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까지 꽃의 속도로..지구를 돈 내게 봄이 가장 아름다운 곳, 한국

한겨레 2022. 4. 1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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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ESC] 노동효의 지구둘레길 봄꽃 여행
경남 거제에서 강원 고성까지
산동마을 등 펼쳐진 '봄꽃 로드'
산수유·벚꽃·매화의 향연
꽃향기 맡으며 '화중산책'
진해 여좌천 벚꽃길. 노동효 제공

지구둘레길 지나며 봄이 무척 아름다운 나라를 경험했다. 남쪽 국경에 꽃이 피면 한달 사이 갖은 꽃이 북상하며 전 국토를 뒤덮었다. 봄바람에 꽃비가 흩날리기까지 했으니 천상 같았다. 하여 꽃 피는 속도에 맞춰 남쪽에서 북쪽까지 여행한 적이 있었더랬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행로였다. 봄이 왔다. 다시 그 길을 가고 싶었다. ‘위시리스트’를 만들기보다 즉각 해치우는 게 낫다고 여겨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 참, 봄이 가장 아름다웠던 나라가 어디냐고? 한국이다.

구례 산수유 마을. 노동효 제공
광양의 매화마을. 노동효 제공

한해에 한번 보는 장관

낡은 차량에 침낭, 매트, 외투를 욱여넣고 길 떠나 지리산 산동마을에 닿았다. 산수유나무를 갖고 시집온 새댁 고향이 중국 산동(산둥)이라 붙은 이름이라던가? 세대를 거듭하며 새끼를 쳐 노란 꽃이 마을을 뒤덮었다. 낮엔 꽃그늘을 쏘다니고 해 저문 후엔 산수유꽃 핀 공원을 산책하다가 지리산에 깃들어 잠들었다, 노란 꽃비 내리는 꿈을 꾸며.

오늘은 매화를 보러 가야지. 광양으로 갔다. 섬진강 옆에 끼고 다압면으로 들어서자 꽃향기 그윽했다. 매화마을은 안갯속 풍경, 우중 산책이 아니라 화중 산책이구나. 한발 물러나 내려다보면 눈 내린 겨울 같았다. 봄바람이 꽃을 흔들어 향기를 상춘객 옷자락에 내려놓았다. 한해에 한번 보는 장관을 보고야 말겠다고 몰려든 상춘객들 봉오리를 벗듯 두꺼운 외투를 벗어젖히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날 진해 여좌천으로 갔다. 언론에선 평년보다 일찍 벚꽃이 핀다고 했다. 예정일보다 사나흘 지났는데 봉오리만 부풀었을 뿐. 결국 꽃 필 때까지 닷새를 웅크린 채 기다려야 했다. 봄비 지나간 후 여좌천에 벚꽃이 폈다. 꽃잎이 초속 5㎝로 하강하며 떠다녔다. 그러다 내려앉았다. 수면 위에, 징검다리 위에, 고개 든 내 입술 위에도. 나는 먼 길 떠났다가 귀향한 연인을 본 듯 설레고 달아오르고 사랑으로 차올랐다. 참 아름답구나, 당신은.

연분홍빛을 보고 나니 눈이 다른 빛을 찾았다. 거제도에선 진달래를 볼 수 있지. 대금산에 올랐다. ‘쇠를 생산했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지만 ‘비단 두른 산’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봄이면 보랏빛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으니까. 진달래가 봉오리를 빠져나올 땐 손대기만 해도 찢어질 듯 얇은 종잇장 같다. 그래서일까? 겨울의 감시를 피해 꼬깃꼬깃 숨겨온 ‘봄의 밀서’ 같다. 바람이 밀서의 내용이 궁금한지 흔들다가 지나갔다.

낙동강 따라 북상했다. 학포 수변공원에서 남지 유채밭까지 이어지는 지방도 따라 벚나무가 한껏 부풀며 하염없이 꽃잎을 떨어뜨렸다. 작은 우박처럼 차도를 굴러다녔다. 노란 유채밭에서 한나절 보내고 해 질 무렵 우포늪에 닿았다. 벚꽃과 벗하여 술 한잔하고 봄을 부둥켜안은 채 잠들었다.

아침 우포늪 둘레길을 걸었다. 평일이라 인적 드물었다. 나비, 꽃, 새들과 인사하며 걸었다. 덤불 거니는 너구리를 만나기도 했다. 왕버들 나뭇잎 돋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연둣빛 새순이 꽃보다 아름다웠다. 봄볕에 살 태우며 10여㎞를 걷고 돌아와 선루프 창 열고 쉰다는 게 잠들었다. 깨어 얼굴을 비비는데 꽃잎으로 가득했다. 이생처럼 가벼워서 내 볼에 내려앉는지도 몰랐구나!

창녕 우포늪. 노동효 제공
낙동강변 남지 유채밭. 노동효 제공
거제도 대금산에서 바라본 남해안 풍경. 노동효 제공
바르트와 아르트. 노동효 제공

벚꽃 백릿길을 따라

해인사 있는 합천군으로 들어서자 벚꽃 백릿길이 시작되었다. 피고 지며 흩날리는 게 눈발인가, 꽃인가, 부처인가. 당신이 내 안에 피어나던 순간, 순간이 다 꽃이라며 타.다.닥 피었다. 겨우내 끌어안고 있던 일천칠백 공안 다 풀었다고 할.할.할 터졌다. 합천 지나 함양까지 꽃길이 이어졌다.

덕유산 휘돌아 금산으로 갔다. ‘마당 있는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박태기나무가 밥풀 같은 봉오리를 뜸 들였다. 다음날 대전 사는 ‘로켓 박사’를 찾아갔다. 술 마시며 달 탐사와 화성여행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밤새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날 고흥으로 출장 갈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잠들기 전 조동흠의 ‘우주’라는 시를 떠올렸다. ‘우주라는 말/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인가/ 집 하나 없이/ 거리를 떠돌아도/ 모든 존재는 돌아갈 집이 있다는 말/ 그 말/ 우주.’

대청호 꽃길 지나 문경으로 갔다. 유수산장 주인은 양이 새끼를 낳았다며 의정부로 간 후라 빈집에 객만 깃들였다. 봄바람이 풍경을 흔드는 동안 뜰엔 매화가 폈고 뒷동산엔 진달래가 번졌다. “그새 진달래가 폈다고?” “제가 데리고 왔죠!” 밤바람이 풍경을 간지럽히는 새벽이 지나고 길을 나섰다. 대관령을 넘는데 아내로부터 소식이 왔다. “벚꽃이 폈어!” 집 나올 때,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는 그이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 앞 벚나무에 꽃이 피면 돌아올게!”

한국 최북단 도시, 속초에 닿았다. 북쪽으로 더 이상 도시는 없다. 공룡 이빨처럼 뾰족한 울산바위, 푸른 호수, 바다가 어우러진 최북단 도시는 지구 최남단 파타고니아의 도시를 닮았다. 푼타아레나스, 엘찰텐, 우수아이아 같은. 벚나무 아래서 아내를 만나 함께 길을 나섰다. 영랑호변 따라 연분홍이 띠를 둘렀다. 북상하는 꽃과 작별인사 하려면 서둘러야겠구나.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북상했다. 가진 지나 송죽교를 건너며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솔숲이 있는 곳이었다. 처음 그 숲에 들어섰을 때를 기억한다. 해변 따라 2㎞에 달하는 숲이었다. 아쉬웠다. 숲과 바다 사이를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종종 찾았는데, 이날은 전과 달리 바다가 훤했다. 설마? 핸들을 꺾어 샛길로 들어섰다. 철조망이 걷혔다!

해변에 외국인 둘이 흔치 않은 장비를 트렁크에서 꺼내고 있었다. “헬로?” 그들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시꾼이 아니라는 걸 밝히는 게 좋을 듯했다. “안녕! 내 이름은 로, 여행작가야.” 두 사람 표정이 편해졌다. “금속 탐지기니?” “응.” “뭘 찾는데?” “한국전쟁의 흔적과 북한에서 떠내려온 물건을 찾아. 오늘 보물을 발견했어!” 바르트와 아르트는 녹슨 탄피들과 북한에서 생산된 제품을 보여주었다.

“취미 삼아 이 작업을 시작했어. 북한에서 떠내려온 물건을 발견하면 상상하곤 해. 이 음료수는 꼬마 아이가 마셨을까, 할머니가 마셨을까? 북한은 가깝고도 먼 나라야. 정치에 대해 모르지만 반쪽짜리 평화가 아니라 온전한 평화가 이뤄지면 좋겠어. 남북이 함께 발전시키고 서로 도우면 훨씬 더 놀라운 나라가 될 거야. 통일 한국, 생각만 해도 멋져!”

바르트가 올린 유튜브 동영상에 따르면, 친구가 김일성대학에서 연수했는데 북한 학생들이 남한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더라고. “특히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 남한이 어땠는지 많이 물어봤어. 남한에 대해 얼마나 궁금해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 느껴졌지. 사진을 보여달라고도 하고. 직접적인 접촉이나 사진이 없으니 남한이 어떤지 그려내기가 어려운 거지. 그래서 많은 사진을 보여줬어. 보며 꽤 행복해하는 것 같더라. 우와 저게 우리나라야?”

대진 지나 출입신고서를 작성했다. 국경엔 개나리, 목련, 벚꽃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통일전망타워에 올라 북쪽을 보았다. 나는 아프리카 떠나 아시아로, 베링해협 건너 아메리카에 발 닿은 후 파타고니아까지 내려갔다가 더 이상 갈 곳 없는 바다와 마주친 인류의 심정이 되었다. 디엠제트(DMZ·비무장지대)는 차갑고 거친 바다 같았다. 북한이 쇄빙선으로 뚫고 가야 닿을 수 있는 남극 같았다.

‘봄. 당신과 하루라도 더 지내고 싶어서 마중 나가 보름간 뒤따랐는데 이젠 따라갈 수가 없어. 당신은 개성에서, 원산에서, 개마고원에서도 꽃을 피우겠지.’ 꽃과 연두는 북상하고 나 홀로 남은 처지가 되었다.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우는 모습을 걸음마 늦은 꽃봉오리가 바라보았다.

통일전망대 방문객들이 쓴 쪽지. 노동효 제공
꽃봉오리 너머로 보이는 북녘땅. 노동효 제공

가장 거대하고 영롱한 꽃

유목민 기질을 타고난 이 땅의 여행자들은 꿈꾼다. 제 차를 몰고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떠나는 여정을. 지금도 길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나 산둥반도까지 ‘선박’에 차를 싣고 간 후 여행하는 법. 근데 한국이 섬나라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지?

‘해외’라는 말이 있다. 바다 해, 바깥 외. 주로 다른 단어와 합쳐 쓰인다. 해외여행, 해외진출, 해외문물, 해외연수, 해외순방. 타국과 육지가 잇닿지 않는 ‘섬나라’에서나 쓸 단어다. 그걸 한국인이 쓴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단어일 수도, 광복 후 일본 서적을 번역하면서 넘어왔을 수도 있으리라. 한반도는 섬이 아니다. ‘국외’가 옳다. 그런데도 ‘해외’를 이질감 없이 사용하는 건 디엠제트가 또 다른 이름의 바다이기 때문일까? 언어는 존재의 집, ‘해외’가 우리를 가두기 전 우리가 먼저 ‘해외’란 철조망을 걷어내야 하리.

아직 이루지 못한 ‘위시리스트’가 있다. 봄꽃의 뒤를 쫓아 백두산 지나 핀란드까지 간 후 지구에서 가장 거대하고 영롱한 꽃, 오로라를 보는 것!

글·사진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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