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으로 뭉친 4·3 당시 제주도, 미군도 놀랐다

양수연 2022. 4. 20.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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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고통의 역사를 살아낸 한국인은 자립과 자치, 평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4·3 항쟁 당시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제주도의 자치 문화는 미군정이 보기에도 신기했다.
4월1일 미국 하버드 대학 패컬티 클럽에서 ‘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회’가 열렸다.ⓒ양수연 제공

2002년 여름, 나는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당시 살던 집에 친구들이 모여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서울에서 2002 월드컵을 함께 시청하며 분위기가 달아오른 가운데 맥주를 사러 합정역 사거리로 나왔다. 밤 10시가 안 된 시간인데 8차선 대로가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와아~’ 하는 함성 소리가 건물들 벽을 뚫고 튀어나오더니 빈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겼다! 빈 거리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함성은 초현실적 경험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이구나.’ 눈물이 흘렀다.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주체들의 함성을 듣는 초현실적 상황을 다시 겪었다. 나는 지난해부터 미국에서 처음 결성된 ‘재미 제주4·3기념사업회·유족회’를 이끌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면서 항의 시위가 빗발치던 때였다. 미국에서 수십만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하고, 환자들이 병실 부족으로 병원 로비에 쓰러져 있을 때였다.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시신을 보관할 곳이 없어 이삿짐 트럭으로 뉴욕 외곽으로 날라 집단 매장하던 때였다. 교도소 수감자들을 동원해 땅을 파고 그 안에 죽은 자들이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이 중계되는 것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미국에서 진행된 이런 초현실적 현실들이 70년 전 제주 4·3 희생자들이 매립되던 광경과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코로나19 팬데믹은 새롭게 도래할 시대를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다만 나는 제주 4·3 항쟁이라는 사건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엿보고 싶었다.

4·3 항쟁에 관한 나의 사유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으로 다져졌다. 월든은 소로가 1845년부터 1847년까지 물욕과 인습을 끊고 자연을 직시하며 자립 생활을 했던 곳이다. 자립과 자치(Self-Reliance, Automony) 정신이 월든에서 평화롭게 실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고통의 역사를 살아낸 한국인들은 자립과 자치, 평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가치가 내가 사는 미국의 회복에도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948년 5월5일, 4·3 항쟁 후 제주도로 간 미군정 및 국방경비대 요인들.ⓒ제주특별자치도/4·3진상조사보고서

4·3 항쟁 당시 제주도가 그러했다. 제주도의 자치 문화는 미군정이 보기에도 신기했다. 그들은 제주도가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다른 지역과 달리 그들 스스로 치안을 관리하며 자급자족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제주 자치의 근간에는 제주도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해방 직후 제주 사회를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육지의 좌익 세력으로부터 일정하게 독립적인 활동을 하며 온건한 노선을 걸었다. 미군정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직간접적 비호하에 이승만 세력은 제주도의 평화를 파괴하고 제주도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미국은 4·3 학살에 책임이 있다

미국인들도 자립과 자치를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다만 이 자립과 자치는 신자유주의적인 ‘개인의 자유와 번영’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월든’에 나오는 소로의 사유 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나는 제주 4·3의 정신을 ‘월든’과 접목하는 학술 문화 플랫폼으로 ‘월든 코리아(waldenkorea.org)’를 설립했다. 또한 워싱턴 DC에서 양영준 위원장이 이끌던 제주4·3유족회준비위원회를 모태로 재미 제주4·3기념사업회·유족회(이하 ‘재미 4·3유족회’)가 월든 코리아와 함께 창립을 알렸다. 지난해 7월16일 재미 4·3유족회 출범식엔 제주4·3유족회 오임종 회장, 재일본 4·3유족회 오광현 회장, 원희룡 제주도지사, 민주당 오영훈 국회의원, 제주4·3재단 양조훈 이사장,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 제주4·3기념사업회 강호진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재미 4·3유족회의 목표는, 미국이 4·3 당시 제주도에서 자행된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강대국의 패권 전쟁에서 약소국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미국에 전해야 한다. 4·3 항쟁은 이념이 아니라 휴머니즘과 인권의 문제로 미국 대중에게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이 4·3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미군정 비밀문서를 보아도 명백하다. 1949년 1월28일, 미군정 윌리엄 로버츠 고문단장(준장)은 제주도의 공산주의자 활동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600명에 이르는 부대를 제주에 파견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같은 해 3월14일, 주한미군 사절단에 보낸 문서에서 “제주도 작전에 미군 항공기 3대가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제주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던 시기다. 로버츠 단장에 따르면, 같은 해 4월16일에 ‘연대 병력이 (작전 종료로) 제주도에서 육지로 복귀했다’. 그는 한국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서신을 보내 계엄령을 어떻게 시행해야 하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4·3 학살에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개입했다는 증거도 있다. 당시 CIA는 제주도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11월8일, 로버츠 준장은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CIA는 훌륭하다. 그들은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현 대대를 보충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라고 썼다. CIA가 서북청년단을 이용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재미 4·3유족회의 학술 플랫폼인 월든 코리아는 이런 사실들을 미국 시민과 학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해 출범 직후 한국과 미국의 대학생들을 선발하여 월든 코리아 청년 기획위원으로 선정했다. 경희대, 존스홉킨스, 노스이스턴, 보스턴칼리지 등의 대학생들이 4·3 항쟁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 뒤 지난해 9월의 월든 코리아 국제 포럼에 참여했다.

4·3 당시 부친과 두 형제를 잃은 양석희씨(필자의 아버지)가 제주4·3평화공원에 서 있다.ⓒ양수연 제공

미국 시민들을 위한 프로젝트도 있다. 미국 시민이 직접 4·3 항쟁을 강연하는 ‘당신이 듣지 못한 역사 이야기(The History You Never Heard)’ 시리즈다. 지역사회 곳곳에 파고들기 위한 풀뿌리 강연 프로그램이다. 강의자에게 ‘진실 스토리텔러(Truth Storytell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진실 스토리텔러’들은 4~6주 동안 4·3 항쟁에 대한 개별 강의를 들은 뒤 강연에 나서게 된다. 지난해 10월엔 한국을 전혀 모르던 뉴햄프셔 주민인 대니스 호간 씨가 내슈아 공립도서관에서 4·3 항쟁을 주제로 강의했다. 같은 해 12월엔 월든 코리아 청년 기획위원인 김형진씨가 노스이스턴 대학에서 이 강의를 열었다. 이 강의 프로그램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할 것이다. 현재 미국의 주요 도서관에 배포할 월든 코리아 영문 저널도 발행을 앞두고 있다.

재미 4·3유족회는 학계와도 적극 교류하고 있다. 지난 4월1일엔 하버드 대학 패컬티 클럽에서 ‘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회’를 열었다. 하버드 대학, 터프츠 대학 등의 한국학 교수들이 연사로 나섰다. 국제정치를 전공하는 미국 학생들도 대거 초청했다.

유족은 조용히 절망해왔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 때 서울에서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이주했다.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4·3 때 돌아가신 부친과 형제들의 시신을 찾아내고 묘를 돌봐야 한다며 결심을 꺾지 않았다. 제주가 고향인 어머니도 아버지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이니 불쌍히 여겨야 한다며 아버지 편을 들었다. 나는 제주시 북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곳은 4·3 항쟁을 촉발시킨 현장이기도 하다.

4·3 때 세상을 떠난 고 양상규씨(필자의 할아버지).ⓒ양수연 제공

내 할아버지 고 양상규씨는 제주 해안가에서 평범하게 개인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1949년 1월 제주시 도련동의 자택에서 끌려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부친이 끌려가는 것을 봤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남았다. 아버지의 형들도 끌려가 투옥된 뒤 억울한 옥살이 도중 돌아가셨다. 그분들 중 한 사람이 고 양석중씨다. 그는 지난해 불법 군사재판 뒤 행방불명된 다른 피해자 334명과 함께 한국 법정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아버지의 첫째 형인 고 양석구씨는  4·3 당시 일반 재판을 받고 수형 생활 중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와중에서도 맏형에 대한 특별재심을 청구했다. 한국 법원은 지난 3월3일 일반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던 14명에 대해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통령에 당선된 3월10일, 검찰이 14명의 재심에 항고했다. 재심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예정이다. 제주도의 제주4·3유족회와 법률 대리인 박현민 변호사가 이 일을 돕고 있다.

아버지는 제주도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를 나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도 가족들은 4·3 유족임을 주변에 알리지 못했다. 제주도로 전학한 뒤 나는 한동안 방황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집착하는 아버지와 멀어졌다. 중학교 때부터는 난해한 재즈만 들었다. 나름의 반항이었다. 어서 빨리 이 우울한 제주도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형제들의 묘를 만든다며 생업을 마다하고 한라산 중턱을 헤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유족들은 조용히 절망해왔다. 아파도 말을 못했다. 말하면 오해받으니 숨죽여 살았다. 소로가 〈월든〉에서 쓴 ‘현대인들의 조용한 절망(quiet desperation)’이라는 문구가 내 마음에 꽂혔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일 테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4·3 때문에 고향을 향했다. 나도 미국에서 아버지처럼 제주를 향하게 되었다. 조용한 절망을 더는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 4·3 영령의 고통의 함성을 미국 땅에 퍼뜨릴 것이다. 제주 학살에 책임이 있는 미국 땅에서 제주 4·3의 영령이 위로받도록 할 것이다.

양수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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