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보증 가입하면 돼" 믿었는데..'나쁜 집주인' 거를 방법 없다
[편집자주] 최근 잇따라 '전세가=매매가' 무갭투자로 청년과 신혼부부 전세금을 떼 먹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나쁜집주인 공개법이 발의됐지만 개인정보 보호에 막혀 서민들은 '깜깜이' 전세계약을 해야한다. 되풀이 되는 전세사기, 막을 방법이 없는지 짚어봤다
#. 강서구 화곡동 역세권 빌라에 전세로 사는 30대 세입자 A씨는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전세보증금 2억원을 몽땅 날릴 위기에 처했다. 계약 당시 전세금이 2억원인데 집값이 2억1000만원이라 망설였지만 "전세금반환보증에 가입하면 된다"는 공인중개사 말을 믿었다. 바로 옆집도 전세보증에 가입했단 사실도 확인했다. 입주 후 곧바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전세보증을 신청했으나 "집주인이 보증금지 대상이라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청천벽력같은 통지를 받았다. 이후 집주인과 연락이 두절됐고, 얼마 뒤 건물이 압류됐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는 확실한 방법은 '전세보증'에 가입하는 것이지만 A씨처럼 가입이 거절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유로 '악성 임대인'인지 여부를 세입자가 계약전에는 알수 없어서다.
■신혼부부·청년 울리는 전세금 미반환사고, 5년간 80배 급증, 6199억원 떼였다
25일 국회와 HUG 등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HUG의 전세보증금 사고 발생건수는 3323건, 6199억원이었다. 전세보증은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 주지 않아도 보증회사가 대신 갚아주는 상품이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HUG가 대신 갚아준 금액(사고금액)은 지난 2017년 74억원에서 2019년 3442억원, 2020년 4682억원, 지난해 6000억원을 넘었다. 사고금액의 62.2%는 2030세대에서 발생했다. 30대 비중이 48.2%로 거의 절반에 가깝다. 20대도 14.0%에 달했다.
이들은 그나마 집주인 대신 HUG로부터 전세금을 돌려 받아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으려고 전세보증에 가입하려 해도 막상 가입 자격이 안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집주인이 상습적으로 전세금을 떼 먹은 '악성 임대인'이라면 보증회사는 보증 가입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악성 임대인 정보는 보증기관인 HUG나 주택금융공사, SGI서울보증에 차곡차곡 쌓였지만 '개인정보 보호법'이나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명단 공개가 금지돼 있다.
■전세보증 회사만 아는 '나쁜 집주인 명단'.. 상습 체납자·양육비 미지급 부모는 이름까지 공개하는데?
국회에는 '나쁜 집주인 정보공개법'이 2건 발의돼 있다. 하지만 임대사업자들이 '과도한 개인정보 공개'라며 반발하면서 1년 가까이 잠자고 있다.
하지만 현행 국세징수법이나 지방세징수법, 관세법, 양육비 이행법 등의 정보공개 수준과 비교해 정보공개 수준이 과도하지 않다는 반론이 크다. 정부는 상습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 악성 납세자의 이름과 연령, 직업, 주소지, 체납액을 국세청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배드파더스'에 대해서도 나이, 직업, 주소, 근무지, 채무불이행기간 등의 개인정보 공개가 가능하다.
개인정보 보호에 민감한 영국 런던시도 지난 2017년 5월부터 시청 홈페이지에 '나쁜 임대인 이력 확인 시스템(Rogue landlord checker)'을 도입했다. 제도 도입후 20개월간 18만5000명의 나쁜 임대인 이력이 공개됐다.
다만 윤석열 정부가 '나쁜 임대인 정보 공개'를 국정과제로 추진키로 해 관련법 개정에 속도가 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세보증 가입을 적극 장려하고 있지만 정작 돈을 떼 먹을 가능성이 높은 임대인 명단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며 "전세금이 전 재산일 수 있는 신혼부부와 청년층의 재산권 보호 차원에서도 명단 공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0년 A씨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59㎡를 23억원에 매수하겠다고 했다. 당시 시세 21억원이었지만 A씨는 집주인 B씨에게 시세보다 비싼 값을 사는 대신 B씨에게 보증금 12억5000만원에 2년 간 전세로 거주해달라고 요구했다. B씨는 이를 수용해 A씨에게 집을 팔고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계약당일 전입신고와 함께 확정일자까지 받아놨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B씨는 전세사기의 피해자가 됐다. 근저당 사기를 당한 것이다.
현재 임대차보호법은 전입신고 후 임대차계약서에 확정일자를 받으면 대항력이 생겨 세입자가 후순위권리자나 그밖의 채권자보다 먼저 보증금을 변제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B씨가 전세사기를 당한 이유는 이러한 대항력이 당일이 아닌 그 다음날 0시부터 발생하도록 돼 있어서다.
반면, 임대인의 변경 또는 근저당권 설정은 등기를 접수한 때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세입자가 전입신고를 마친 당일(전세계약 시작일)에 집이 제3자에게 팔리거나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저당권 설정 등기가 이뤄지면 등기의 효력이 세입자의 대항권보다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은 하루 차이로 후순위로 밀려 보호 받지 못하게 된다.
B씨 역시, A씨가 계약 당일 집에 25억8000만원의 근저당을 설정하고 대부업체로부터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면서 전세사기를 당하게 됐다. A씨가 돈을 갚지 않아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보증금을 통째로 날리게 되는 꼴이다. B씨가 계약 직전까지 등기부등본을 통해 근저당이 없음을 확인하고 계약 직후 바로 전입신고와 함께 확정일자를 받았어도 소용이 없다.
이런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2019년 최인호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확정일자의 효력발생 시기를 앞당기는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다음해에도 민홍철 민주당 의원이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2020년에는 김진애 전 열린민주당 의원이 기존 개정안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보증금 중 일정금액을 다른 권리관계보다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최우선 변제제도를 현실화 하는 방안까지 내놨다. 전입신고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같은날 근저당 등이 먼저 등기됐어도 세입자가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는 제안이다.
그러나 이들 법안은 모두 국회 본회의장 문턱을 넘지 못하고 관련 소위에서 수개월째 계류돼다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전입신고 즉시 세입자의 대항력을 갖추도록 규정할 경우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대출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간 발의된 법들은 모두 전입신고 즉시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이 경우 반대로 주민등록이 된 것을 모른 채 등기를 한 쪽이 선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세입자 대신 근저당권자(은행)를 상대로 한 사기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이런 사항을 고려해 등기에 접수된 순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도록 하자는 법안도 나왔다.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임차인의 전입신고 당일 대항력이 발생하도록 하되 우선변제권은 전입신고 당일 등기에 접수된 순서에 따라 정하도록 하는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지난 1월 대표발의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후를 따질 수 있는 시스템이 먼저 도입돼야 한다. 현재 저당권설정 등 등기는 법원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는 지자체가 각자 관리하고 있는데 등기는 구체적인 시점이 기록되는 반면 전입신고는 그렇지 않다. 접수 시점이 명확한 등기가 전입신고보다 '먼저'라는 대법원 판결이 있어 선후를 명확히 하는 행정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법 시행 의미가 없어진다.
홍석준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시스템 상으로는 주민등록과 등기 중 어느 게 먼저 이뤄졌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며 "법원, 지자체와의 논의를 통해 연계통합 시스템을 먼저 갖추고 법을 시행해야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대차3법 도입후 지난 2년간 임대차 시장에는 '전세 4년, 보증금 증액 5% 상한'이 "당연한 권리"가 됐다. 하지만 정작 전세금을 제때 돌려받을 권리에 대해선 고민이 부족하다. 전세보증 가입률도 10% 수준에 그친다. 전세보증을 단지 돈 떼일 염려에 대한 대비 차원을 넘어 '주먹구구식' 임대차시장을 체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입자 위한 임대차3법 도입하면 뭐하나?...전세금 지켜주는 전세보증, 가입률 10%에 불과
25일 정부와 HUG(주택도시보증공사) 등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내달 발표하는 임대차3법 대책의 일환으로 전세보증 개편안을 함께 내놓는다. 국정과제 세부실천 과제 이행 차원에서다. 전세보증은 세입자 혹은 임대사업자가 전세금 떼일 것에 대비해 가입하는 상품으로 전세금이 전재산인 세입자 보호에 필수적이지만 현재 가입률은 약 1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전세보증은 세입자가 자기돈 들여 스스로 가입하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과 임대사업자가 의무가입하는 '임대보증금보증' 2가지로 나뉜다. 2021년 기준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는 39만3000가구가, 임대보증금보증에는 40만8000가구가 가입했다. 이를 보증금이 있는 임대가구 숫자(763만9000가구)로 나누면 가입률은 약 10%로 추정된다.
KB부동산 기준 지난달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은 6억7570만원으로 5년전 대비 2억원 넘게 올라 돈 떼일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세입자들의 위기의식도 커졌다. 하지만 "수수료가 비싸다"는 이유로 세입자, 임대인 모두 전세보증 가입을 꺼리고 있다. 세입자를 들인 임대인에게 전세보증 가입은 의무가 아니다보니 가입율이 저조한 영향도 있다. 의무가입 대상인 임대사업자의 경우도 부채비율(100%) 등 가입조건에 미달해 가입을 미루거나 가입했더라도 보증금 전체가 아닌 부분보증 가입 비율이 30~40%에 달하는 실정이다.
■"집주인 눈치 안보고 이사갈 권리달라"는 2030세대..."모든임대인 의무가입 필요, 임대차3법 개정해야" 지적도
이 때문에 임차인, 임대인 모두 전세보증 가입을 꺼리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유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내달 세입자 보호를 위한 전세보증 수수료 인하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 부담스러워 하는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임대인 신용도에 따라 수수료율 차등화 방안을 해결책으로 거론한다. 신용도에 따른 수수료율 차등화는 이미 HUG의 분양보증에도 적용 중이다. 전세금을 제때 잘 돌려주는 '착한 집주인'이라면 보증 수수료를 지금보다 확 낮출 여지가 있다. 현재는 아파트냐 아니냐 등 주택 유형별로 차등적용하는데 기껏해야 0.026%포인트 만큼 차이난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도 지난 23일 기자간담회에서 '착한 집주인'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조했다. 임대차3법 개선 방안의 하나로 일반 임대인이 임대사업자 수준으로 전세계약을 갱신(10년)하고 임대료 증액 상한(5%)를 잘 지키면 보유세(재사세+종부세)를 깎아주자는 차원에서 언급했는데 여기엔 전세보증 수수료도 접목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제때 전세금을 돌려주는 문화도 임대차 시장에 정착될 수 있다. 지금은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할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전세기간이 끝나도 이사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전세보증에 가입하면 전세금을 떼일 위험에 대비하면서 늦어도 만료일로부터 1~2개월쯤에는 전세보증금을 돌려 받을 수 있다.
나아가 전세보증 회사는 전세만기가 남았는데도 조기에 이사하고 싶은 세입자 혹은 일시적인 자금난으로 전세금을 곧바로 내주기 힘든 집주인을 대상으로 자금중개 기능도 가능하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전세보증의 역할을 세입자의 '이사갈 권리'까지 확대한다면 구먹구구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우리나라 임대차 시장이 훨씬 체계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임대사업자 뿐 아니라 모든 임대인에 대해 전세보증을 의무가입하도록 해야 근본적으로 사각지대가 사라질 수 있다"며 "임대차3법을 개정해서 전세보증 가입을 의무화 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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