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쪽짜리 책 '법전' 만드는 이들.."세상 만큼 법도 복잡해져"

글·사진 전현진 기자 2022. 4. 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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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현암사 법전팀에서 만든 각종 법전들.


표준국어대사전에 ‘법전’(法典)의 뜻을 찾으면 “국가가 제정한 통일적ㆍ체계적인 성문 법규집”이라고 나오지만, 법전은 애초에 출판사인 현암사에서 1959년부터 만들어온 법령집의 상품명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법률집으로 꼽히는 이 상품, 즉 법전은 이제 사전처럼 두꺼운 형태의 법령집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됐다.

법전 편집·제작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윤지현 현암사 법전팀 편집장과 처음 연락한 건 지난 1월이었다. 윤 편집장은 “법전 출간을 앞두고 있어 너무 바빠 취재에 응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2022년판 법전을 출간한 뒤에야 여유가 생긴다고 했다. 4월25일 법의 날을 며칠 앞둔 금요일 오후 드디어 서울 마포구 현암사에서 윤 편집장과 김희윤 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국민의 준법정신을 높이고 법의 존엄성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의 날’. 법전을 만드는 이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하루 300건 몰아치기 법안 통과에 ‘진땀’

윤 편집장과 김 팀장은 우선 어떤 법전을 만드는 지 알려주기 위해 최근 출간된 책들을 보여줬다. 법전, 소법전, 변호사시험법전, 시험용법전, 세법, 법률용어사전 등 올해 나온 것만 여섯 종이었다.

여기에 각종 국가기관의 의뢰를 받아 법률·규정집 등을 출판하기도 한다. 각종 국제조약을 담은 국제법 기본 법규집을 출판한 것도 외교부의 의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각종 법률 전문 서적을 출판하지만 법전 제작이 가장 중요한 업무다.

윤 편집장이 처음 일을 시작했을 1989년 무렵에는 법전이 1월1일에 맞춰 출간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회가 복잡해졌고, 법률이 만들어져 시행되는 과정도 더 복잡해졌다. 국회 회기 종료 등에 맞춰 인쇄하기에는 촉박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요즘에는 매년 2월 무렵 새로운 법전이 나온다.

법전팀의 업무는 1년 내내 지난해 나온 법전을 최신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의 반복이다. 기존 법전을 ‘업데이트’ 하는데, 이 작업이 간단치 않다. 헌법, 법률, 명령(시행령·시행규칙), 자치법규 등 법령은 1년 내내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고, 또 일부만 달라진다.

가장 바쁜 건 9월 정기국회가 시작하고 2월 출판 작업이 마무리되는 6개월여다. 이때는 제 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거의 없다. 특히 국회 종료를 앞둔 12월 무렵 가장 바빠진다.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되고 통과돼 관보에 게재된 뒤 시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주시해야 한다. 법안 통과 상황을 목록화해 미리 파악해두고 무엇이 어떻게 바뀌는지 정확히 알아두지 않으면 출판 기한에 맞춰 편집을 마무리하기 어렵다.

문제는 마지막까지 법안 통과를 미루다가 회기 종료 직전 수백 건의 법률을 몰아쳐 통과시키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김 팀장은 “하루에 300건의 법률이 통과되기도 한다”고 했다.

정기국회 외에도 임시국회나 각종 특별법 등 법을 만들고 바뀌는 경로는 다양하다. 언론보도를 확인하거나 국회의 법안 심사 과정을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관보를 찾아보는 일이다. 관보에 정식으로 게재돼 공포되면 이를 기준으로 법전을 편집하기 때문이다.

관보에는 특정 법률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개정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는데, 2022년 4월20일 공포된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을 보면 “제19조 제2항 중 ‘16명으로’를 ‘18명으로’로 한다”고 돼 있다. 법전 편집팀은 이런 내용을 반영해 작업을 이어간다.

윤지현 현암사 법전팀 편집장(오른쪽)과 김희윤 법전팀장이 올해 새로 나온 법전을 들고 있다. 법전팀에는 두 사람을 포함해 4명의 정규직 편집자가 근무하고, 국회 일정 등 업무량에 따라 인원을 보충해 법전 제작을 하고 있다.


■세상 변화만큼 복잡해진 ‘법’

법전은 박엽지라고 불리는 얇은 종이를 사용해 만든다. 이 종이 위에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법이 새겨진다. 1㎡ 한 장에 36g가량 하는 박엽지는 일반 서적에 쓰이는 종이(약 80g)에 비해 무척 얇고 가볍다. 하지만 법전으로 만들어놓으면 결코 가볍지 않다. 법전은 A4 용지 크기(210*297㎜)로 6000쪽에 무게는 4.3㎏이다. 2100여종의 법령이 수록됐다. 시멘트 벽돌 한 장의 무게가 약 2㎏이다.

1959년 4월 최초의 법전은 성인 남성의 손바닥 만한 크기(120*150㎜)였다. 1120쪽에 430개 법령이 담겼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손으로 책을 만들었다. 60년의 세월 동안 사회가 얼마나 복잡해졌는지는 법전의 크기에서 물리적으로 드러난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규율되지 않았던 수많은 상황에 대응해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꺼운 법전에도 모든 법률이 담기는 건 아니다. 종이책 1권으로 출판할 수 있는 제본에 한계가 있어 중요도나 필요도에 따라 기존의 법률을 빼거나 새로 담는다. 세법은 법전에 있던 세무 관련 법령들을 따로 모아 출간한다.

법전은 법을 다루는 실무자들에게는 만능 공구함 역할을 한다. 소설가 김훈은 취미로 법전을 읽어본다고 하지만, 취미로 법전을 찾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현장에서 필요한 법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법을 담아내는 게 물론 좋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본 한계를 고려하는 것도 매년 법전 편집팀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매년 전문가와 독자들의 의견을 다양한 경로로 듣는다. 독자들의 의견은 법전을 구성하는 중요 참고사항이다. ‘축사의 부동산 등기에 관한 특례법’처럼 법전 편집자에게도 생소한 법률이 실무자들 사이에선 자주 참고해야 하는 법률로 통하기도 하고, 분량이 많아 법전에서 제외한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현장에서 꼭 필요하다는 독자들의 요청을 듣기도 한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1959년, 1961년, 1962년 출판된 법전과 2022년 나온 소법전과 법전. 2022년판 소법전에는 헌법, 민법, 형법 한글 기본법전 소책자가, 법전에는 농림·해양수산 등 법률 등이 담긴 별책이 포함됐다.


■정권교체 되니 일 쏟아졌다?

윤 편집장은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은 1998년을 가장 바쁜 해로 기억한다. 2004년 입사한 김 팀장은 2008년이 가장 바빴다. 공통점은 바로 정권교체가 있던 해라는 점이다. 정권교체가 이뤄진 올해도 분명 바쁠 것이다. 늘 그랬다.

법전 편집자들에겐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가 있는 시기는 유난히 바쁘다. 정권 교체는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과 다른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면서 규제가 생기거나 사라진다. 무엇보다 정부 조직이 바뀐다. 모두 입법 사항이니 법전 편집자들의 업무와도 직접 연결된다.

정부 기관의 명칭이 바뀌거나 새로 생기고 폐지되는 건 이를 규정하는 정부조직법을 바꾼다는 의미이다. 법률이 바뀌면 시행령, 시행규칙 등도 따라서 바뀐다. 그럼 각 기관의 명칭과 업무의 변동에 따라 연동되는 수많은 법률에 영향을 준다. 법전에는 이런 변화를 모두 반영해야 한다.

김 팀장은 “2008년에 정부조직법이 전부 개정됐는데 새롭게 업데이트하는 작업만 4개월 정도 걸렸다”고 했다. 대선 이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여가부 폐지’ 등 최근 논란이 되는 정책을 보면 ‘아, 업무 폭탄이 떨어지겠구나’ 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다.

법전 편집은 마감 직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새로 바뀌는 법률들을 반영해야 하는 작업이다. 편집을 모두 마친 법전을 인쇄 후 제본하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리는데, 인쇄 중에 법률이 바뀌면 해당 부분만 다시 고쳐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독특한 편집 방식이 생겼다. 예컨대 소법전의 민법편 마지막 장에는 쪽수 표기가 1290~1400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다음 이어지는 상법편의 첫 장의 쪽수는 ‘1402’라고 돼 있다. 1290쪽 다음 1291쪽이 와야 하지만 110페이지 정도의 공백이 생긴 셈이다. 법전 전체에 걸쳐 찾아볼 수 있는 편집 방식인데, 인쇄 과정 중 법률이 통과돼 급히 새 법안을 반영해야 할 때 분량이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대비한 것이다. 독자들은 쪽수를 보고 “인쇄가 잘못됐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1959년판 법전(앞)과 2022년판 법전. 처음 만들어진 1959년판 법전은 세로쓰기 등 형식 뿐 아니라 법전 자체의 크기와 수록한 법률의 수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사라지는 법 보며 사회 변화 생각

종이로 만들어진 법전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인터넷으로 법률 검색을 하는 시대에는 불편한 게 사실이다. 김 팀장은 “인터넷으로 법률을 찾아보는 것보다 휴대성이 떨어지는 것은 맞다”면서도 “법전을 통해 법조문을 들여다 보면 앞 뒤 흐름도 함께 파악할 수 있어 법을 더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법 자체가 어렵기는 하지만 되도록 잘 읽힐 수 있게 만드는 게 법전 편집의 목표다. 윤 편집장은 “(법전의) 글씨도 작아 불편할 수 있다. 그래서 최대한 가독성 있게 만들기 위해 서체 등 다양한 부분을 고민한다”고 했다. “모든 국민이 어렵지 않게 법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편집”하는 게 이들의 직업 정신이다.

읽기 쉬운 법전을 위해 1964년부터 가로쓰기를 도입했고, 일본어투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순화용어 편람을 부록집으로 내놓았다. 이 편람은 이후 법제처에서 주관하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의 단초가 됐다. 중요한 법령의 각 조문 아래에 참조 조문을 적어둔 것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한 시도다. 신·구 법조문 및 미시행법 등을 동시에 수록해 보여주는 이런 편집 방식은 이후 보편화됐다. 법 자체에는 저작권이 없지만 이런 편집 방식은 ‘편집저작권’을 인정받았다.

법전은 사람이 사는 모습이 복잡해질수록 크고 두꺼워졌다. 복잡한 세상을 규율하기 위해 새로운 법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아무리 법이 많아도 일상을 모두 규율하기는 어렵다. 이전엔 공포된 후 바로 시행되던 법들이 이젠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며 수년 동안 유예기간을 둔다. 한 법조문 안에도 앞뒤 문장(전단과 후단)으로 나누어 시행일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법 자체가 이렇게 복잡해지면서 서로 다른 법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너무 급하게 만들어진 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다.

김 팀장은 새롭게 생겨나는 법보다 사라지는 법을 보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징계권, 간통죄, 호주제 등은 법전의 한 곳을 차지해 우리 사회를 규정해왔지만, 이젠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진 법조문엔 <삭제>라는 표시만 남는다. 김 팀장은 “법은 형태가 없지만 글자로 쓰이고 법전에 담기면서 의미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폐지돼 법전에서 사라지는 법률들 역시 나름대로 사회의 변화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법전에 담긴 민법 제915조 [징계권].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는 이 규정은 2021년 1월26일 삭제됐다.

글·사진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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