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야영-광양 백운산] 아침 챙겨 먹었냐며 과자·음료수 건네주신 동네 어르신

글·사진 민미정 2022. 4. 1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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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산불로 백패킹 취소.. 옛 기록을 꺼내보다
드론을 이용해서 백운산을 담았다. 뒤쪽으로 지리산 능선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출근길에 몸을 움츠리게 했던 찬바람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날씨가 포근해졌다. 반가운 봄꽃들의 개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건조한 날씨에 강풍으로 인한 자연발화나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로 인한 실화, 사회에 앙심을 품은 자의 방화 등 연일 크고 작은 산불 소식에 마음이 먹먹했다. 화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불을 끄러 가지는 못할망정 이런 때 백패킹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잡혀 있던 주말 백패킹 계획을 모두 취소했다. 당분간 봄 산행은 웹하드에 저장해 놓은 사진들로 대신하기로 했다.
아직 숲이 메말라 있다. 산에서 야영을 할 때 비화식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날짜별로 저장된 폴더 중에서 봄꽃 산행으로 다녀온 백패킹 폴더를 열었다. 2020년 백패킹 메이트인 김혜연과 스페인 카미노를 인연으로 만난 동생 손상락과 함께 다녀왔던 광양 백운산이었다. 손상락은 백패킹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백린이(백패킹과 어린이의 합성어)’였다. 막 구비한 백패킹 장비를 들고 떠나고 싶어 졸라대고 있던 터였다.

백운산에서 억불봉으로 향하는 길. 잠깐 멈춰섰다. “날씨야 어서 빨리 더 따듯해져라!”
광양 백운산은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과 옥룡면, 진상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222m로 백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국 31곳 중 세 번째로 높다. 섬진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지리산 노고단 다음으로 전라남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반야봉, 노고단, 도솔봉, 만복대 등과 함께 소백산맥의 고봉으로도 꼽힌다.
이른 아침 광양행 첫차를 타고 4시간을 달려 내려갔다. 백운산은 들머리에 따라 8개의 코스가 있는데, 2코스인 진틀마을에서 시작해 신선대를 거쳐 정상을 오른 뒤 전망데크에서 숙영할 계획이었다. 하산은 다음날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백운산 정상 아래 전망데크의 항공뷰. 백패커들이 즐겨찾는 숙영지다.
데크를 전부 차지한 욕심쟁이 백패커들
코로나 발생으로 매화마을 축제가 취소되고, 들머리도 한산했다. 병암산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산수유 나무가 노랗게 봄을 수놓고 있었다. 등산객 몇 명이 장비를 정비하고 있었다. 산장 옆으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완만하던 길은 다리가 풀리기도 전에 된비알이 시작됐다.
따뜻한 봄이 찾아왔건만, 등산로는 여전히 무채색의 살풍경이었다. 너덜 바위와 흙길이 교차되며 끊임없이 오르막이 이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봄 하늘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포근한 날씨에 어느새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다. 재킷을 하나 둘 벗느라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무거운 배낭이 익숙하지 않은 손상락은 너무 힘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김혜연도 덥고 지친다며 앓는 소리를 했지만, 절대 뒤쳐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앞서가던 내가 그들에게 쫓기듯 올라가느라 숨이 벅찼다. 삭막한 풍경 속에서도 초록의 산죽이 있어 그나마 안구의 피로가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신선대에 다다르자 거대한 암릉이 눈앞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신선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갈라져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바위 사이로 난 길을 가뿐하게 올라섰다. 360도로 시원스레 펼쳐진 풍경의 정상이 나왔다.
백운산 쪽으로 이어진 능선길은 공룡의 등처럼 군데군데 암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상 쪽 전망데크에는 벌써 붉은색의 텐트가 보였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등산객이 거의 없어 숙영지가 비어 있을 줄 알았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잰걸음으로 내달렸다. 능선길이라고는 하지만, 고도를 낮췄다가 다시 오르느라 숨을 헐떡였다.
백운산 정상에서 단체 사진. 뒤쪽은 신선대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나무 계단을 올라서니 전망데크는 이미 몇 동의 텐트로 채워져 있었다. 공간이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데크 중간을 가로지르며 일렬로 설영한 것이다. 지인이 올라온다며 자리를 맡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다른 백패커들에 대한 배려가 아쉬웠다. 데크 전체를 통째로 차지한 것이 얄미웠지만, 그들 사이에 끼어 승강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노랭이봉 능선 쪽으로 숙영할 만한 곳을 훑어보았다. 차라리 잘 됐다. 밤새 바람에 시달리느니, 조용한 능선 어딘가에 자리 잡는 것이 이야기를 나누기 좋을 수도 있겠다.
해가 지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오랜만에 챙겨온 드론을 꺼냈다. 아직 초보라서 강한 바람이 걱정됐지만, 알록달록한 텐트와 멋진 전망을 담고 싶었다. 벌거숭이 산이지만, 멀리 지리산 능선까지 더해 제법 웅장한 항공뷰였다. 백패커 커플이 올라왔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정상을 밟은 후, 노랭이봉 능선 쪽으로 내려갔다. 숙영지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몰라 우리도 배낭을 멨다. 암릉 꼭대기에 세워진 정상석 옆에 섰다. 눈이 시릴 만큼 차갑고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북쪽으로 지리산 능선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한기가 느껴지자, 서둘러 능선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멋진 일출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완만한 능선 위로 첫 번째 공터에는 커플이 자리 잡았다. 공터를 하나 더 지나 널찍한 곳에 배낭을 내렸다.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지만, 하룻밤을 보내기엔 충분히 아늑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선명했다. 아직 백패킹이 생소한 손상락 덕분에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레 백패킹의 매너로 이어졌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최우선이다. 당일 등산객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숙영지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백패커라면 누구나 멋진 곳에서 머물고 싶어 한다. 나 혼자, 우리팀만 독차지할 것이 아니라, 자리를 내주는 배려도 필요한 것이다. 이기심이 만연한 요즘 세상이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백린이만큼은 함께 즐길 줄 아는 매너를 가졌으면 했다.
일출은 볼 수 없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산이 길지 않아 빵과 과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재빨리 숙영지를 정리했다. 너무 일찍 봄을 찾아 떠나왔던 것일까? 아직 겨울의 여운이 남아 있는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억불산 갈림길에 닿자 등산객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둘러 철수하길 다행이었다.
구황마을로 내려왔는데, 처음 본 어르신이 초코파이를 건네주셨다. 허기도 마음도 든든하게 채워졌다.
동네 어르신이 건넨 초코파이와 음료수
고도가 낮아질수록 봄의 전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낙엽 틈새로 새싹들이 빼꼼 솟아오르고 있었다. 잔나무 가지에 맺힌 봉오리들은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등산로가 끝나고 구황마을의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매화나무가 나타났다. 나뭇가지마다 갓 튀겨낸 연분홍 팝콘 같은 매화 꽃잎들이 맺혀 있었다. 놀이공원에 놀러 온 어린아이처럼 여기저기 매화나무를 옮겨가며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매년 축제가 열리던 매화마을만큼의 웅장한 규모도 아니고, 만개한 것도 아니었지만, 봄을 만끽하기엔 충분했다.
구황마을 매화 밭에서 봄을 만끽하는 김혜연.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데 동네 어르신께서 배낭을 보시고는 산에서 잤냐며 말을 건네오셨다. 멀리 서울에서 찾아와줘서 고맙다며,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바로 앞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양손에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들고 나오셨다. 가벼운 아침식사로 허기가 졌던 참이었는데 너무나 감사했다. 게다가 시내로 나가는 택시까지 불러 주셨다. 내년에도 또 찾아오라는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산 위에서 누군가의 이기심 때문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기운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 내렸다. 코로나가 사라지면 꼭 다시 찾아오겠다며 감사 인사를 드리고 택시에 올라탔다. 어서 코로나가 끝나고 새봄이 왔으면 좋겠다.
구황마을로 이어지는 하산길에는 사시사철 푸르른 대나무 숲이 산객들을 배웅하고 있다.
산행 정보
첫째날
진틀마을(병암산장) - 신선대 - 백운산 정상 - 능선 숙영지(4km, 약 2시간 소요)
둘째날 숙영지 - 억불산 갈림길 - 구황마을(10.5km, 4시간 반 소요)
백운산 등산로
1코스
(4.9km / 2시간 10분) 논실 - 한재 - 신선대 - 정상
2코스 (3.3km / 2시간) 진틀 - 병암 - 진틀삼거리 - 정상
3코스 (5.3km / 2시간 50분) 용소 - 백운사 - 상백운암 - 정상
4코스 (9.5km / 4시간 50분) 동동마을 - 노랭이봉 - 억불봉삼거리 - 정상
5코스 (11.8km / 6시간 10분) 성불교 - 형제봉 - 도술봉 - 한재 - 신선대 - 정상
6코스 (3.9km / 2시간 10분) 어치(내회) - 매봉삼거리 - 정상
7코스 (10.3km / 5시간 30분) 구황 - 노랭이재 - 억불봉삼거리 - 정상
8코스 (19km / 10시간 20분) 청매실 농원 - 쫓비산 - 매봉 - 정상
억불봉 코스 (2.7km / 1시간) 제철수련관(옥룡면) - 노랭이재 - 억불봉 헬기장 - 억불봉
종주코스 (50km / 24시간 20분) 백운저수지 - 비봉산 - 계족산 - 깃대봉 - 형제봉 - 도솔봉 - 따리봉 - 한재 - 정상 - 억불봉 - 노랭이재 - 구황 - 만불사
참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교통편
대중교통 광양터미널에서 진틀마을까지 21-3번 버스 이동(하루 15회 운행).
자가용 진틀휴게소, 전남 광양시 옥룡면 신재로 1653.(백운령 민박가든 앞 주차 무료)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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