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은행나무 두 그루 있는 집

최정란 시인 2022. 5.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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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발송을 위한 주소록을 앞에 두고 있다.

이건 어쩌면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클리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친구의 집 주소를 마저 눌러쓴다.

은행나무 두 그루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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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발송을 위한 주소록을 앞에 두고 있다. 라벨을 미처 출력하지 못한 주소를 직접 쓰면서 새삼 알게 된다. 어디에나 시를 읽는 사람이 산다. 그리고 많은 아파트 이름이 외국어 혹은 외래어를 달고 있다. 영어가 많고 불어 그리스어 음악 기호도 있다. 한자를 재조립한 이름도 있다. 생활공간 이름을 굳이 외국어를 빌려 써야 한다면, 한국인은 한국어를 폄하하는 언어습관에 세 들어 사는 셈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언어기호를 폄하하고 자신의 말을 불신하는 것은 아니기를.

아파트 작명에 공식이 있다. 먼저 건설사 이름이 주된 기호가 된다. 많은 부동산 구매자는 대기업의 이미지를 선호한다. 그런데 시공사는 대체로 중소업체이다. 기호와 디자인 차이가 있을 뿐, 공사 내용은 비슷하다. 다음으로 주변이 고려된다. 별다른 것이 없거나 처음이면 더 퍼스트, 강이나 호수가 있다면 리버 혹은 레이크, 사차선 이상 도로가 있다면 센트럴, 바다가 있다면 오션 뷰 혹은 마리나, 공원이 있다면 파크 혹은 파크뷰, 산과 숲 혹은 언덕이 있다면 포레 혹은 힐, 전철역이 있으면 메트로, 학교가 있다면 에듀타운, 공해가 덜한 외곽이라면 에코, 노후건물이 많다면 시티를 붙인다.

거기에 애칭, 펫 네임이 더해진다. 그런데 애칭의 일부가 어마어마하다. 카스트제도의 상층부를 연상시키는 기호들이다. 계급과 상승과 부의 기의를 담고 있다. 언어기호에는 인간의 욕망이 투여된다. 황금성(캐슬골드), 궁전(팰리스), 탑(타워), 특권(프레스티지), 특급(S클래스), 별급(스타클래스), 명예(아너스), 왕족의(로얄), 고귀한(노블), 태양도시(헬리오시티), 세계(월드), 하늘성(캐슬스카이), 귀족계급(노블클래스), 탑궁전(타워팰리스). 거인족 티탄, 가장 큰 나무, 토성의 위성(하이페리온).

어디에 사는지 말해다오.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어울릴 만한 인간인지 아닌지 판단하겠다. 기호가 입을 빌어 외친다. 계급의 공간화는 차별의 기호를 이항대립으로 양산한다. 강남과 강북이 차별의 기호가 되고, 임대아파트냐 자가아파트냐가 어린이의 우정을 갈라놓는다. 심지어 공간이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수직적 계급제도를 연상시키는 집의 이름은 사실 수평사회를 수직사회로 거꾸로 돌리려는 음모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허세를 부리려고 한 개인이 지은 것도 아니다. 아파트가 부동산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비싸고 고급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아파트를 휩쓸고 있다. 복덕방에서 거래될 때 집이었던 아파트는 중개사 사무실에서 거래되고부터 부동산이 되었다.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를 덧붙이거나 낯설게 쓰면 좀 있어 보이고 부동산 가치가 올라간다고 한다. 있어 보이기 위해 심지어 개명까지 한다. 가난해 보이는 동네 이름은 지워버리고.

도시 사회에서 아파트는 재산의 중심 혹은 전부가 되었다. 아파트는 더 이상 휴식과 안락의 공간이 아니다. 지금 사지 않으면 더 오를 까 걱정하는 불안의 공간이다. 청년의 영혼을 끌어다 바치고 이자를 내느라 평생 끌려다녀야 하는 공간이다. 사람이 아파트의 주인이 아니라 아파트가 사람의 주인이다. 이건 어쩌면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클리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클리셰는 ‘내 아파트 마련의 꿈’으로 진화되었다. 꿈이라 불리게 된 아파트는 하늘 모르고 시건방져졌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 초현실이 되었다. 지금의 아파트는 성실한 노동의 손이 닿지 않는 불가능의 영역에서 청년의 영혼을 빨아먹는 괴물이다. 설마 메피스토펠레스?

낮고 가까이 있는 집 ‘비근재’, 아껴둔 이름을 꺼내 본다. 몸과 마음을 삼가고 자신을 낮추던 조상들의 당호가 새삼 귀하게 여겨진다. 곧 어떤 큰 공간의 이름이 정해질 것이다. 멀고 높은 이름보다 낮고 겸허한 이름이면 좋겠다. 굳이 외래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좋겠다. 공간의 기표는 중요하다. 관용 평화 배려 낮춤의 기의가 담긴 기표이면 좋겠다. 어느 시인의 집처럼 ‘불편당’까지는 아니어도 겸허한 영혼이 깃든 이름이면 좋겠다. 친구의 집 주소를 마저 눌러쓴다. 은행나무 두 그루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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