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술기행](69) 황희 정승 배출한 장수황씨 문중 술 '문경 호산춘'

박순욱 선임기자 2022. 2. 2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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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황씨 사정공파 23대 종손 황수상 대표가 술 만들어
멥쌀보다 두배 많은 찹쌀 넣어, 알코올 도수가 18도 '약주 중 도수 가장 높아'
물 적게 넣은 탓에, 압착해야 맑은 술(약주)과 지게미 분리돼
단맛, 신맛, 누룩향이 어우러진 맛..증류주도 출시 예정, "10년 이상 숙성 중"
문경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 황수상 종손이 관리를 맡고 있다. 매년 황희 정승 생신 다례제를 이곳에서 지낸다. /박순욱 기자

경상북도 문경의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문중 술’이 있다. 호산춘이 그것이다. 호산춘은 신선들마저, 탐낼만한 술이라 하여 호선주라고도 불렸다. 옅은 노란색을 띠고 있는 호산춘은, 부드러운 맛과 짜릿한 향이 특징이다. 1991년 경북 지정 무형문화재로도 등극한 호산춘은 약주로는 드물게 알코올 도수가 18도다. 대형마트에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약주 도수는 13~15도 정도다. 그러나, 전통주 업계에서는 문경 호산춘, 면천 두견주, 한산 소곡주를 ‘3대 18도 전통 약주’로 부른다.

주정에 물을 타서 알코올 도수를 조절하는 희석식소주와 달리, 전통 약주는 발효를 거쳐 도수가 정해진다. 알코올 도수가 높다는 것은, 술 발효 때 당분이 많이 생겨, 누룩 속 곰팡이들이 그 당분을 먹고 알코올을 그만큼 많이 만들었다는 얘기다. 또, 발효주의 주원료인 찹쌀, 멥쌀 등의 함량에 비해, 물을 적게 넣었다는 얘기도 된다. 이래나 저래나, 한마디로 ‘귀한 술’이란 의미다. 조선시대 시작된 술로 고급 술에만 붙인다는 ‘춘’자가 끝자로 쓰인 술로 지금도 남아있는 술은, 호산춘이 유일하다.

장수황씨 종택 중앙에 위치한 사랑채. 서애 류성룡이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다. /박순욱 기자

장수황씨 가양주였던 호산춘이 세상에 나온 것은 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 덕분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장수황씨 문중에 연락해, 호산춘 술을 보내달라고 하니, “(우리는 술을 파는 사람이 아니니)필요하면 직접 가져가라”고 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89년 레이건의 방한 때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상업양조를 시작했으니, 올해는 호산춘 출시 32년째 되는 해다.

호산춘을 만드는 양조장을 방문하기에 앞서 800m 정도 떨어진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을 먼저 찾았다. 장수황씨 사정공파 23대 종손인 황수상 대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에 자리한 이 종택이 지어진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450여년 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장수황씨 하면 떠오르는 첫번째 인물이 황희 정승(1363~1452)이다. 영의정 자리에만 18년을 지낸, 조선의 최고 명재상으로 꼽히는 방촌 황희 정승이 장수황씨다. 그리고 장수황씨 사정공파의 시조는 황희 정승의 증손자인 황정 어른으로, 임금으로부터 ‘사정공’이란 시호를 받아, 장수황씨 사정공파를 이끌게 됐다. 올해는 황정 어른이 문경에 터를 잡은지 506년이 되는 해다.

종택 안으로 들어서면, 누구나 저절로 눈이 왼쪽을 향하게 된다. 수령이 450여년으로 추정되는 탱자나무 두 그루가 한 그루인듯, 오랜 세월 고택을 지켜오고 있다. 탱자나무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돼 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을 지키고 있는 탱자나무. 수령이 45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순욱 기자

이 장수황씨 종택은 황희 정승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인 숙청사를 비롯해, 사랑채, 안채, 별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황희 정승 사당은 본래 이곳이 아닌 인근의 다른 곳에 있다가, 옮겨왔다고 한다. 종택 건립 당시부터 있던 건물은 현재 사랑채, 별채, 안채만 남아있으며, 나머지 건물들은 소실됐다고 한다. 다만, 안채 마당 중앙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우물은 건립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황수상 종손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에는 대개 우물을 외벽 바깥에 둔 것과는 드물게, 종택의 안채 마당에 우물을 둔 것은, 물 기르는 일을 주로 하는 여성들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안채는 사람이 기거하지 않고 있으며, 종손인 황수상 호산춘 대표가 관리를 맡고 있다.

종택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중앙에 보이는 사랑채는 서애 류성룡이 수학하면서 기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 종택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서애 류성룡와 동시대 인물인 칠봉 황시간(1558~1642)이 이곳에서 황희 정승의 다례제(생일 제사)를 지내며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즈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문경호산춘 황수상 대표. 문경 장수황씨 23대 종손인 그는 "조선시대 문헌에 나와있는 제조방법 그대로 호산춘을 빚는다"고 말했다. /박순욱 기자

장수황씨 사정공파 압향조인 황정의 고손자인 황시간이 기록에 남긴 ‘다례제를 지내고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는 대목은 ‘문중 술’ 호산춘의 내력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황시간이 조상인 황희 정승 다례제에 준비한 술이 지금의 호산춘인 것은 정확하지 않으나, 장수황씨 집안에서는 호산춘이 ‘문중 술’로 등장하는 시기를 이때쯤으로 보고 있다.

종손인 황 대표의 얘기를 들어보자. “호산춘 술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칠봉 황시간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보면, 방촌 할아버지(황희 정승) 사당을 건립한 것과, 음식과 술을 준비해서 다례제를 올리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때부터 지금의 호산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차후에 호산춘이란 술이 나왔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제 고조모가 호산춘을 담그는 걸, 아버지가 직접 보셨다. 그래서 가까운 과거에는 종부이신 고조모, 증조모, 할머니, 어머니까지 제주용으로 호산춘을 대를 이어 빚어오셨다. 호산춘 역사는 적어도 200년은 넘을 것으로 보며, 칠봉 황시간 할아버지 생존 시에 호산춘이 시작됐다면 400여년, 입향조인 황정 때부터라면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호산춘의 출발이 문경이 아닌 전라도 익산이란 얘기도 근거 있게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 중엽의 기록을 보면, 지방 특산주로, 전주 이강주, 진도 홍주, 전라도 여산(지금의 익산) 호산춘 등이 등장하며, 실제로 전북 익산에도 현재 호산춘 술이 생산되고 있다. 익산의 호산춘은 ‘호리병 호’자를, 문경 호산춘은 ‘호수 호’자를 쓰는 차이가 있다.

호산춘 약주가 조선 초기에 시작됐을 거라는 짐작은 나름 근거가 있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 당시로는 농업 신기술인 이양법(모내기)이 확산되면서, 쌀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 사대부 집안의 가양주 문화가 확산됐다는 것이다. 호산춘이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산림경제(1715년)를 시작으로, 임원경제지(1827년), 양주방(1837년) 등에도 호산춘 얘기가 언급돼 있다.

‘춘’자가 붙은 술도 드문 예다. 조선시대 춘 자가 붙은 술은 약산춘(서울), 벽향춘(평양), 호산춘 정도인데, 이중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술은 호산춘밖에 없다.

장수황씨 종택을 나와, 호산춘 양조장을 둘러봤다. 쌀을 떡이나 고두밥으로 찌는 큰 솥, 여러 개의 대형 발효탱크 등 여느 양조장과 풍경이 비슷했다. 발효조로는 이전에는 250L(리터) 항아리를 썼으나, 7년전부터는 1500L(리터)스테인레스 탱크를 쓰고 있다. 이 스테인레스 탱크에는 발효 중인 술, 또 여과를 거친 후 병입 전, 안정화 단계 중인 술들이 들어 있었다. 코끝으로 전해오는 향은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했다.

문경 호산춘 양조장의 필터-프레스 기기. 호산춘 약주는 워낙 진해 압력을 가해 짜지 않으면 술과 찌꺼기가 잘 분리되지 않는다. /박순욱 기자

발효가 끝난 술은 여과와 압축을 동시에 하는 장치를 거쳤다가 한달 남짓 안정화를 한 뒤 병입해, 출시된다. 호산춘에 들어있다는 솔잎 향은 발효탱크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황수상 대표는 “덧술 단계에 솔잎을 분쇄해 넣지만,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할 뿐 솔잎 향이 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은 탓인지, 양조장은 먼저 둘러본 종택 만큼이나 고즈넉했다. 술 사러 오는 사람이 가끔 있을 뿐, 방문객도 별로 없었다.

호산춘은 이양주다. 밑술에 한번의 덧술로 발효를 마무리하는 술이다. 제조방법은 간단한 편이다. 우선 멥쌀을 가루로 내서, 백설기를 찐다. 여기에 누룩과 물을 같이 섞는다. 이게 밑술이다.

밑술 발효는 일주일 정도. 다음은 덧술이다. 밑술에는 멥쌀을 썼지만, 덧술에는 찹쌀을 쓴다. 그것도 멥쌀보다 두배 많은 양을 넣는다. 찹쌀은 멥쌀보다는 단맛을 더 낸다. 호산춘이 다른 약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데는 찹쌀을 많이 쓰는 것도 ‘한몫’ 한다. 찹쌀은 가루를 낸 솔잎과 함께 섞어 고두밥을 만든다. 이러면 덧술이 완성된다. 발효가 한창 진행 중인 밑술에 이 덧술을 부어준다. 그리고 다시 한달 좀 더 기다린다. 이 과정이 2차 발효다. 밑술 발효, 덧술 발효 기간만 대략 두달 정도 걸린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에 위치한 황희 정승 사당. 명절 두번, 생신 등 일년에 세번 문을 연다. /박순욱 기자

발효가 끝나면 찌꺼기를 거르는 여과 과정이다. 그런데, 호산춘은 좀 다르다. 술이 워낙 뻑뻑해 압력을 가해 짜지 않으면 술과 고형물 찌꺼기가 분리되지 않는다. 쌀에 비해 물이 워낙 적기 때문이다. 황 대표는 “대개 막걸리 발효에는 물이 쌀의 120~160%를 넣는데, 호산춘은 쌀 대비, 93% 정도의 물을 쓴다”며 “쌀보다 물이 적은 만큼 고형물이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과와 압축을 동시에 하는 필터-프레스 장치를 술이 반드시 거쳐야 한다. 프레스 장치(압축기)가 없던 시절에는 맷돌로 눌러 술을 짰다. 시음장 한켠에는 황 대표의 어머니 송일지 명인이 직접 맷돌로 술을 내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 한장이 전시돼 있다. 종부인 송일지 명인은 현재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호산춘 술빚기 기능 보유자이며, 종손인 아들 황수상 대표는 전수조교다.

문경 장수황씨 가양주인 호산춘. 알코올 도수가 18도인 약주다. /박순욱 기자

여과-압축 공정을 끝낸 술은 다시 스테인레스 통에 들어가, 한달을 쉰다. 이른 바 ‘안정화’ 과정을 거치면서 술의 향과 맛이 더 깊어진다. 그래서 호산춘은 ‘100일의 정성’ 끝에 나온다고 한다. 발효 기간만 두 달, 안정화 기간도 한달 이상 소요되기 때문이다. 여과-압축에는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100일 정성’을 드린 호산춘은 과연 어떤 맛이 날까? 황수상 대표의 설명이다. “호산춘은 첫맛, 중간맛, 끝맛 구분없이 자연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한마디로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빼어난 술이다. 여과를 끝내고 한달 이상 안정화를 거치기 때문에 맛이 끊어지지 않는다. 쌀(특히 찹쌀)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단맛과, 원료가 산화(발효)되면서 생기는 신맛, 마지막에는 누룩 특유의 쿰쿰함 등이 잘 어우러진 맛이 난다.”

호산춘 제조 기능보유자인 송일지 여사(문경 장수황씨 종부)가 맷돌로 눌러 호산춘을 내리는 모습의 사진. /박순욱 기자

문경 호산춘 양조장이 생산, 판매하고 있는 술은 현재 18도 호산춘 단일 제품뿐이다. 그러나, 10여년전부터 호산춘을 증류한 소주를 항아리와 오크통에 담아 숙성하고 있다. 오래 숙성된 것은 12년이 넘었다고 한다. 숙성 12년? 스코틀랜드 위스키도 12년 이상 숙성하면 프리미엄 위스키로 내놓지 않는가? 그런데, ‘화경’이란 신제품 증류주 이름까지 지어놓고도, 언제 세상에 내놓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게 황 대표의 설명이다. 그 이유를 물었다. “신제품 출시 시기를 못박지 않은 것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맛과 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방망이를 깎아 바늘을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호산춘 양조장은 소위 잘 나가는 양조장이 아니다. 연간 매출도 밝히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황수상 대표는 느긋하다. 500년 넘은 장수황씨 문중을 지키는 종손의 여유? 그도 절대 아닌 듯했다. 자세히는 묻지 않았지만, 종택 관리도 경제적으로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는 말했다. “사실 양조장을 3대째 하고 있지만, 영업 마인드가 없다. 찾아오는 손님에게만 술을 파는 수준이다. 백화점에서도 제품을 달라고 하지만, 우리가 거절한다. 생산량이 많지도 않지만, 유통 관리 인력도 없기 때문이다. 양조장이 종택 관리에 도움이 못되는 형편이지만, 수백년 내려온 호산춘의 품질은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발효가 끝난 술에는 물도 타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를 낮추면 생산성이 높아지겠지만, 종택을 지키는 종손이 그런 타협을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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