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와 경상도가 맞닿아 이웃한 곳 하동과 구례. 정서, 말투, 풍습까지 은근한 형제처럼 닮은 곳이다. 봄이면 너른 평야 위로 넉넉한 해가 가득한 이 우애 좋은 고장을 다녀 왔다. 아직 벚꽃도 새순도 오르지 않은 시절이라 산에 오르지도, 강을 따라 가지도 않고 아주 고즈넉한 한옥을 따라 다녔다. 봄은 처마를 따라 오른다 하지 않던가.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 서정적인 모습의 구례구역. 작고 소박한 역에 내리면 여행이 시작된다.
▶기차를 타고 가자, 구례구역으로
하동과 구례는 전남과 경남의 경계에 이웃해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보니 이왕 내려간 김에 두 마을 같이 돌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리산, 섬진강이 절색을 이루고 구비구비 사연 깊은 사찰에, 변화무쌍한 사계절의 변주까지, 볼거리도 끝이 없다. 그러다 보니 1박2일의 짧은 주말 여행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여행지가 돼 버렸다.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하는 코스는 꽉 찬 1박2일이면 충분하다. 주제는 ‘조선시대로의 타임슬립 여행’ 정도 되겠다. 수백 년 전 이 땅에 살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만들어낸 일상의 훈훈한 드라마를 보며 쉬다 오는 여행이다. 일단 이 코스의 교통 수단은 기차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작은 배낭 하나 걸치고 구례구역에 내리면 된다. 이름도 정겨운 이 역엔 KTX, 무궁화호, 새마을호가 지난다. 순천역이 아니라 구례구역을 권하는 이유는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서정의 막이 열리기 때문이다. 흔한 편의점 하나 없는 작은 역사. 밀크커피가 정겨운 자판기 한 대가 편의 시설의 전부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아’ 하는 감탄사가 목울대를 타고 툭 튀어나오는데, 그건 역사의 지붕에 정겨운 기와를 얹었기 때문이다. 단지 기차역에 내렸을 뿐인데, 시골 외할머니댁에 온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토지』의 촬영 세트로 지어진 이곳 최참판댁은 20년 가까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되었다. 그 흔적을 포스터에 담아 나란히 진열했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최참판댁 사랑채의 누마루에 오르면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넓은 평야가 가득히 눈에 담긴다. 소설 『토지』 속 소장농들의 집이 마을 곳곳에 자리한다. 『토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집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머묾의 미학, 하동 최참판댁과 올모스트홈 스테이
아름다운 한옥의 대향연이 펼쳐지는 하동의 최참판댁 마을. 이 마을 안엔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소작농들의 집들이 남으로 쭉 이어지고, 북으로는 올모스트홈 스테이라는 멋진 숙소가 자리한다. 결국 모두 한 마을에 이웃한 집들이란 이야기다. 못해도 30채 이상 되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두런두런 모여 사는 이곳에 가려면 구례구역에서 렌트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30분가량 섬진강변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면 도착하니 말이다. 역 앞에 상시 대기 중인 택시를 이용해도 좋은데 요금은 3만 원을 조금 넘는 선이다. 3월 말이면 벚꽃으로 눈부실 섬진강을 상상하며 내달리다, 긴 언덕을 오르면 최참판댁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이 펼쳐진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으니 그 풍광은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최참판’이란 인물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근간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마을의 실체는 드라마 세트장이었던 것이다. 이곳 평사리는 조선시대 동학혁명부터 근대사를 배경으로 써내려 간 민족의 대서사시 『토지』의 배경이다. 이 소설을 드라마화 하기 위해 하동 평사리에 드라마 세트장을 완성한 것이 2002년. 세트장이라고는 하나 워낙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그대로 재현한 데다, 지리산 능선을 따라 고즈넉하게 지어져 아름답고 그윽하기가 그지없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른다면 그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옛 고장이라고 여길 정도다. 지금은 편의 시설을 더해 누구나 산책하기 좋은 관광지가 되었는데, 소설 『토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정밀한 공간 묘사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꼭 들러봐야 할 것은 최참판댁의 누마루. 지붕이 덮힌 정자에 올라서 바라보는 섬진강변과 지리산 산세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은 구석구석이 아름답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좀 더 부지런하게 하동 여행을 준비한다면, 한옥 숙소인 올모스트홈 스테이를 경험해 보길 권한다. 최참판댁까지 와서 올모스트홈 스테이를 경험하지 않고 간다는 건, 바닷가 횟집에 와서 매운탕만 먹고 가는 것과도 같다.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은 최참판댁의 일부를 개조해 만든 한옥 숙소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에피그램이 로컬 프로젝트로 운영하고 있는 곳인데, 시설과 서비스, 그리고 공간의 아름다움이 별 다섯 개를 주고도 남는다. 연하재, 화람재, 일영재, 월영재 등의 독채 한옥과 마루를 공유하는 2인실들로 운영되며 정갈한 침구와 가구, 로컬 식재료로 만든 조식이 여행의 행복도를 한껏 끌어올려주는 곳이다. 독채 한옥들은 제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모두 마당이 있는 구조라 가족 여행으로 그만이다. 밤이 되면 바람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곳, 아침엔 대나무가 울창한 산책로를 느리게 걸으며 피톤치드 가득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에어비앤비에서 예약을 할 수 있는데, 워낙 인기가 많으니 여행을 계획했다면 미리미리 부킹을 해야만 한다.
Info 올모스트홈스테이 하동
주소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86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의 조식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이 감동스러운 이유는 정갈한 서비스에 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서비스는 우아하면서도 세련되었다. 1만5000원을 내면 제공되는 조식이 대표적. 하동 땅에서 난 재료들로 만든 조식은, 그 차림새가 참 시적이다. 하동의 구운 계란과 대추방울 토마토, 하동 연우제다의 녹차를 재료로 한 녹차라떼, 그리고 통밀 감자 샌드위치가 싸리나무 채반에 정갈하게 놓여,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일 정도다.
▶그분을 만나러 갑니다, 하동 박경리문학관
문학관 내부에 들어서면 길다란 유리관 안에 토지가 연재되었던 잡지들이 박제되어 있다. 무려 26년의 시간이 이 안에 나란하다, 육필 원고, 만년필, 안경이 있는 박경리 선생의 책상, 문학관을 돌아 나오면 마주 하는 뜰. 멀리 보이는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최참판댁과 올모스트홈 스테이 하동에 머물렀다면, 반드시 들를 곳이 있다. 바로 ‘박경리문학관’이다. 최참판댁이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재현한 마을인데,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인 작가 박경리를 만나지 않고 온다는 건 왠지 허전하다. 이곳은 전국에 존재하는 세 개의 박경리 기념관 중 선생의 문학세계와 가장 가까운 느낌이다. 단출한 일층의 한옥은 단정하고도 힘차며 공간과 콘텐츠는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옹골차다. 2004년 ‘평사리 문학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던 곳으로 최근 리뉴얼해 재개관 했다. 작가에 대한 일대기와 작품을 군더더기 없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토지』와 박경리를 소재로 한 아트 작품, 영상 자료 등을 더해 현대적으로 재해석 했다. 특히 육필 원고, 만년필, 재봉틀, 국어사전, 책상, 부채, 볼펜 등 박경리 선생의 유품은 우리를 위대한 작가의 시간 속으로 끌어당기고, 토지가 연재되던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같은 50년 전의 잡지들 역시 시선을 잡아 끈다. 이 문학관의 백미는 문학관을 돌아 나오면서 마주하는 풍경이다. 고운 잔디 마당 너머로 그림처럼 펼쳐진 악양면 평야. 너무나 평화로워서 절로 마음에 행복이 찾아 든다. 안팎으로 감동을 주는 곳이다.
Info
주소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관람 시간 09:00~18:00 *월요일 휴관
▶호남을 대표하는 대저택, 구례 운조루
이제 하동을 벗어나 구례로 향한다.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구례의 운조루(雲鳥樓)부터 들러보자. 이곳은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조선시대의 대저택인데 개인 소유의 주택이라 아직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최참판댁이 『토지』라는 작품 속으로 떠나는 판타지적 여행이었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리얼 조선시대로의 여행이다. 기품 있는 솟을대문을 건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고재들이 그윽하게 손님을 맞는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 누마루까지 갖춘 55칸짜리 부잣집이지만 실상 마주하면 온화한 느낌이 강하다. 화려함보다는 자연스러운 나무의 멋을 장착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의 운조루라는 이름만 봐도 이곳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이 집을 지은 유이주는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무관 출신의 인물이다. 그는 지리산 계곡 중 하나인 문수골계곡이 평야지대와 만나 평화롭고, 물이 풍족해서 농사짓기에도 충분히 비옥한 이곳에 스스로 터를 잡았는데 대대손손 덕을 나누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 집에는 눈여겨 볼 것이 있다. 바로 ‘타인능해’라고 이름 지은 나무 독이다. ‘타인능해’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 독에 쌀을 채워놓고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이 쌀로 밥을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큰 울림을 주는 철학이며 실천이라 오래 서서 보게 되는 네 글자다. 그 상징적 의미 때문에 지금은 대문 오른편에 두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여러모로 아름다운 집이다.
Info
주소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관람 시간 10:11~17:00 입장료 1000원
▶구례 쌍산재
100여 그루의 나무와 연못을 지나면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쌍산재는 모든 곳이 포토 스폿이다. 그만큼 정원은 아름답고 고택은 정겹다.
‘윤스테이’로 유명세를 탄 쌍산재는 300년이 된 고택이다. 약 1만6500㎡의 정원에 15채의 한옥이 있는데, 그 공간들을 이어주는 깊은 정원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지난 2018년에 전라남도 민간정원 제5호로 지정됐을 정도. 100여 종의 수목과 이름 모를 화초들이 어우러진 정원엔 사랑채, 건너채, 사당, 안채, 관리동, 별채, 서당채, 경암당과 정자 호서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뜰을 따라 놓인 가옥들은 세월의 흔적을 머금어 은은한 색조를 띠는데, 그 어느 것 하나 튀는 것 없이 화목하고 조화롭다. 마치 온기 가득한 외갓집처럼 말이다. ‘쌍산재’란 이름은 운영자 고조부의 호 ‘쌍산’에서 온 것이다. 6대에 걸쳐 오늘에 이른 이곳은 평생 책과 자연을 벗삼으며 중용의 삶 속에서 우아하게 살아온 조선 후기 선비정신이 흐르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가꿔진 정원은 사계절 언제든 유유자적 산책하기 좋으니 걷다가 툇마루에 앉아 바람 한 점, 햇살 한 점까지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화요일을 제외한 날에 입장료 1만 원을 내면 정원 산책이 가능하다. 차도 한 잔 손에 쥐어 주니 시적인 산책을 하는 내내 온기가 동행한다. 대나무 숲과 연못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갑작스레 저수지가 펼쳐진다. 그 풍경마저 신비롭다. 어디 하나 버릴 곳 없는 시간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