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떠올린 '교'통사고

한겨레 2022. 4. 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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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그림은 우연히 들른 손님처럼 ‘쓱’ 다가왔다. 서른살 무렵 유학 시절이었다. 걸어서 통학하던 길 중간에 런던국립미술관이 자리했던 것이 계기다. 43번 방에서 만났던 반고흐의 <해바라기>와 <삼나무가 있는 밀밭>. 충격이었다.

작품의 조형미에 반한 게 아니었다. 반고흐가 캔버스 위에 찍어 바른 유화 붓 터치의 거칠게 회오리치는 질감 때문이었다. 내 망막에 맺힌 매체는 유화 물감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작품 앞에서 격렬하게 요동쳤음 직한 반고흐의 감정을 캔버스 위에 발린 유화의 춤사위 속에서 느끼고야 말았다. 아니, 물감이 감정을 외치다니. 그것도 100년 전 반고흐가 가졌을 법한 정서를. 이건 뭐지? 그날 그 감흥은 요즘 ‘덕후’들이 말하는 ‘덕통사고’ 딱 그거였다.

지난 주말에 우리 학교 아이 10명을 데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을 찾았다. 그렇다. 무려 ‘현대미술관’ 말이다. 아침 8시. 미술관을 가겠다 자원한 ‘고귀한’ 아이들을 12인승 스타렉스에 태우고 2시간 운전하여 이동했다. 이게 어디냐 싶다. 국립현대미술관 3개가 모조리 서울 수도권에 몰려 있었는데, 2018년부터 충북 청주에 번듯하게 하나가 들어선 것이다.

5층 전시관에 들어서기 전 아이들에게 ‘현대미술 예방 주사’를 놓아줬다. 그냥 입장했다가는 ‘이게 뭐지’ ‘말이 돼?’만 연발하다 나올 게 뻔하다. 피에로 만초니의 ‘똥 통조림’ 작품 사진을 보여줬다. 이탈리아 예술가가 1961년에 만든 것으로 ‘신선하게 보존된’ 작가의 똥 30g이 담겨 있다. 90통을 만들었는데, 당시 개당 판매가는 4만원 정도였다. “얘들아, 이 작품은 10년 전쯤 한 경매에서 4억5천만원에 팔렸단다. 그러니까 미술의 대상이 꼭 아름다움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젠 할 수 없겠지?”

이러한 방식으로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10가지 관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줬다. “왜 물감은 꼭 사물을 묘사해야 하지? 반대로 생각해보자. 그냥 색깔이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될까? 표현 소재가 왜 반드시 물감이어야 하지? 버려진 합판이나 녹슨 쇠붙이여서는 안 될까? 저 전시관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가보자.” 아이들 표정이 덤덤하다. 내 뜻이 전달된 건가, 아닌가?

두루 다녀보니 런던국립미술관은 중세 초기 미술에서부터 후기 인상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700여년 동안 세기별로 고른 수준의 소장품을 갖춘 유럽 최고의 미술관이었다. 일반 관람객이 미술관 안내도에 적힌 전시관 번호를 쫓아 충실히 감상했다면 그는 이미 ‘유럽 미술사’라는 긴 동굴을 통과한 사람이 된다. 입장료가 무료다. 나처럼 가난했던 유학생에게는 이 점이 중요하다. 좋아했던 작가, 관람실, 미술사조나 시대 관련 전시실을 몇번이고 찾아가서 질리도록 그림을 바라볼 수 있었다.

파리의 퐁피두센터는 12만여점의 현대미술 작품을 소장 전시한다. 건물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각종 파이프를 죄다 밖으로 드러낸 구조로 유명하다. 렌초 피아노의 건축 디자인 자체가 도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촉구’하는 모양새다. 나는 이 미술관 5층에 전시된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 그들은 그 전시실에 걸려 있음으로써 이제 막 ‘작품이 되어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말할 수 없이 조잡하거나 기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들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연하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몸짓이 미술관 안팎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퐁피두센터에서 느꼈다.

저술가 박홍순은 <미술관 옆 인문학>에서 유명 미술 작품과 인문학 고전들 사이를 넘나들며 새로운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스가 그린 <쾌락의 동산>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에 빗대어 견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재미난 상상이 가능해진다면 여러 분야에 걸쳐 ‘덕’통사고를 열번이라도 당하고 싶다. 아니지, ‘교(敎)통사고’라 해야 할까? 역사, 문학, 미술 콘텐츠와의 우연한 만남이 아이들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교육자인 우리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관람을 마치고 몇장의 활동지를 나눠 주자 아이들은 20분 가까이 진지하게 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하나를 떠올리고, 그것을 친구에게 전화로 설명하듯 풀어보라’ 했던 항목에 대한 답변 가운데 걸작 하나가 나왔다. “최소영 <푸른 풍경>, 찾아봐. 청바지로 만든 게 다른 작품보다 노력한 것 같아. 아름다워. 그니까, 네가 와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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