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프로스펙스가 나이키와 맞짱?..찐덕후가 줄을 섰다 [라인업]

한경진 기자 2022. 4.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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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줄서기, 라인업!]
#오늘의_줄서기: 나이키 말고, 프로스펙스라고?
갈 데까지 간 스니커 덕후들, 프로스펙스 오픈런 참전
토종 운동화 브랜드에 K-감성 덜어내자 벌어진 일

조선일보 ‘세상의 모든 줄서기, 라인업’입니다. 텍스트 기사로 전했던 ‘라인업’ 코너가 유튜브로도 진출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각자 다른 콘텐츠를 만들던 기자와 피디가 좌충우돌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이 줄 서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경제·사회 인사이트는 기사로 담아가시고, 핫한 현장 분위기는 유튜브 영상으로 느껴보세요. ☞유튜브 바로가기 [EP.2 (나이키 비켜!!) 한정판 운동화 전쟁 : 리셀? 자기만족?] https://youtu.be/iXhapfzD0S4

프로스펙스는 구린가, 안 구린가.

이건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얘기. 한 운동화 마니아 커뮤니티에서 ‘프로스펙스 논쟁’이 벌어졌다. 국산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에서 한정판 운동화 ‘마라톤 220’ 출시를 예고하자, 마니아들 사이에서 ‘취향 싸움’이 일어난 것. 온라인에선 ‘어딜 감히 프로스펙스가 나이키·아디다스에 비비느냐’는 쪽과 ‘그동안 무시했던 한국 브랜드를 다시 보게 됐다’는 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4050세대에게 ‘추억의 브랜드’인 프로스펙스는, 이처럼 MZ세대 운동화 마니아 사이에선 ‘양가적(兩價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오묘한 상표다.

그런 프로스펙스는 태극기 나부끼던 삼일절, 서울 여의도 백화점 ‘더현대 서울’ 한복판에서 운동화 ‘마라톤 220’을 한정 발매하며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인기 캐릭터 ‘잔망루피’ 굿즈(goods·관련 상품) △뮤지션 박재범이 만든 전통 소주 ‘원소주’와 격돌했다. 국산 캐릭터·한국 가수가 만든 소주·토종 스포츠 브랜드가 ‘K-오픈런’으로 맞붙는다니! 국경일 줄 서는 마음 한 켠이 애국심으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넘어 심지어 프로스펙스까지 오픈런 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①‘뽀롱뽀롱 뽀로로’ 캐릭터 ‘잔망루피’ ②박재범 소주 ‘원소주’ ③‘프로스펙스’ 한정판 운동화 ‘마라톤 220′

이날도 소비의 최전선, 줄서기 장소에선 흥미로운 광경이 여럿 펼쳐졌다. △취향으로 헤쳐모인 사람들 △공간 비즈니스의 현재와 미래 △소비자에게 ‘K-○○’ 마케팅이 갖는 의미까지…. 사람들이 매장 앞에 줄을 서고 지갑을 여는 긴 여정 속에 신선한 얘기들이 펄떡이고 있었다.

프로스펙스는 최근 스니커 유튜버 와디와 협업해 한정판 운동화를 출시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서 10년 간 일했던 직장인 와디(본명 고영대)는 운동화가 좋아서 퇴사한 뒤 '덕업일치'를 이룬 인물이다. 그는 현재 국내 최대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와 스트릿 패션 브랜드와 문화 콘텐츠를 발굴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이키도 아닌데…” 프로스펙스 오픈런, 실화?

백령도에서 해산물 양식업을 하는 장모(41)씨는 지난 2월 28일 밤 충북 진천의 스니커 마니아 이모(37)씨와 인천에서 접선, 이튿날 오전 6시쯤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도착했다. 딱 100켤레만 생산됐다는 프로스펙스 한정판 운동화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몇년 전 스니커즈 출시 행사에서 여러차례 마주치면서, 운동화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 사이가 됐다.

삼일절 ‘프로스펙스 마라톤 220’ 대기줄은 새벽부터 1000여명이 몰린 ‘원소주’ 대기 인원에 비하면 5분의 1 규모(200여명)였지만, 원소주 손님 못지 않게 열기가 뜨거웠다. ‘스니커헤드(sneaker head·열성적인 운동화 수집가)’ 중에서도 운동화 역사를 깊게 파헤치는 단계까지 간 ‘진성(眞成) 덕후’들이 찾아와 캠핑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삼일절 오픈런 현장에서 만난 스니커헤드들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백령도 장씨는 멀리 떨어져 있던 한 남성과 눈인사를 나누며 “저 분은 프로스펙스 때문에 제주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왔다”고 소개했다. “어렸을 때 섬에서 자라 운동화를 접하기 쉽지 않았어요. 인천항까지 배로 10시간 걸리던 시절이었죠. 학창 시절 낚시 하고, 전복 잡아 팔면서 차곡차곡 돈 모아 운동화를 샀어요. 군대 다녀와서 ‘신발질’도 시들해졌는데, 2017년 ‘나이키 조던1 캠핑’ 뉴스를 보고 나서 다시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지금껏 운동화 매장 앞에서 가장 오래 기다려 본 시간은 무려 이틀. 국내에 단 12족만 풀린 스트리트 브랜드 ‘베이프’의 한정판 운동화 출시 현장이었다.

프로스펙스 모자, 패딩, 신발까지 완벽하게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온 대학생도 있었다.

이날 대기줄에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프로스펙스로 ‘드레스 코드’를 맞춘 청년도 눈에 띄었다. 잠든 부모님 몰래 새벽 5시에 나왔다는 대학생 신모(27)씨였다. 신씨는 “프로스펙스가 한동안 젊은 세대 감성에 맞지 않는 ‘국뽕 마케팅’에 집중하면서 정체성이 오락가락했지만 품질이 워낙 좋아 종종 구입해왔다”며 “오랜 소비자로서 언젠가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신고 가고 싶을 만큼 멋진 상품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현장에는 웃돈을 붙여 재판매하려는 ‘리셀(resell·되팔기)업자’는 보이지 않았다. 운동화 마니아 김주영(21)씨는 “프로스펙스는 나이키 조던이나 아디다스 이지처럼 리셀가가 치솟을 브랜드는 아니기 때문에, 행사에 순수 애호가만 모여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상품은 최근 리셀 플랫폼에서 최고 33만원에 거래됐다. 10만9000원짜리 프로스펙스가 3배 가격으로 껑충 뛴 것이다.

◇프로스펙스에 K-를 빼자 벌어진 일

프로스펙스 오픈런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브랜드 스토리를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프로스펙스는 1962년 우리나라에서 농구화를 처음으로 대미 수출한 국제상사가 미국에서 1970년대 유통했던 브랜드 ‘스펙스’의 후신(後身)이다. 이 ‘K-스니커즈’ 브랜드는 신발 산업의 요람이었던 부산을 거점으로 한국 운동화 제조 기술이 정점에 달했던 1981년 출시됐다.

출범 당시에는 나이키·아디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브랜드로 주목 받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국의 상표, 프로스펙스’라는 슬로건이 ‘Just Do It.(나이키)’과 ‘Impossible is Nothing.(아디다스)’을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K 딱지’가 붙었다는 이유 만으로브랜드에 꿈과 환상을 품는 소비자는 많지 않았다.

K-마케팅 시조새 브랜드, 프로스펙스의 옛날 광고.

프로스펙스는 1990년대 들어 글로벌 수퍼 팬덤을 거느린 빅 브랜드들과 격차가 크게 벌어졌고, 어느덧 10대 사이에서 ‘찐따 신발’로 분류돼 버렸다. 2010년대 이후로는 ‘아재 워킹화’로 시장에 안착, 비주류·언더독(under dog) 브랜드로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랬던 프로스펙스에 느닷없이 줄서기 캠핑이 벌어진 이유는 대체 뭘까.

가만 들여다보니 이번에 오픈런을 부른 ‘오리지널 스포츠’ 라인에선 프로스펙스 특유의 ‘K-감성’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상표’를 내세우기 전이었던, 1970년대 스펙스(SPECS) 시절 헤리티지(Heritage·유산)를 되살리는데 집중한 모습이었다. 프로스펙스 측은 “오리지널 스포츠는 1970년대 후반 미국 보스턴을 중심으로 유통된 스펙스 운동화를 재해석한 상품”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정판 운동화 ‘마라톤 220’은 1978년 마라톤 선수 데이브 맥길리브레이가 80일간 미국 대륙을 횡단하면서 신었던 런닝화를 복각(復刻)해 의미를 더했다. 재탄생 배경도 독특했다. 운동화가 좋아서 10년 다닌 대기업을 그만두고 스니커즈 유튜버로 활동하는 와디(본명 고영대)가 LS네트웍스에 제안해 만들었다. 그는 그동안 스니커즈 제작 과정과 상품 기획 의도를 유튜브 영상으로 자세하게 공개해왔다. 이처럼 소비자(consumer)가 생산(produce)에 직접 참여한 프로슈머(prosumer) 상품이라는 특징은 스니커 마니아들과의 새로운 접점이 됐다.

이날 팝업 현장에서 만난 ‘성덕(성공한 덕후)’ 와디에게 ‘왜 하필 프로스펙스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저 한국 상표라서가 아니라, 이 브랜드에도 나름의 멋과 역사, 전통, 철학이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몰랐던 프로스펙스의 헤리티지를 발굴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애초부터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익금은 기부하기로 했고요.” 무언갈 이토록 깊게 좋아해본 적이 드문 기자로선, 뭐라 뾰족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열정이 느껴졌다.

1978년 마라톤 선수 데이브 맥길리브레이가 스펙스 런닝화와 프로스펙스 티셔츠를 입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던 모습. /조선일보DB

◇“내가 좋다는데 어쩌라고”…유통업계 키워드 #취향존중 #꼰대사절

삼일절 여의도 ‘K-오픈런’ 소동은 2022년 상반기 유통 트렌드가 집약된 현장이었다. 소비자 집단을 잘개 쪼개 세분화한 ‘마이크로 타깃’ 전략, 바이럴 소통에 적극적인 MZ세대의 자발적 마케팅 활동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세 갈래로 나뉜 오픈런 대기줄에 따라 방문객 패션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세 곳 모두 국산 브랜드이지만, 애국심에 호소하는 ‘K-○○ 마케팅’을 벌이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부분이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바깥에서 몇 시간이고 줄을 서는 체력도, 멀티 페르소나(인격)를 뽐내는 자기 발신력도 부족한 기자는 오픈런 현장의 열기를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 줄이 그 줄’이라는 생각으로 무심히 다가서면, 언제나 새로운 얘기가 라인업 팀을 기다리고 있다. 운동화 마니아들의 축제 같았던 프로스펙스 줄서기를 할 때까진, 다음번 현장에 경찰이 출동할 줄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음 화에 계속>

삼일절 오픈런 현장에서 만난 스니커마니아가 과거 오픈런 캠핑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STORY 조선일보 한경진 기자

#VIDEO스튜디오광화문 송지현 CP·이예은 PD·김민석 인턴PD

#유튜브 바로가기 [EP.2 (나이키 비켜!!) 한정판 운동화 전쟁 : 리셀? 자기만족?] https://youtu.be/iXhapfzD0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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