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에 맞선 고구려, '지혜로운 약자'였다

김형민 2022. 4. 2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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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수나라에 맞선 고구려는 여차하면 '선빵'을 날릴 줄 아는 무모한 용기를 과시했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강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비열함까지도 감수했다.
영화 제작사 키노스타에서 제공한 ‘살수대첩’ 기록화. ⓒ키노스타

5호16국과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는 실로 막강한 국력과 막대한 인구를 자랑했어. 초대 황제인 문제의 치세에 수나라 인구는 890만7000호에 달했고, 총인구는 5000만명을 넘어섰다고 추정되지. 이런 수나라가 인적·물적 자원을 ‘영끌’했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갈 거야. 그리고 그렇게 끌어모은 물자를 쏟아부은 대상은 다름 아닌 고구려였어.

하지만 고구려는 수나라에 호락호락 굴복하지 않았고 영양왕은 직접 말갈족을 이끌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뜻하지 않은 기습 공격에 분노한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어. 하지만 장마와 태풍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물러섰다. 위기를 모면한 이후 영양왕은 바짝 고개를 숙이며 수나라의 비위를 맞췄다. 이때 영양왕의 국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해. ‘요동분토신(遼東糞土臣)’ 즉 요동 똥덩어리 땅의 신하라는 뜻이야.

고구려 대왕 체면에 ‘똥덩어리 신하’라는 표현은 자존심을 적잖이 구기는 것이었지만 영양왕은 개의치 않는다. 약한 이가 구사해야 할 최선은 일단 강자와 싸우지 않는 일이지. 명분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강자의 비위를 건드리고 이기지 못할 싸움에 자신과 동족의 존망을 밀어 넣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걸 영양왕은 알고 있었거든.

수 문제가 죽고 둘째 아들이 수 양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돼. 머지않아 수 양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병력을 동원한 고구려 침공 명령을 내린다. 전투 병력만 113만3800명이었다는 어마어마한 기록은 좀 과장이었다 치더라도 이렇듯 압도적인 대군을 동원한 수 양제의 전략은 간단했어.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한 성이 공격당하면 다른 성에 있던 병력이 침략군의 배후를 치는 상호의존적인 방어체제였지만 100만 대군이 몰려들면 다들 제 앞가림하는 데에 급급할 수밖에 없지 않겠니. 전쟁사 전문가인 임용한 교수에 따르면 ‘중국만이 펼 수 있는 전략’이었지. 하지만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략을 끝내 물리쳤어. 영토로 보나 인구로 보나 어림도 없었던 고구려가 어떻게 수나라라는 거인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고구려 사람들은 용감히 싸웠어. 동시에 그들은 지극히 지혜로웠다. 수나라 대군의 예봉을 꺾은 요동성 전투에서 고구려 사람들은 황제의 명령에 철저하게 좌우되는 수나라 군의 비효율성을 완벽하게 이용했지. 612년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 군의 총사령관은 몸소 출진한 수 양제였어.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마땅히 어루만져 받아들여라.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 이 같은 수 양제의 명령에 어떤 장군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지.

요동성은 수나라 군대가 성벽을 넘기 직전이 될라치면 항복을 타진했다. 수나라 장군은 황제 있는 곳까지 파발을 보내 그 소식을 전달해야 했지. 그렇게 하지 않고 성벽을 무너뜨리면 황명을 어긴 게 되니까. 황제의 답이 오기 전에 고구려군은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금 성벽에 늘어서서 칼을 번득였지. 이런 일은 세 번씩이나 반복됐다. 고구려군은 아마도 이랬을지도 몰라. “병사들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수나라 군대에 항복 의사를 전해라. 시간 좀 끌자.”

을지문덕의 목숨까지 건 모험

수 양제는 또 한편으로 별동대 30만명을 뽑아 ‘닥치고 평양 공격’을 명령한다. 요동 지역에 있는 수나라 전력이 고구려 수비군의 발을 묶은 상태에서 30만 별동대로 수도 평양성을 치면 될 것이라는 전략이었지. 그런데 별안간 고구려의 최고사령관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대 앞에 나타나 담판을 벌인다. 고구려의 거짓 항복에 거듭 속은 수 양제는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나타나거든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미리 내려둔 상태였어. 고구려 최고위급 인사가 항복 협상을 하러 올 거라는 정보가 사전에 입수됐다는 뜻이지. 그런데도 을지문덕은 적진에 뛰어든 거야.

을지문덕이 적군 사령관과 무슨 협상을 벌였는지는 전해지지 않아. 항복 의사를 표하고 항복 조건을 협의했을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지. 수나라 지휘관들은 수 양제의 명령대로 을지문덕을 잡아 가두려 했지만 ‘사신을 가두는 법은 없다’는 주장에 밀려 그를 돌려보내게 돼. 아무렴 그들이 관대해서 그랬겠니. “항복을 청하러 온 사람을 잡아 가두면 고구려 왕이 뭘 믿고 항복을 하겠느냐?”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커. 수나라 장군들은 을지문덕을 보내준 뒤에야 아차 싶어서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내지만 을지문덕은 쏜살같이 남쪽으로 달려가버렸지. 이미 충분한 시간을 벌었고 적의 약점을 꿰뚫어 보았을 테니까. 수나라 군대의 약점은 을지문덕을 놓친 뒤 수나라 장군들끼리 나눈 대화에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어.

“군량이 떨어졌으니 돌아갑시다.” “아니, 이 많은 병력으로 작은 적을 이기지 못하다니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뵐 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허약한 군대는 ‘굶주리는’ 군대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약한 군대는 굶주리는 ‘대군’이지. 30만 대군이 하루에 얼마만큼의 식량을 먹어치울지 생각해보렴.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뛰어들어 지체한 며칠은 수나라 군대에 그만큼 치명적이었어. 전쟁에서 시간은 그야말로 금이다. 이 시간을 벌기 위해 고구려는 최고 지휘부의 목숨까지 거는 모험을 서슴지 않았던 거야. 을지문덕 같은 거물이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면, 수나라 별동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이 시간을 지체할 리 없었을 테니까.

이후 고구려는 살수대첩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나라는 덩치가 커도 너무 큰 나라였다. 수 양제는 또 쳐들어왔고 이번에는 내부 반란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때 반란을 주도했던 수나라의 병부시랑 곡사정은 고구려로 투항해왔어. 고구려로서는 전쟁을 멈추고 나라를 구한 은인인 셈이었지. 그래도 수 양제는 고구려를 포기하지 않는다.

네 번째 침공에서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은 고구려 해상 교통로의 중심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평양 공격의 채비를 갖췄어. 여기서 고구려는 언제나처럼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서 수 양제가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을 제시한다. 바로 고구려에 몸을 의탁해온 곡사정을 돌려보내겠다는 제안이었어.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권위를 무너뜨린 자의 송환은 수 양제에게 개인적 한풀이를 넘어 고구려가 무릎을 꿇었음을 선전할 수 있는 양수겸장의 효과가 있었지. 비사성에서 함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갈 꿈에 부풀어 있던 수나라 장수 내호아는 별안간 철수 명령을 받는다. 이후 또다시 수 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엿보지만 수나라 백성과 군인들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어.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수 양제는 호위병들에게 목 졸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수나라에 맞선 고구려는 강자를 상대할 줄 아는 지혜로운 약자였어. 여차하면 ‘선빵’을 날릴 줄 아는 무모한 용기를 과시했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저는 똥덩어리입니다”라고 바싹 엎드리며 강자의 비위를 맞추기를 저어하지도 않았다. 강자가 자신이 지닌 강점을 총동원해 쳐들어올 때, 고구려는 상대의 약점을 들여다보았고, 그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기 위해 수뇌부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솔선수범했지. 급기야 자신에게 몸을 의탁해온 적의 반란자, 고구려에게는 은인일 수도 있는 곡사정을 서슴없이 송환하는 비열함까지 감수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가 갖춰야 할 거의 모든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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