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친절·밝음·유머도 작은 저항이 될 수 있죠"

오승훈 2022. 3. 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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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감독 인터뷰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 쇼박스 제공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수학 없이 음악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공기의 파동으로 음파가 생성되고 이 음파를 합성한 소리가 음악인데, 이게 수학적으로 보면 주파수거든요. 파동의 진동수가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음악이 되는 거죠.”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은 음악과 수학의 연관성에 대해서 이같이 말했다. 학창시절 댄스그룹 알이에프(R.ef)의 노래 ‘이별 공식’은 알아도,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오일러 공식’은 몰랐던 수학포기자(수포자) 기자에겐 놀라운 얘기였다.

지난 9일 개봉한 <…수학자>는 마치 수학과 음악의 관계처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새터민 수학자와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왕따’가 깊은 관련을 맺게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수학자가 주인공이라고 지레 포기할 영화는 아니다. 수포자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전혀 어렵지 않다.

지난 18일 오후, 화상으로 이뤄진 인터뷰에서 박 감독은 “<…수학자>는 무례함과 위선에 대한 단단하고 예쁜 저항을 그린 영화”라며 “금방 끝날 거 같았는데 자동으로 연장되는 터널 속에 갇힌, 기분 나쁜 꿈 같은 코시국에 저희 영화가 만들어낸 흐뭇함과 따스함이 우울함과 불쾌함을 덜어낸다면 소임을 다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전쟁영화>(2005), <계몽영화>(2010) 등 단편영화로 대한민국영화대상 단편영화상,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각본상 등을 받으며 주목받았던 박 감독에게 <…수학자>는 첫 상업영화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더욱 얼어붙은 극장가에서 <…수학자>는 개봉 이후 7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등 선전 중이다. 할리우드 에스에프(SF) 대작 <문폴>에 잠시 자리를 내줬다가 20일 기준 다시 1위(누적관객수 38만6303명)를 탈환했다. “평소 같았으면 ‘극장에서 꼭 보셔야 한다’고 호객행위를 할 텐데 오미크론 확산 때문에 그 말씀도 드리기 어렵네요. 그래서 극장을 찾아준 관객분들에게 더 감사하죠. 물론 영화도 산업의 일부이기 때문에 숫자가 중요합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더 많이 찾아주셨을 거란 생각에 전체 관객수는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학문의 자유를 찾아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한 명문 자사고에서 경비원으로 살아가던 중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자사고에 입학한 수포자 한지우(김동휘)를 만나게 된다. 수학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지우를 제자로 받아들인 학성. 수학을 매개로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는 과정을 영화는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수학은 정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학성의 가르침은 삶의 경구로도 읽힌다.

“학성은 태생적 천재죠. 수학을 통해 깨우친 삶의 진리를 지우에게 ‘지름길만 선택하지 말고 정면 선택해서 가라. 그럴 때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는 식으로 전하려 한 거죠. 한달 동안 지우를 지켜본 뒤 용기를 주는 영화 속 장면 등을 통해 인간에 대한 성의를 말하고 싶었어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 쇼박스 제공

감독의 말처럼 <…수학자>는 수학과 음악의 관계를 장면으로 아름답게 보여준다. 수학의 아름다움에 동의할 수 없다는 지우에게 학성이 ‘파이(π)송’을 피아노로 들려주는 장면이 그것. 파이송은 원주율(3.141592…)의 숫자를 음표로 변환해 연주한 곡으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온라인상에 직접 연주한 ‘파이송’ 커버 영상을 올리면서 화제를 낳고 있다.

영화는 최민식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선이 굵고 폭발하는 연기를 주로 해온 그는, 영화 속에서 어느새 괴팍하면서도 따뜻한 수학자로 둔갑해 있었다. “제가 90년대부터 최민식 선배 팬이었거든요. 최 선배는 강렬한 연기도 잘하지만, 사실 영화 <해피엔드> 보면 우유팩을 가위로 섬세하게 자르는 장면 같은 생활연기도 잘하는 배우죠. 현장에서 농담도 잘하고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다가도 본인 촬영 순서가 오면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실제로 촬영하면서 최 선배 연기를 보고 ‘헉’ 하는 감탄사가 나온 적이 예닐곱번은 됐어요. 놀라운 배우죠.”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수학이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학성은 학문의 자유를 위해 탈북하지만, 남한에서 수학은 그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학성에게 북한과 한국은 모두 이상한 나라인 셈이다. “이 영화는 교육 문제를 전면 비판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입시경쟁에서 피로감을 느끼며 피 말리는 지우 나잇대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끝없는 경쟁 구조에 놓여 있잖아요. 허무함도 많이 느끼게 되는데, 때론 거대한 대안보다 친절, 밝음, 유머가 작은 저항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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