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심청이의 아버지는 심봉사가 아니다

엄민용 기자 2022. 4.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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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효녀 심청’ 하면 자연스레 그의 아버지 ‘심봉사’가 떠오른다. 예전 같으면 당연한 말로 들릴 얘기지만, 요즘에는 한 소리 듣기 딱 좋다. 심봉사에서 ‘봉사’는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심청이의 아버지는 ‘심학규(沈鶴奎)’다. 이렇게 멀쩡한 이름을 놓아두고, 시각장애의 고통을 담고 있는 말을 그의 호칭이나 지칭으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

‘봉사’는 원래 조선시대 때 관상감(예조에 속해 천문, 지리, 기후 관측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과 사역원(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등에서 일하던 종8품의 벼슬이었다. 그런데 이 봉사 직책에 시각장애인이 많이 기용되면서 벼슬 이름이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이처럼 말은 세월 속에서 변화를 거듭한다. 속되게 쓰던 말이 일상어가 되고, 흔히 쓰던 말이 삼가야 할 말이 되기도 한다. 귀머거리, 장님(봉사·소경), 벙어리 등도 그런 말이다. 이들 말은 하나같이 사람을 깔보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귀머거리는 청각장애인, 장님·봉사·소경은 시각장애인, 벙어리는 언어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누구는 “‘장님 문고리 잡기’ 같은 속담도 있는데, 왜 장님을 못 쓰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장애를 하늘의 재앙으로 여기던 고릿적 시절의 표현이다. 개개인 모두가 세상의 주인으로 존엄함을 대접받는 세상에서는 쓸 수 없다. 게다가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써도 충분히 글맛을 살릴 수 있음에도 ‘장님’ 운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냉가슴’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 속으로만 끙끙대고 걱정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그 앞에 굳이 ‘벙어리’를 써야 할 까닭이 없다. 냉가슴은 누구나 앓는다. ‘벙어리장갑’도 마뜩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를 북한에서는 ‘짜개장갑’이나 ‘통장갑’으로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도 요즘 들어 ‘손모아장갑’과 ‘엄지장갑’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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