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22화)[연재소설]

에린 2022. 4. 2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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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열한 개의 생산라인이 있는 봉제공장은 호찌민시에서 꽤 큰 사업체에 속했다. 직공들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했고 여의치 않으면 오토바이 카풀을 했다. 차량 사이로 비집고 다니는 오토바이 때문에 택시기사는 여러 번 경적을 울렸다.

강호는 택시의 뒷자석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바이어와 납기 문제로 호찌민 공장에 출장을 간 지 삼 일째였다. 김 부장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내일까지 제품 검사를 끝낼 수 있게 생산 일정을 확인하라는 지시와 면세점에서 위스키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검사 일정표를 보고 검토해야 할 몇 가지 문제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영지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전에도 그랬듯이 면세점에서 살 게 있다면서 강호에게 브랜드명과 립스틱 호수를 보내왔다.

강호는 호찌민 공항 내 면세점에 들렀다. 로얄 살루트 32년산을 사고 Y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입구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었다. 강호는 시계를 쳐다보고 끝줄에 섰다. 팔짱을 끼고 가지런히 진열된 화장품을 눈으로 둘러봤다. 베트남 여자가 귀밑으로 내려 온 단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어깨에 멘 가방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그녀의 뒤태는 반이나 가려졌다. 세라도 그랬다. 제 몸보다 커다란 가방 때문에 가냘픈 몸매가 도드라졌고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길 때는 작고 하얀 얼굴이 청초했다. 강호는 생각에 잠긴 채 연한 웃음을 지었다. 차례가 되자 영지가 말한 립스틱 12호를 주문했다. 직원이 립스틱 하나를 내밀며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강호는 비행기 안에서 립스틱 두 개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세라가 잠적하고 시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갔다. 그동안 문자함은 굳게 닫힌 비밀의 문이 돼 버렸다. 강호는 기내식을 먹다가 ‘독한 녀석’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때 빌라 303호에 올라가 직접 확인했어야 했다. 회사로 찾아가 그만둔 이유를 물었어야 했고, 통신사에 가서 위치추적이라도 요청했어야 했다.

방관하고 지낸 시간이 후회로 돌아왔다. ‘숨바꼭질이 지겨우면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리는 게 실수였다. ‘할 만큼 했다’는 영지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하는 게 아니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세라 없이 영지를 만나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주말에는 동호회 사람들과 백패킹을 다녔다.

영지도 남자를 만나고 몇 달 후 헤어졌다며 울고불고하는가 하면 늦은 밤에 술 먹고 전화해 집에 데려다 달라고 떼를 썼다. 이런 투정을 부려도 뒤끝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세라는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모든 일에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 이성적이고 감정에 흐트러져 속내를 비치다가도 다음 날이면 반듯한 모습으로 차가우리만치 자기감정을 변호하고 나섰다.

영지가 번번이 되풀이하는 행동들이 세라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강호는 옛일을 뒤척거리다 승무원이 건네는 주스를 바지에 쏟았다. 헐거워진 나사처럼 여기저기 흩어지는 감정들을 추슬렀다. 강호는 세라와 자신 사이에 항상 보이지 않는 경계를 느꼈다. 누군가는 그 선을 조금씩 밟아 넘으려 했고 누군가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일 년 전 마지막 모습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라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끝까지 물어봐 주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세라가 얘기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으면 어땠을까 하고 스스로 물었다.

착륙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들렸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자 우렁찬 소리와 거대한 진동이 기내를 잠식했다. 활주로에 안착하자 사람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강호는 립스틱 하나를 주머니에 따로 집어넣었다.

캡틴은 김포공항을 빠져나왔다. 한쪽 어깨에 걸친 백팩을 양어깨로 짊어지며 세라를 뒤쫓았다. 세라가 버스 노선을 재빠르게 검색했다.

“세라 씨, 그럼 가족들 잘 만나고 나중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봐요.”

세라는 켑틴과 헤어지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표정 또한 활기찼다. 전철 안에서 어린아이가 핸드폰 영상을 보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며 신발을 까닥였다.

병원 앞 화단에는 팬지와 베고니아가 활짝 피어 있었다. 진료실 앞에는 몇 명의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얼마 후 간호사가 세라를 불렀다. 진료실로 들어서자 정 박사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언제 왔어요?”

세라는 정 박사의 시선이 자신을 천천히 쳐다보는 걸 느꼈다.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긴장됐다. 세라는 그의 눈빛과 표정에 주목했다. 그동안 변화한 자신의 모습이 표정으로 나타날까, 유심히 관찰했다.

“증상이 심해진 건 없나요?”

그가 물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피곤한 것 말고는 증상은 없었다. 등에 있는 갈색점은 크기 변화는 없었지만 조금 딱딱해졌다. 그렇다고 통증이나 병증이 있지는 않았다.

정 박사는 세라의 심신 상태를 살피면서 몇 가지 검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합병증으로 올 수 있는 여러 증상은 통증 완화만 될 뿐 완치는 없었다. 환자에게 위로나 예의를 지키느라 기적이나 희망이란 말로 기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적응시키는 게 환자나 가족에게 적합한 처방이라고 생각했다.

세라는 정 박사 앞에 섰을 때 그의 흔들리는 동공과 안면근육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완곡한 표현으로 그녀의 심기를 헤아리는 것 같았다.

동네 초입은 어수선했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난립했고 길바닥엔 전단지가 나뒹굴었다. 공원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피켓시위를 하고 시계탑 아래서는 배드민턴을 치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백스텝을 하는 할아버지까지 일상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녹이 슬어 페인트가 벗겨진 하나 슈퍼의 간판도 그대로였다.

세라는 집 앞에서 손바닥을 문지르며 서성거렸다. 골목길로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고 그중에 정임도 있었다.

‘엄마!’

하마터면 정임을 입 밖으로 부를 뻔했다. 정임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검은색 바지에 세라가 생일 선물로 사줬던 남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반짝이는 큐빅 단추가 있어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아봤다. 선캡을 쓴 슈퍼 아줌마와 배가 나온 세탁소 아저씨도 그대로였다. 동네 사람들이 가까이 오자 세라는 옆 동으로 몸을 숨겼다. 웅성대는 소리에 정임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재개발 반대라고 인쇄된 피켓을 든 아주머니들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조율 중인 것 같았다. 그러다 작당이라도 한 듯 일사천리로 흩어졌다.

정임은 슈퍼 아줌마와 함께 공원 쪽으로 향했다. 세라는 정임의 뒤를 따라갔다. 공원에는 시위에 참석하려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건너편에서 시위대 속으로 들어간 남색 재킷만 눈길로 쫓아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군집했고, 정임과 비슷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몰려들자 정임을 놓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집 앞에서 정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위대의 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마이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임이 슈퍼 아줌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피켓을 들고 다른 손엔 두부가 담긴 비닐봉지를 쥐고 있었다. 화단에 앉아 있던 세라가 재빨리 옆 동으로 몸을 숨겼다. 세라는 조심스레 머리만 내밀고 다가오는 정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무릎 관절이 안 좋은 사람이 시위대에 들어가 종일 서 있을 걸 생각하니 염려스러웠다. 방금 미용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머리는 몹시 곱슬거렸다. 정임이 현관으로 들어설 때 세라의 입술이 떨렸다.

세라는 기운 없이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버스 안내 전광판만 멍하니 올려다봤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택시가 회색 빌딩 앞에서 멈췄다. 세라가 빌딩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잰걸음에 갔다. 월든은 그대로였고 카페 사장도 민머리를 반짝이며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빌딩 앞은 복잡했다. 세라의 시선이 회전문을 돌아 나오는 사람들에게로 일일이 꽂혔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회전문이 계속 돌아가고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속에서 강호가 보였다. 짙은 남색 정장에 서류 가방을 메고 길가에 서서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세라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으면서도 신경은 핸드폰에 쏠렸다. 그에게 문자를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 한 여자가 뒤에서 강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깨를 치며 놀래키고는 팔짱을 꼈다. 강호는 이력이 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장난을 받아 주었다.

스스럼없이 팔짱을 낀 여자는 마스크를 했음에도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동작이 명랑했고 거침이 없었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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