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짜꿍' 동요로 우는 어른 달래주는 '어린이날'

임인택 2022. 5. 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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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도종환이 되살린 동요 운동가 정순철
윤극영·홍난파·박태준과 함께 '4대 작곡가'
천도교 사상으로 방정환과 함께 다진 어린이날

어린이를 노래하다
한국 동요의 선구자 정순철 평전
도종환 지음 l 미디어창비 l 2만2000원

피아노 앞 정순철. 1935년 동덕여고 음악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20년가량 동덕여고, 중앙보육학교, 무학여고, 성신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다. 미디어창비 제공

1922년 5월1일, 섭씨 22도. 낮 1시께 서울 종로, 탑골공원, 광화문 등지에 청소년들이 몰려다녔다. 4쪽짜리 신문에 “청후담(靑後曇)”이 예보되긴 했다. 맑은 뒤 흐림. 아랑곳없이 청소년들이 탄 자동차엔 “어린이의 날” 문구가 붙었고, 이들이 일제 조선인들에게 뿌리던 선전문엔 이리 적혀있었다.

“1. 어린 사람을 빈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하시고 자주 이야기해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주십시오….”

천도교소년회가 창립 1돌을 맞아 서울, 인천에서 펼친 ‘어린이 운동’이다. 지금 이 5월의 초입보다 기온은 조금 더 높았고, 모든 효시가 그러하듯 기상은 훨씬 더 높았겠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날의 시작이었다.

‘청후담’을 예보한 <동아일보>는 “우리의 부형 중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하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아니한지라(…) 어린이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십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를 시내에 배포하며(…) 이러한 일은 조선소년 운동이 처음”이라고 알렸다. 말하자면 ‘담후청’의 예고다.

“어린이”가 조어된 게 1914년(육당 최남선), 인격적 “어린이”로 기의된 게 1920년(소파 방정환)이니, 여성해방은커녕 조국의 독립조차 불가측한 와중의 ‘어린이 해방’까지 실로 빠른 전개다.

‘어린아이’가 주체로서의 ‘어린이’로 제창되기까지 일제 조선에 소파만 있던 건 아니다. <어린이를 노래하다>는 더더욱 낯설 이름 ‘정순철’로 그 시대를 복원한다. 그것이 올해 갖는 의미가 각별하다. 100번째 어린이날이어서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지난하게 심고 틔운 그 날의 ‘뿌리’가 말라버린 까닭이다.

1901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정순철의 ‘진짜’ 고향은 동학이다. 외할아버지가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으로, 정순철의 여러 불행과 드문 기회는 천도교와 맞닿는다. 동학혁명(1894년)으로 어머니 최윤이 옥살이 중 옥천군 아전과 늑혼(강제혼인)하게 되거나, 정순철 출생 직후 아버지 정주현이 후처를 들이거나, “역적의 딸”로 최윤이 따로 산골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거나, 그러다 3대 교조 의암 손병희의 도움으로 상경해 가회동서 교단 보조금으로 살며, 천도교계 보성중·고보에서 공부하기까지 그러하다. 그리고 의암이 사위로 맞은 방정환을 한 집에서 만난다. 1917년, 정순철 나이 열여섯, 방정환 열여덟이었다.

방정환 등이 1921년 결성한 천도교소년회가 어린이 운동을 발아시킬 수 있던 이유는 명료하다. 저자의 설명이기도 하거니와, 해월이 교리화한 삼경사상(경천·경인·경물)의 구체적 실천이 어린이 인권운동이었다. 둘째, 소장세력들의 역할이다. 3·1운동 이후 지도부 공백과 청년층의 성장이 겯게 된 결과인데, 동학을 민족종교 천도교로 조직 정비하며 마치 현대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만큼 빠르게 교세를 확장시킨 의암에 대한 신진의 비판이 이미 없지 않았다. 해월의 큰아들(정순철의 이복형) 소수 최동희가 사치와 부패방조 등을 이유로 교주에게 직접 쇄신을 요구한 1916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정적 인물들의 조합이 일제강점기 가장 진보적인 인권·생명운동을 가능케 했다. 천도교 청년지도자와 일본 유학파가 1923년 결합한 색동회. 도요대 철학과의 방정환, 동경음악학교 정순철과 그의 동문 윤극영 등이 조직한 ‘색동회’는 이후 <어린이> 잡지와 강연 등을 통해 대중을 눈 뜨게 하고, 동화와 동요를 기제 삼아 눈 감지 못하게 붙든다. 어린이날은 1~2회에선 일본서 의견만 보탰던 구성원들이 귀국 후 3회부터 본격 주도하며 “30여만의 어린 사람이 참가한” 전국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1929년 정순철이 발표한 ‘우리 애기 행진곡’의 악보. 제목은 나중에 ‘짝짜꿍’으로 바뀌었다. 미디어창비 제공
1929년 정순철이 발표한 ‘우리 애기 행진곡’의 가사. 제목은 나중에 ‘짝짜꿍’으로 바뀌었다. 미디어창비 제공

그 시대 우리말 동요의 힘은 독립군의 군가만큼이나 적실해 보인다. 1920~30년대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와 함께 4대 동요 작곡가로 꼽히는 정순철이 함께 기여한 덕분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 ‘반달’(1924)을, “뜸북뜸북 뜸북새” ‘오빠 생각’(1925)을, “나의 살던” ‘고향의 봄’(1926년)을, 그리고 “엄마 앞에서 아빠 앞에서” ‘짝짜꿍’(1929년, 원제는 ‘우리 애기 행진곡’)을 죄다 부르게 만든 이들. 이 노래 모두가 잡지 <어린이>와 ‘결탁’해있다.

1928년 색동회가 개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찾은 관람객들. 미디어창비 제공

색동회 안에선 ‘슬픈 동요·동시 일색’이란 자기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교육·인권 차원의 정서함양을 부단히 성찰했단 얘기다. 실제, 엄마의 부재나 가족사로 불우한 유년을 오래 간직하던 정순철의 동요 가운데 특히 ‘짝짜꿍’이 폭발적 인기를 끈 이유는, 18살에 이 노래를 작사한 윤석중 스스로 말하듯 “어른이 아이를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이가 우는 어른을 위로해주는 노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유학 단짝인 정순철과 윤극영의 대비는 흥미롭다. 아내가 종이봉투를 부치며 매월 3원씩 부친 돈으로 한 과목당 30원짜리 음악공부를 하던 정순철은 과작했고, 조선 부호였던 친척 윤치호가 2년간 학비를 대주었다는 윤극영은 다작했다.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학교 시설이 무너지고 조선인의 안녕도 위험해진 터, 윤극영은 즉각 귀국해 경성 소격동 자택에 음악연구실을 차려 활동을 이어갔고, 정순철은 막노동 따위에 매달렸고 그럼에도 결국 학비체납으로 제적되고서야 돌아왔다. 평전 외 기록까지 들추자면, 친일지식인 윤치호가 손병희를 “사기꾼” 취급하며 3·1운동의 배경조차 신도 성금 갈취에 있다고 힐난(<윤치호 일기>)하는데, 배경이 이처럼 충돌하는 신진 음악가 둘이 하나의 목표를 좇은 셈이다.

정순철은 말했다. “언제나 쓸쓸하였고 언제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래도 했었을 것이요, 옛날이야기도 듣고자 했었을 것입니다. (…)목소리가 좋다고 하면 그것은 성악(예술)이 아니라 성대 기술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과거를 저어 미래로 가는 저마다의 가락이 동요인 셈이다.

8·15 해방 이듬해에 전국에 인쇄 배포된 ‘졸업식 노래’ 악보. 노래 때문에 졸업식에 꽃다발이 본격 등장했고, 책을 후배에게 물려주는 미덕도 생겨났다. 미디어창비 제공

1937년 일제는 어린이날을 금지시킨다. 해방 이듬해 정순철은 ‘졸업식 노래’를 작곡해 꽃다발과 눈물 없는 졸업을 어렵게 했고, 6·25전쟁 중 납북된다. 끊임없이 슬픈 과거와 꿈꾸던 그러나 오지 않는 미래를 읊조렸을 법하다.

평전을 쓴 도종환 국회의원(시인)이 “정순철이란 이름을 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듯, 우리에겐 아이·어른 어울려 몇날을 설레하던 어린이날이 있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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