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간 장기하의 음악 묘기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2022. 3. 2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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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장기하, 사진제공=두루두루아티스트 컴퍼니

2008년은 한국 인디 음악계에 조용한 지각 변동이 일어난 해다. '2세대' 쯤으로 구분지어볼 수 있을 그 범주는 신(scene)의 명백한 진화였고 장르의 비밀스러운 진전이었다. 진화와 진전은 세 이름에서 비롯됐다. 브로콜리 너마저, 검정치마, 그리고 장기하다.

낯익은 스타일로 낯선 존재감을 뽐낸 검정치마, 풋풋한 새싹 같은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들 속 멜로디 저편에는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청년' 장기하가 있었다. 이 세 팀은 기존 것들에서 저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소스를 골라내 조합, 응용한 끝에 세상에 없던 비범한 음악을 들려주며 시장을 움직였다. 그중 여기서 다룰 인물은 장기하다. 정확히는 2022년 2월 22일의 장기하다. 장기하는 '얼굴들'이라는 밴드와 함께 앨범 다섯 장을 내고 2018년 11월에 해체한 뒤 3년 여만에 다시 처음처럼 혼자가 되어 돌아왔다. '2022년 2월 22일'은 지난 2월 14일 발매한 싱글 제목이기도 한데, 내용은 자신이 2022년 2월 22일에 새로운 솔로 앨범을 내겠다는 게 전부였다. 새 앨범에 들어갈 비트와 루프를 짜집기 한 이 엽기적인 자체 티저 광고는 남들 다 하는 것, 뻔한 것은 하지 않겠다는 아티스트로서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2월 22일 팬들에게 도착한 새 음악은 정말로 그랬다.

처음 타이틀 트랙 '부럽지가 않어'를 듣고 한동안 멍했다. '방금 내가 들은 게 뭐지?' 얼굴들 시절 '아무것도 없잖어'에서도 썼던 서울 사투리를 다시 쓴 '부럽지가 않어'는 베이스를 뺀 붕뜬 음악이었다. 살과 피가 증발하고 앙상한 뼈만 남은 이 텅 빈 느낌은 슬픈 듯 무표정한 얼굴로 물 위에 떠있거나 벤치 위에 떠올라 책을 읽고 있는 장기하 본인의 초현실적인 모습으로도 피지컬 음반에 새겨져 있다. 알피 홀(Alfie Hole)이 만든 2번 트랙을 뺀 작품 속 모든 곡을 홀로 조립한 장기하. 이미 장기하의 솔로 앨범에 가까웠던 얼굴들의 굿바이 앨범이 컴백할 장기하 음악의 긴 예고편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그 예고를 구체적으로 비틀어낸 짧은 본편이다. 그리고 그 본편은 충격적이고 파괴적이다. 한편으로 진지한 장난처럼 느껴지는 그것은 일면 대충 만든 느낌마저 든다. 이는 형식 파괴라는 측면에서 장기하식 다다(Dadaism)이고, 공기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미니멀 편곡 측면에선 모종의 현대음악적 요소까지 머금었다. 태초의 디지털 비트에서 쌓아나가는 이 19분 44초의 반란은 '역시 장기하'라는 마니아와 힙스터의 환호와 '이것도 음악이냐'라는 일반인들의 야유 아래 어쨌거나 250의 '뽕'과 더불어 2022년의 '문제작'이 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아마, 장기하도 이걸 노리지 않았을까. 

장기하, 사진제공=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

데뷔곡 '싸구려 커피' 때부터 나는 장기하가 랩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곡이 흐르고 1분 35초에서부터 약 1분간 쏟아냈던 그 눅눅한 내레이션을 기억하는가. 이후 '우리 지금 만나'에서 "전화기를 왼쪽에 댔다 오른쪽에 댔다..." 하며 묘사한 사랑 싸움에서도 들었던 바로 그 랩 같은 내레이션 말이다. 이제 와서 보면 그건 랩이라는 장르로 판단하기 이전에 장기하라는 가수가 개발한 창법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예컨대 이번 앨범에서 '얼마나 가겠어'의 경우 "그렇게 따지면 너 미리 죽을래? 어차피 죽을 거니깐 뭐 그만 살래? 하고 맘속으로..."같이 부르기 싫은데 부르는 것 같은, 일부러 노래를 못 부르려 발버둥 치는 듯한 그런 창법. 따지듯 설교하고 설교하듯 따지면서 개똥철학을 쏟아내는 대화를 가장한 독백, 짜증 섞인 핀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장기하만의 노래 스타일이 습기도 입체감도 모두 부재한 새 앨범을 축축히 적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구잡이로 던져대는 것 같은 그 말들도 비트만은 충실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말은 원래 거의 노래에 가깝다"는 싱어로서 장기하의 깨달음이 그런 일상에서 뚝 떼어온 듯한 말투에 라임을 심고 플로(Flow)를 흘린다.('부럽지가 않어'에서 "자자자 자랑을 하고, 부부부 부러워지고" 부분을 유심히 들어보라.) "촛불처럼 환했던 얼굴을 후 불어서 어둡게 꺼뜨리고는"('얼마나 가겠어') 같은 참신한 비유나 첫곡 '뭘 잘못한 걸까요'와 함께 그나마 신작에서 가장 노래다운 마지막 곡 '다'가 줄세우는 시적 운율도 모두 그런 치밀한 리듬 설계 아래 대기하고 또 등판한다.

장기하, 사진제공=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여기서 리듬 설계라는 말은 중요하다. 장기하는 이전부터 비트를 잘 타는 보컬이었다. 노랫말이라곤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밖에 없는 트랙에서 우리가 주목해 들어야 할 부분도 바로 이 리듬, 비트다. 네 번째 트랙인 이 곡에 장기하는 과거 자신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판소리, 구체적으론 '심청가' 중 "심청을 찾아나가다 물에 빠진 심봉사를 화주승이 구하는 대목"(소리꾼 이자람의 창으로, 음원은 장기하가 군대 있을 때 이자람이 보내준 4장 짜리 '심청가' 완창 음반에서 발췌한 것이다)을 넣었다. 사실 나는 이 앨범의 실험이 멀리 가도 '그건 니 생각이고'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건 정말 내 생각일 뿐이었다. 장기하는 애초에 그런 안이한 예측에 부합할 인물이 아니었다. 가령 금방이라도 서태지의 '환상 속의 그대'가 나올 것 같은 킥 드럼으로 들어가는 '가만 있으면 되는데...'가 정박과 폴리 리듬을 뒤섞는 비트 저글링으로 혼돈의 클라이맥스를 빚어내는 장면은 그가 랩과 디제잉이라는 힙합의 요소를 이 앨범에서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밴드 리더 장기하는 록을 했지만 솔로 장기하는 록을 버렸다.

결국 이번 작품은 배철수와 김창완의 그늘이 느껴졌던 밴드 시절 장기하와 "롤 모델 없는 삶"을 꿈꾸는 솔로 장기하의 간극이 만들어낸 돌연변이 습작처럼 보인다. 완전히 다른 걸 만든 것 같으면서 그는 저 멀리 "눅눅한 비닐 장판"과 전쟁을 치르던 88만원 세대 장기하를 기어이 다시 데려왔다. 비록 3년 전 "초심 따위 개나 줘 버려"라고 그는 노래했지만 3년 뒤 장기하는 창작을 위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앨범 제목 '공중부양'은 초능력 차원의 잔재주라기보단 현실에 기반한 장기하의 음악적 묘기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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