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숨진 그곳..'작업계획서'도 없었다

홍성희 2022. 5. 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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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예방 시스템, 잘 작동하나?
① '작업계획서' 없이 위험 작업에 노동자 투입
② 노조 없는 하청업체에선 '위험성 평가' 형식적
③ '안전 교육'은 책임 면하려 사진 찍기 급급
지난 3월 2일 현대제철에서 50대 노동자가 사고로 숨지기 전 작업 모습


지난 3월 2일,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 50대 노동자가 460도 고온의 아연 용기에 빠져 숨졌다.

당시 현장 조사에 참여했던 노조 측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현장에 비치돼 있어야 할 '작업계획서'를 찾을 수 없었다.

최병률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안전보건 차장은 "현장에 있던 사측 관계자에게 물어봤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 작업계획서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숨진 노동자는 뜨거운 용기 표면에 뜨는 불순물을 기다란 도구를 이용해 건져 올리는 작업 등을 해왔다. 극도로 위험한 작업이지만, 구체적인 작업 방법 등이 담긴 작업계획서 없이 현장에 투입됐던 것이다.

■ 위험 작업에 '작업계획서' 없이 투입…38건 적발


KBS가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1월 27일부터 이달 1일까지 발생한 중대재해 168건을 분석했더니, 가장 흔한 안전보건조치 위반 사항 중 하나는 '작업계획서 미작성'이었다. 모두 38건이었다.

중대재해법 1호 사건인 삼표 채석장 붕괴 사고의 경우도, 삼표 측이 작업계획서 없이 노동자를 투입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산업안전보건규칙 38조를 보면, 사업주는 근로자 위험 방지를 위해 작업과 작업장 상태 등에 대한 사전조사를 토대로, 작업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작업 종류에 따라, 작업 방법뿐 아니라 사전 점검 사항과 사고 시 해야 할 조치 등을 포함시켜야 한다. 산재 예방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데, 지켜지지 않고 있다.

■ 책임 면하려 서류만…"사고 예방 효과 없다"

위반 사항 중에는 '작업계획서 미고지'도 여러 건 있었다. "작업계획서 내용을 해당 근로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실제 현장 상황을 물어봤다. 한 조선업체 비정규직 노동조합 관계자는 '작업 전 작업계획서에 대한 설명을 듣느냐'는 질문에 "아침에 누구는 몇 번 블록에 가고, 누구는 탱크에 들어가고, 작업 명령을 받으면 바로 현장에 가는 것"이라며, "작업계획서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잘 모른다"고 답했다.

내용이 비어 있는 작업계획서 양식에 '서명'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해성 민주노총 전국플랜트건설노조 경인지부 정책국장은 "공정을 빨리 진행하게 해야 하는데, 작업계획서를 작성할 관리 인력은 부족하게 책정돼 있어서, 서명을 받고 난 뒤에 '오늘 이 팀이 해야 될 일들이 어떤 것이다' 라고 부랴부랴 적는 형태로 되고 있어서, 사고 예방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작업계획서를 근로자에게 알리는 방식, 빈도 등에 대한 규정은 현재 없다.

■ "자리 바꿔 사진 촬영"…안전교육도 요식 행위?


안전 교육도 여전히 '요식 행위'로 진행되는 사업장이 있었다.

KBS가 입수한 한 건설 현장 교육장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면, 노동자들이 넓은 교육장에 모여 앉아 있다. 이어 업체 측에서 "자리를 바꿔달라"고 하자, 노동자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의자로 옮겨 앉고, 업체 관계자가 사진을 촬영한다. 9분짜리 영상에서는 이런 모습이 반복된다.

이 영상을 촬영한 현장 노동자는 업체 측이 안전교육을 여러 차례 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노조 없는 사업장에선 위험성 평가도 "형식적"


산재 예방 시스템의 또 다른 축인 '위험성 평가' 제도도 여전히 제 기능을 못 한다는 게 현장의 이야기다.

위험성 평가는 사업장 내 유해·위험 요인을 찾아내, 사고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 크기를 평가하고, 설비 개선이나 인력 재배치 등 필요한 조치를 하는 절차다. 보통 '사고 발생 가능성'과 '중대성'을 기준으로 위험성 점수를 매긴다. 역시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의 의무다.

위험성 평가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위험 정도를 가장 잘 아는 현장 노동자들의 참여가 필수다. 산안법에 "해당 작업장의 근로자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규정돼 있는 이유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없거나, 힘이 약한 하청업체에서는 형식적으로 이뤄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근로자 측 대표를 회사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한 조선업 하청 노동자는 "정문에서 오가는 노동자를 붙잡고 위험성 평가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청업체와 소속 노동자들이 위험성 평가를 제대로 해 설비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더라도, 그 설비를 소유한 원청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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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희 기자 (bombom@kb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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