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없는 이들엔 너무 가혹한 세상..거짓 아무리 덮고 덮어도 진실은 결국 밝혀지더이다

박성준 2022. 3. 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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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회란기'
고선웅 연출·극공작소 '마방진' 신작
700년 전의 중국 고전 각색해 선봬
신랄한 사회 풍자·포청천 판결 통쾌
20일까지 서울예술의전당서 공연
중국 원나라 시절 극작가 이잠부가 당대 사회 구조적 모순을 비판했던 원작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 고선웅 연출의 연극 ‘회란기’. 700년 전 이야기를 통해 “진실은 파묻어도 햇빛에 드러나고, 거짓은 감추려 해도 쇠꼬챙이처럼 뚫고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연극 ‘회란기(灰?記)’의 주인공은 장해당이다.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오빠와 찻집에서 수다 떠는 낙을 즐겨야 하는 모친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래 부르는 기생이 된 착한 아가씨. 동네 갑부 마원외는 장해당에게 반해 그녀를 첩으로 들이고 본처 마부인에서도 얻지 못한 아들을 갖게 된다. 남편의 사랑도, 자식도 갖지 못한 마부인은 음모를 꾸며 마원외를 독살하고 그 죄를 장해당에게 뒤집어씌운다. 마부인과 사통(私通)하고 있는 관헌 조영사는 독약을 마련해주고 어리석은 고을 수령이 장해당을 심문할 때 마부인 편을 들어준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나. 돈으로는 거짓을 감출 수 있고, 진실을 덮을 수도 있다”는 이들에 매수된 마을 사람들도 마부인 편을 든다.
‘회란기’는 흥행사 고선웅 연출의 ‘조씨고아’, ‘낙타상자’ 계보를 잇는 세 번째 중국 원작 연극이다. 중국 원나라 시대 작가 이잠부의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記)’를 새로 가다듬어 무대에 올렸다. 훗날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가 쓴 ‘코카서스의 백묵원’처럼 현대 서사극 이론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장해당이 겪는 고난을 통해 “돈 있고 줄 있는 사람은 간단히 끝내면서, 돈 없고 줄 없는 사람은 모질게도 족쳐대는 세상”을 향한 통렬한 사회 비판 메시지를 던진다.
기둥이 거의 전부인 무대에서, 이 단순하고 결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옛 중국 이야기에 관객이 흠뻑 빠져들게 하는 건 고선웅 연출의 맛깔나는 각색과 ‘장해당’ 역 이서현, ‘마부인’ 역 박주연, ‘포청천’ 역 호산 등 그가 이끄는 극공작소 마방진 배우들의 연기다. 배우가 큰 소리로 한탄하듯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설명하는 고선웅 작품 특유의 서사극적 특징은 여전하다. 이는 시간 낭비 없이 700년 전 이야기로 관객을 데려간다. 고선웅은 “선입관만 내려놓으면 연극이 쉽고 재밌구나. 그렇게 옛날 희곡의 경제성에 매료됐다. 그러다 보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과 ‘낙타상자’에 이어 세 번째로 ‘회란기’를 선보이게 됐다”고 연출 노트에서 밝혔다.
고향에서 죽을죄를 지은 죄인 신세가 된 장해당이 2심을 받기 위해 개봉으로 압송된 후반부 진짜 주인공은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포증이다. 부채를 흔들며 위풍당당하게 무대에 등장한 포증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황공하게도 성은을 입어 지금 남아 개봉부 부윤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황제께서 세검과 금패를 하사하시어 탐관오리를 감찰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라 하셨죠. 또한, 형을 먼저 집행하고 나중에 보고할 수 있는 특권도 윤허하셨지요. 때문에 권세가들은 저의 이름만 들어도 손발을 오므리고 흉악하고 간사한 무리들은 저의 그림자만 보아도 죄다 몸을 떱니다.”

사건 보고를 받자마자 “정실부인이 낳은 자식을 (정해당이) 강탈하려 했다는데, 아이가 뭐 그리 강탈할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라며 수상쩍은 구석을 눈치챈 명판관은 “포 대제가 슬기롭게 석회 동그라미로 판결을 내린 이야기”라는 원작 제목대로 바닥에 석회로 동그라미를 그려 그 안에 아이를 세운다. 매수된 증인, 진범과 결탁한 수사관, 자백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엉터리 재판의 잘못과 범죄의 실체는 명판관 앞에서 낱낱이 밝혀진다. 모든 죄인이 줄줄이 치를 죗값을 선고받고 칼을 찬 채 객석 앞에 줄지어 서는 마지막 장면은 통쾌하다. 하지만 사법체계의 잔혹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각자의 사실관계가 미로처럼 뒤얽힌 재판에선 포청천 같은 명판관도, 속 시원하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판결도 기대하기 힘든 요즘 세태를 떠올리면 쓴맛이 올라온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3월 20일까지,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3월 25, 26일, 성남아트센터에서 4월 9, 10일.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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