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웅의 고지도] 순례자들의 나침반이 된 '시편 세계지도'

글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고문 2022. 2. 2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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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웅의 고지도 이야기 114
라틴계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시편 세계지도 (출처: British Library)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편詩篇’은 150편의 종교시로, 신의 은혜에 대한 찬미와 메시아에 관한 예언적 내용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시편은 성서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간략하고 아름답게 정리되어 있어 ‘작은 성서’라고 불리고, 거룩한 그리스도교 교회를 보고 싶다면 시편을 들라”고 했다. 시편은 모세로부터 서기관 에스라Ezra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0년에 걸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저자와 시기는 분명치 않다.
마르틴 루터 “시편은 작은 성서”
채색된 삽화와 함께 화려하게 장정된 시편을 ‘솔터Psalter’라고 하는데, 대영박물관에는 ‘런던 솔터London Psalter’라고 불리는 1260년경에 제작된 ‘시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양피지에 채색 필사되었고, 책의 크기는 가로 13cmㆍ세로 17cm로 지금의 46판(B6) 크기와 비슷하다. 책의 분량은 총 226장(452쪽)이고, 언어는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 ‘시편’이 유명해진 것은 수록된 세계지도 때문이다.
‘시편’ 앞쪽에 나오는 캘린더에 따르면, 1262년에 시성諡聖된 치체스터의 성 리처드St Richard of Chichester의 축일이 4월 3일이기 때문에 1262년 이후 런던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크기는 작지만 매우 세밀하게 그려져 내용은 그 어느 큰 지도 못지않게 풍부하다. 독일의 역사학자 폰 덴 브링켄Anna-Dorothee von den Brincken은 이 지도가 1223년경 독일에서 제작된 엡스트로프 세계지도Ebstorfer World Map의 축소판과 같다고 할 만큼 내용이 유사하다고 했다.
미국의 지도사학자 쳇 반 듀저Chet van Duzer는 그의 논문 ‘The Psalter Map(c. 1262)’에서 시편 지도는 앞뒤로 2매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같은 시대에 웨스트민스터 사원 벽에 그려진 마파문디(현재는 소실)를 근거로 했다는 설을 부인하면서, 이 지도에 프랑스가 크게 그려져 있어 프랑스인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지도의 뒷면은 예수가 전형적인 ‘TO 지도’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인데, 지도의 내부는 지방과 도시에 관한 텍스트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시편 지도와 필치나 형식이 달라 다른 사람의 솜씨로 보인다.
성경 속 인간의 이상적 세계 표현
중세시대의 세계지도는 거의 지리적 지식의 파악이나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이상적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주로 교회의 제단화祭壇畵나 종교 서적의 삽화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중세시대의 ‘시편’은 영적이고 신성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된 세계지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 수련의 도구가 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길안내로 사용되었다.
시편 세계지도의 형식은 구약성경 에스겔서 5장 5절에 나오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예루살렘이다. 나는 그 도성이 뭇 나라에 둘러싸여 민족들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하였다”는 내용처럼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예수는 지구 꼭대기에 반짝이는 듯한 ‘3개의 하얀 점’이 찍힌 짙은 청색 바탕을 배경으로 두 천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 ‘3개의 하얀 점’은 산스크리트어로 신타마니Cintāmani, 즉 불교미술에서 유래된 모티브로, 오스만 제국의 궁전에는 힘의 상징인 이 모티브를 건축양식이나 도자기, 섬유디자인 등에 사용했다. 두 손을 든 예수는 오른손으로 축복을 주고, 왼손에는 권력의 상징인 보주orb를 들고 있다.
지도의 테두리는 4개의 꽃잎을 지그재그로 장식하고, 네 귀퉁이는 8개의 꽃잎으로 마무리했다. 지구 아래쪽에는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비룡Wyvern이 머리를 맞대고 좌우 대칭으로 그려져 있는데, 가시 같은 꼬리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지도의 방위는 위가 동쪽인데, 동쪽은 그리스도와 천사가 있는 낙원을 나타내고, 서쪽은 비룡이 있는 악을 암시한다. 이는 지구 둘레를 에워싼 환해Oceanos에 그려진 12개 풍신風神의 표정에서도 나타나는데, 동쪽의 풍신은 온화한 모습이고, 서쪽의 풍신은 악의에 찬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의 바다는 녹색이고, 강은 꼬불꼬불한 청색 선, 산과 산맥은 먹선에 회갈색이고, 도시는 황토색 삼각형 기호로 표시했다. 예루살렘 밑의 ‘T자’ 형 바다가 지중해이고, 왼쪽으로 뻗은 끝부분이 흑해이다. 지도 오른쪽 상단의 눈에 띄는 붉은색 바다가 홍해이고, 그 아래쪽의 갈라진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모세가 가른 기적의 장소이다.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
세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뉘는데, 지중해 위쪽과 홍해 왼쪽 지역이 아시아이고,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오른쪽이 아프리카, 지중해에 에워싸인 아래 왼쪽 지역이 유럽이다.
동심원으로 그려진 예루살렘의 중심은 적색의 원으로, 마치 ‘황소의 눈’처럼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초점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지이며, 나침반의 포인트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배꼽omphalos’이라고 부른다.
지도 위쪽 끝의 이중 원은 에덴동산으로, 그 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를 중심으로 아담과 이브가 그려져 있다.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신 후 네 줄기로 갈라졌다’고 한 것처럼 강줄기가 흘러나가는데, 오른쪽으로부터 비손강Pishon, 기혼강Gihon,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인데, 다섯 번째 강은 창세기에 나오지 않는 갠지스강이다.
예루살렘 위쪽에 물고기가 그려진 작은 호수는 갈릴리호이고, 그 왼쪽 위로 반달형 큰 산줄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곡과 마곡Gog-Magog’이라는 사악한 종족을 가두기 위해 쌓은 장벽이고, 그 문은 알렉산더의 성문이다. 장벽 내부의 바다는 카스피해이고, 그 일대 지역은 곡과 마곡의 땅이다. 알렉산더 성문 바로 앞 산위에 그려진 반달형의 배는 ‘노아의 방주Noah’s Ark’이다.
홍해 오른쪽의 산은 고대 누비아 지역으로, 가운데 문은 ‘누비아의 성문Gate of Nubia’이다. 누비아의 성문 위쪽은 에티오피아이고, 아래쪽은 이집트 땅이다.’ 달의 산Lunae Mons’에서 발원하는 나일강 하류는 넓은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나일강 오른쪽의 아프리카 남단에는 14개의 기괴한 종족들이 그려져 있는데, 개의 머리를 한 종족, 얼굴이 가슴에 있는 종족, 몸의 일부를 탐욕스럽게 먹는 식인귀, 손가락이 여섯 개인 종족, 다리가 하나인 종족 등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끝에 괴이한 종족을 배치한 것은 불확실한 전설에 의한 결과물이다.
지중해변 유럽에서 눈에 띄는 큰 황토색의 도시가 로마이고, 제법 큰 산맥은 알프스산맥으로 추정된다. 알프스산맥 아래쪽 넓은 지역이 프랑스이고, 큰 도시는 파리이다. 이 지도가 탄생된 영국은 파리 왼쪽 끝에 위치하는데, 변색되어 알기 어렵지만 해협 너머가 영국이고, 황토색 기호는 런던이다. 프랑스 오른쪽 지중해변에 그려진 산맥은 피레네산맥이고, 지중해 오른쪽 테두리에 둘러싸인 곳은 북부아프리카로, 지중해변의 큰 도시인 카르타고가 위치한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마이클 가우디오Michael Gaudio는 “지도의 표현은 깊은 명상을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두는 영적인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다”고 했다. 중세의 세계지도는 종교적인 맥락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지리적인 세계의 묘사보다는 신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되는 세계라는 영적인 묘사를 통해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시편 세계지도’ 역시 지도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리스도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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