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인 나, 친구 남편과 바람 피웠다..피해자다움에 대한 도발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2. 3. 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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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26] 영화 '엘르'

'독설가' 이미지가 있었던 가수 신해철은 인터뷰어 지승호와 만나 자신의 '독기 서린' 논법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적이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면 예의상 주먹으로 한 대 쳐야 맞는데, 외투가 너무 두껍다면 망치로 때려버리는 거다. 욕먹더라도 망치로 때려야 주먹으로 때리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고, 그래서 적들에게(?) 많은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신해철의 쾌변독설' 中)

`엘르`는 성범죄 피해자 미셸의 이야기를 통해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해보는 영화다.<사진 제공=소니픽처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전혀 안 된 상대와 토론할 땐 가장 독한 논법을 써야 그나마 대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엘르'(2016)를 보며 신해철이 떠오른 것은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그의 논법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피해자는 착해야 한다'는 편견의 외투를 두껍게 입고 있는 사람들을 망치로 때림으로써 대화의 물꼬를 트려 한다.
`신해철의 쾌변독설`에서 그는 자신의 `독한 논법`에 대해 설명한다. 아주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는 사람과 싸울 땐 상대를 망치로 자극해야 겨우 주먹으로 때린 정도의 효과가 난다는 이야기다.<사진 제공=부엔리브로>
경찰에 고발하는 대신 스스로 복수할 길을 찾다

'엘르'는 복면을 쓴 괴한에게 성폭행당한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이야기다. 그는 피해를 입은 뒤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호신용품을 사고, 집의 자물쇠를 바꿨다. 본인이 사장으로 있는 게임회사에 출근해 신작에 대해 논의하며 평상시와 변함없는 일상을 보낸다. 공권력의 도움을 받지도 않고, 가까운 사람과 곧장 상담도 하지 않은 미셸을 친구들은 걱정한다.
미셸은 경찰을 믿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강구한다. 그는 어린 시절 겪었던 한 사건 때문에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미셸은 그러나 겉보기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괴한이 그를 습격하던 장면은 불현듯, 그리고 또 자주 머릿속에 떠오른다. 발신자 번호를 감춘 전화와 메시지가 올 때마다 범인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섬뜩함을 느낀다. 못 보던 차가 집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나, 창문에 갑자기 참새가 날아와 부딪히는 것도 예민해진 그의 신경을 자극한다. 그는 복수를 상상하며, 홀로 범인을 추적해나간다.
게임회사 사장인 미셸은 혹시 직원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주인공의 솔직한 욕망,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이 영화는 피해자가 범인을 찾아 응징하는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엘르' 서사가 지닌 특징은 생활인으로서의 미셸이 어떤 사람인지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미셸이 가진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아들 애인의 출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본인 모친이 젊은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볼썽사납게 생각한다.
미셸은 남을 보는 시선이 그닥 따뜻한 인물도 아니다. 아들(왼쪽)의 여자친구(오른쪽)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녀의 출신과 태도, 문신 등이 마음에 안 들어서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미셸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때때로 그는 윤리적이지 않은 욕구를 발산한다. 자신에게 늘 상냥하게 대해주던 이웃집 부부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셸은 남편 쪽에 마음을 품고 그를 은밀하게 유혹한다. 또 미셸은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이웃집 남자(왼쪽)를 유혹하는 미셸은 결코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니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은 절대 피해자가 될 수 없는 것인가

감독은 왜 피해자인 주인공에게 이런 성격을 부여했을까. 어쩌면 아직도 이 사회에 널리 퍼진 '피해자다움'에 대한 선입견을 깨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대중은 종종 특정 사건의 피해자가 평상시 보여온 행실을 근거로 그를 재단한다. 피해자가 평소 야한 의상을 좋아했고, 직장 내에서 복잡한 연애를 했으며, 이성을 만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그가 피해자일 가능성이 없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피해자는 착할 것'이라는 편견은 피해자 운신의 폭을 아주 좁게 만든다.
미셸의 엄마가 아버지의 최근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다정한 아버지이자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됐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엘르'의 주인공은 윤리적이라고 보긴 정말 어려운 인물이다. 불륜을 저지르고, 친구를 속인다. 남의 차를 망가뜨리며 주차하는 모습을 봤을 땐 기본적인 에티켓도 부족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주변인을 바라보는 미셸의 시선은 그 역시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견을 지닌 인물임을 보여준다.
미셸은 가장 친한 친구(사진)의 남편과 바람을 피운다.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미셸은 `피해자가 될 자격`을 상실한 것인가.<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영화의 창작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이 여자는 전혀 착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으며, 굳이 따지자면 남들에게 피해를 많이 주는 쪽이다. 그렇다고 그가 괴한의 습격으로 당한 피해가 없어지는 것인가.' 즉, 부도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주인공 미셸의 성격은 '피해자다움'이라는 단단한 선입견의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감독이 든 망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를 통해 각종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인간은 평면적이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

우리 사회는 여러 사람의 노력을 통해 과거에 비해 선입견이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피해자다움'이란 것은 자신의 진영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평상시에 2차 가해에 대해 경계하던 이들도 본인의 세력이 가해자로 공격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피해자다움'을 들고나와 반격한다. 지지하던 정치인이 성범죄자로 지목되면 곧장 피해자의 평소 행실부터 지적하는 행태가 그렇다.
자신이 폭행당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고양이에게 미셸은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인간은 평면적이지 않다. 집에선 좋은 부모가 집 밖에선 범죄자가 되기도 하고, 직장에선 폭군 같은 상사도 집에선 가정폭력의 피해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사람에겐 여러 측면이 공존하는 것이지, 하나의 팩트가 다른 팩트를 상쇄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평소 부도덕한 인간이었다는 사실로 그 사람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범죄의 가해자라도 다른 순간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도 모르는 측면이 있을 정도로 입체적인 존재라는, 아주 단순하지만 잊기 쉬운 진리를, 감독은 스릴러와 로맨스, 추리물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연출법으로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엘르` 포스터.<사진 제공=소니픽쳐스>
장르: 스릴러·드라마
감독: 폴 버호벤
출연: 이자벨 위페르, 로랑 라피트, 앤 콘시니, 샤를르 베를링
평점: 왓챠피디아(3.6/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1%), 팝콘지수(73%)
※2022년 3월 18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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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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