁을 겪었다. 우리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뒤이어 막심에게는 “무엇이든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1교시 사회 수업. 한 장짜리 마을 소개 책자를 만든다. 김홍준 담임교사는 “모둠(대개 4명 한 조)끼리 책상 붙이세요”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마을 소개 문구와 사진을 미리 챙겨 왔다. 막심은 한 박자 늦었다. 그때 김 교사가 막심에게 도화지를 따로 건넨다. 그리고 통역 앱을 통해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봐”라고 말했다. 막심이 고개를 끄덕인다.

김 교사는 한 시간 내내 기존 학생 11명과 막심이 서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며 수업했다. 11명에게 한마디, 막심에게 (번역기로) 한마디, 이런 식이다. 얼핏 버거워 보였지만, 김 교사는 원래 그랬다는 듯 빈틈없이 수업을 이끌었다. 김 교사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지원을 알아보고 있다”면서도 “교육청에 알아보니 예산도 예산이지만, 당장 우크라이나어를 통역할 강사도 없다. 외국 전쟁난민이 배정된 건 처음이라 시간은 좀 걸릴 듯하다”고 했다.

오전 11시, 3교시 체험활동 시간이 시작됐다. “막심이랑 처음 대화했어요.” 김홍준 교사가 들떠 있다. “‘원예 체험활동을 간다. 연필, 종이를 가져가야 한다’고 (번역 프로그램으로) 말했더니 ‘가져가겠다’고 답하더라고요. (막심이) 문장으로 말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김 교사는 막심을 위해 한국어와 우크라이나어로 구성된 관찰일지를 준비했다. 방울토마토 잎을 그려넣느라 골몰하는 막심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날 방울토마토 한 그루에 막심 이름이 달렸다.

1교시 뒤 교실 뒷면 게시판에 그림 한 점이 더 걸렸다. 안내책자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막심도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들여다보는 기자를 보고 막심은 교사가 내민 휴대전화에 한마디 했다. 번역 프로그램을 통해 “처치”(church·교회)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와! 막심 잘했어.” 교사의 한마디에 막심이 조금 으쓱한다.

광주지역 초·중·고 312개교에 다문화 학생이 3500여명에 이른다.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은 300여명으로 이들은 월곡동 인근 학교를 다니면서 일괄적으로 통역 등 예산지원을 받는다. 이 가운데 50여명이 대안교육 위탁기관인 새날학교에 모인다. 막심처럼 홀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사례는 예외적이다. 삼도초에서도 처음이다.

막심이 1교시 사회 수업 시간에 그린 그림. ‘무엇을 그린 것이냐’는 질문에 “교회”라고 답했다. 김홍준 교사는 “아마 고향 교회 그림을 그린 듯하다”고 했다. 광주/하어영 기자

10일 12:00, 알비나는 ‘적응 완료’

낮 12시께. 막심의 오전 수업이 끝날 즈음 알비나를 만나러 이동했다. 알비나는 초등학교에서 약 8㎞ 떨어진 새날학교에 다닌다. 학생 정원 75명, 8할이 고려인이다. 이번에 입국한 우크라이나 난민 중 새날학교로 배정받은 건 3명, 알비나도 그중 하나다. 점심시간, 벤치에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어가 들린다. 식판엔 북어계란감자국, 생선튀김, 오이무침, 김치, 다진 돼지고기, 두부조림 등이 가득하다. 알비나보다 한달여 앞서 한국에 온 마르크가 눈인사를 한다. 알비나도 틈에 끼어 있다. 마르크보다 한 살 많지만 한국어 수준을 고려해 같은 학년이 됐다.

알비나는 한국어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가족들에게 “통역사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다. 우크라이나에서 알비나의 장래 희망은 경찰이었다. 알비나는 수업도 열심이다. “지난 수업 시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를 두 쪽 정도 주고 열 문장으로 요약하라고 했어요. 반 아이들이 별 관심 없어 하는 사이, 알비나는 그걸 뚝딱 만들어내더라고요.” 임아무개 교사의 말이다. 임 교사는 “아직 개별 면담도 못했다”며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알비나는 걱정할 게 별로 없어 보인다”고 했다.

“알비나, 가자.” 5교시가 끝나고 이천영 교장이 알비나를 찾았다. 이날은 알비나가 정식으로 새날학교 (위탁교육) 배정 절차를 밟기 위해 원적 학교인 송정중학교에 가는 날이다. 이 교장은 알비나가 입국했을 때, 서류를 갖추기 전이었는데도 우선 등교부터 시켰다.

“전쟁통에 건강하게 피난 온 것도 대견한데, 학교 가고 싶다는 아이를 집에서 놀게 할 수 있나요. 어차피 신원은 보장돼 있는 것이니 우선 학교에서 일단 가르쳤어요.” 제출 서류에 알비나의 이름 옆으로 ‘전쟁난민’이라고 쓰여 있다.

원적 학교까지는 차로 다시 20여분, 송정중학교 교장, 교감, 담임 등이 모였다. “(알비나가) 여권은 없는 건가요?” 서류를 심사하던 송정중 쪽에서 묻는다. 알비나만 아니라 동행한 엄마 나탈리야도 잠시 잊었던 고향의 ‘전쟁’을 다시 상기하는 순간이었다. 엄마가 주섬주섬 꺼낸 여권에 알비나 사진이 붙어 있다. 사진 위로 한국대사관에서 찍은 신원 확인 날인이 선명하다.

오후 4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비나는 ‘공식적으로’ 새날학교 학생이 돼 있었다. “축하해요.” 기자가 필담으로 축하를 건넸다. 모녀가 박수를 치듯 두 손을 모으고 웃는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또 만납시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환하게 웃던 엄마는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본다.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었다면 그는 ‘직업별 과자 장수’를 계속하고 있었을까. 막심은 아침밥을 거르지 않고 씩씩하게 혼자 학교에 갈 수 있었을까. 알비나는 경찰이 될 수 있었을까.

막심은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오후 4시15분 하교 버스를 탔다. 이날 담임교사는 막심에 대해 “사회 수업 때만 아니라 방과후 시간에도 솜씨 좋게 그림을 그리면서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고 설명했다.

막심의 바람을 방울토마토가 알아준 것일까. 막심이 키우는 방울토마토 줄기가 옆 친구의 것보다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더 솟아 있다. 김홍준 교사 제공

24일 16:00, 막심과 토마토는 자란다

알비나 가족의 한국 생활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뒤, 국내 연고가 확인된 고려인 전쟁난민들에 한해 3개월짜리 인도적 특별체류 비자로 입국을 허락했다. 이들은 동반 가족 자격(F1비자)으로 머문다. 문제는 건강보험이다. 열아홉살 박스베틀라나는 탈출하면서 미사일 폭격 현장에 있다가 청력을 상실했다. 이천영 대표는 “스베틀라나 말고도, 안에브라시아(63)처럼 허리를 다친 경우도 있다. 입국한 고려인 대부분 전쟁 상황에서 탈출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건강보험의) 예외적 적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알비나도 아팠다. 인터뷰 이튿날인 5월11일 첫 결석을 할 정도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병원을 갈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막심은 이제 제법 의젓합니다.”

첫 취재 뒤 2주 만에 막심은 껑충 자라난 모양이다. 담임 김 교사는 <한겨레>에 “얼마 전까지 남기던 급식도 이젠 싹싹 비운다”며 “막심이 친구들과 함께 자기 토마토에 물을 주러 가곤 한다. 가장 늦게 주인을 찾은 토마토인데 신기하게 가장 많이 자랐다”고 했다. 김 교사는 직접 막심 알림장을 만들어 보낸다. “지금처럼 차분하게 해준다면 막심이 한국어를 익혀 스스로 알림장에 또박또박 그날 할 일과 전달 사항을 적을 날도 올 것”(김 교사)이다.

김 교사는 막심의 가장 큰 변화는 “급식을 이제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알림장이다. 김 교사가 직접 한글→영어→우크라이나어 2단계로 번역해 노트에 붙여 준다. 번거롭겠다는 말에 “막심이 다음 날 수업을 미리 준비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교사로서는) 당연히 할 일”이라고 했다. 김홍준 교사 제공
광주고려인마을은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한국으로 오길 원하는 고려인에게 항공권을 무상으로 보내기 위한 성금을 모금 중이다. (농협 351-0706-6907-63 예금주:사)고려인마을) 관련한 문의는 고려인마을(062-961-1925).

광주/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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