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20화)[연재소설]

에린 2022. 4. 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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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세라가 카페에 들어갔을 때 아카시는 등을 보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바에 앉아 과일꼬치가 담긴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안경을 코끝에 걸친 중년 여성은 오늘도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낯선 남자가 턱을 만지며 책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가 두꺼운 책 몇 권을 빼서 원목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음료도 시키지 않고 책만 마음대로 꺼내 보는 게 의문스러웠다.

“언제 왔어요?”

아카시가 젖은 손을 털며 물었다. 세라는 과일꼬치를 그에게 건네며 비니를 쓴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손님 알아요?”

갑자기 아카시가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회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책 한 권을 들고 바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구릿빛 이마는 반질거렸고 짙은 눈썹과 성긴 턱수염이 이국적이었다.

“캡틴, 여기는 세라예요.”

“아, 장기투숙하신다는 그분?”

캡틴이란 말에 세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서울 가셨다고 해서 손님인 줄 알았어요.”

“아, 어제 왔어요. 반가워요.”

캡틴은 오사카로 돌아온 후에는 언제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이면 일찍 나와 책장정리를 하는가 하면 카페 밖에 늘어서 있던 화분을 걸레로 닦아주었다. 손님이 한가할 때면 어느새 골목으로 나가 두 청년이 하는 다코야끼 집에서 주변 상인들과 얘기했다.


세라가 다니던 어학원도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난바나 도톤보리에는 식당이 많아 아르바이트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일자리를 얻으면 월세로 옮겨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다인실에서 약을 먹는 게 불편했고, 어디가 아픈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둘러대는 게 쉽지 않았다. 어학원 근처의 월세는 만만치 않았다. 정임에게 보낼 생활비까지 계산하면 모아둔 돈이 언제 바닥날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 전 숙소에 원룸 하나가 비었다는 아카시의 말을 듣고 마음이 동했다. 그동안 캡틴의 느긋한 말투와 행동을 보니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았다.

캡틴은 작업용 하얀 목장갑을 벗으며 세라에게 말했다.

“학원은 다닐 만해요?”

“네, 재밌어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일본어여서 2년 정도 배웠거든요. 다시 공부하니까 금세 배웠던 것들이 기억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어느 나라든 현지어를 쓰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죠. 적어도 장기적으로 거주할 거라면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예요.”

“그런데, 저기 등은 뭐예요?”

세라는 손가락으로 유리창 밖을 가리켰다. 돔 천장에 매달린 타원형의 붉은색 등에는 굵은 검은색 붓글씨로 黑門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흑문이라고 적힌 등 말이죠? 구로몬이라는 말이 원래 검은 문이라는 뜻이에요.”

“검은 문이요?”

“예전에 이 근처에 절이 있었는데 입구에 검은 문이 있었대요. 그 이름을 그대로 따서 시장 이름을 지었대요. 그런데, 세라 씨는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화장품 회사에 다녔어요.”

“아, 그래요? 설마 여기 오느라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죠?”

그의 말에 세라는 씁쓸하게 웃어넘겼다.

아카시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프렌치토스트를 그녀 앞에 놓고 캡틴에겐 얼그레이를 내려놓았다.

“혹시, 근처에 알바 자리가 있을까요?”

세라가 넌지시 물었다.

“음… 알바라….”

캡틴은 핸드폰 연락처를 위아래로 스크롤 했다. 그러다 무릎을 쳤다.

“세라 씨, 라멘집에서 홀 서빙 해볼래요?”

그는 대답할 틈도 없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일본어로 통화하는 내내 웃음 띤 얼굴이었다. 전화를 끊고 라멘집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라멘집 사장은 오래된 일본인 친구라고 했다. 마침 한 인플루언서의 SNS에 라멘집이 소개되면서 한국 손님이 늘어나 친구가 한국어가 가능한 알바생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세라는 캡틴 덕분에 다리품을 팔지 않고 일자리를 얻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숙소에서 라멘집까지는 도보로 출퇴근하기에 충분했다. 구르몬 시장에서 군것질만 참는다면 하루 지출이 거의 없는 날도 있었다. 라멘집에서 글리코상 대형 간판과 도톤보리 강이 한눈에 보였다. 식당 내부는 주방을 에워싼 카운터 자리와 넓지 않은 홀에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을 닦고 나무젓가락을 꽂아놓고 나면 손님 맞을 준비는 끝났다.

세라가 출근할 때면 지난밤 네온사인 불빛 아래 출렁이던 도톤보리의 강은 잔잔해졌다. 취객들로 넘쳐나던 식당 거리는 까마귀 몇 마리가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 부스러기를 부리로 쪼아댔다. 패기 넘치던 청춘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정갈한 모습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온 도회적인 사람들이 식당 앞을 오갔다. 글리코상은 여전히 두 손을 벌리고 어딘가를 향해 뛰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되면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교대했다. 사장은 손님이 몰리기 전에 직원들에게 뜨끈한 시오라멘을 만들어줬다. 종일 라멘 냄새를 맡다 보면 물릴 법도 한데 세라는 한 끼를 때우고 가는 게 편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숙소에 돌아와 카페에서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갈무리했다.

아카시에게 도경이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원룸으로 옮겼다는 사실과 빈 원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깐깐한 도경이 이곳 원룸을 택했다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학원과 거리가 있긴 했지만, 캡틴이 한국인이라 월세 협상에 조금은 유리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먹은 김에 캡틴에게 원룸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뜸을 들이거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기색 없이 계약조건을 알려줬다. 현지 월세보다 저렴한 조건이었다.

원룸은 숙소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주로 장기투숙객들이 머무는데 캡틴도 거기서 머문다고 했다. 캐리어만 옮겼을 뿐인데 새집에 가구를 들여놓은 것처럼 설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거처도 원룸으로 옮기고 한꺼번에 미뤄두었던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매일 하던 정임과의 통화도 일을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잊고 있던 공용 노천탕이 생각났다. 옥상에 있다고 말만 들었지 직접 이용해 보지는 못했다. 일과 숙소가 해결되니 노천탕에 몸을 담글 여유도 생겼다. 작은 탕 안에 들어가 뻥 뚫린 하늘을 쳐다보면 서울의 하늘을 이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세라는 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과일꼬치 가게에 들렀다. 과일꼬치를 담은 봉지를 들고 화장품 가게를 지나 카페로 향했다. 그러다 뒤로 돌아가 양손으로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어 화장품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매장은 공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진열장에는 간간이 유리에 담긴 제품들만 눈에 띄었고 홍보하거나 호객을 위한 어떤 광고도 제품도 딱히 보이질 않았다. 호기심에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라디오에서 엔카만 가늘게 흘러나왔다. 진열대에는 갈색 유리병들이 있었는데 호리병 모양과 직사각형, 원통형의 모양 등 향수병처럼 다양했다. 일본어로 된 설명서를 훑어보다가 오가닉을 영문으로 쓴 굵은 펜글씨 아래 ‘가라구토미세스’라고 쓰여 있는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스킨 토너나 에센스 타입의 화장수처럼 보였지만 그 또한 정확하지는 않았다. 세라는 내용물이 궁금했다. 핸드폰을 꺼내 설명서를 찍는 동안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라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캡틴은 마른행주로 머그컵을 닦고 있었다.

“퇴근하는 길이에요? 일은 어때요?”

의자에 털썩 앉는 세라에게 캡틴이 물었다.

“네, 사장님도 잘해주시고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사장님은 오사카에 오신 지 오래됐어요?”

세라는 과일꼬치에서 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여기는 한 7년 됐나? 사실 서울 북촌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처음 오사카에 왔다가 여기 시장을 와보고 꽂혔어요.”

“어떤 점이요?”

“일본답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아, 근데 오해 말아요. 일본을 디스하는 건 아니니까. 뭔가 간결하고 단조롭고 깔끔하고 복잡하지 않아서 느껴지는 지루함 같은 거요. 난 그런 게 싫거든요. 그런데 이곳은 다르더라고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는 뭐 그런 당연한 진리를 일깨워준 곳이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세라 씨는 어때요. 벌써 가족이 그립거나 하진 않아요?”

“그, 그립긴요, 공부하고 라멘집 알바 하고 나름 바빠요. 저 다음 달에는 상급반으로 옮겨요.”

세라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잘됐네요. 그러면 선택할 수 있는 알바 자리가 많아질 거예요. 아, 그리고 그냥 캡틴이라고 불러요. 여기선 다 그렇게 불러요.”

그때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캡틴 상!”

초록색 두건을 두른 할머니가 숨을 헐떡거리며 두리번거렸다.

할머니는 캡틴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누, 누가 가게에 들어왔었어! 내가 라디오를 틀어놨었는데 꺼져 있지 뭐야.”

“요시에 상 좀 진정하세요.”

캡틴은 숨차하는 그녀에게 물 한잔을 건넸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제야 옆에 있는 세라를 의식했는지 시선을 돌렸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요시에의 두 눈이 점점 커지더니 세라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니… 코… 리?”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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