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시학

한겨레 2022. 2. 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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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즐겨 읽는 서정시는 어떤 탄생과 성장의 길을 걸었을까? 평소 관심을 기울일 만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 주제를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전적으로 염무웅의 <한국 현대시: 그 문학사적 맥락을 찾아서> 덕이었다.

민요의 현대적 수용을 통해 같은 시대 민중의 고통을 탁월하게 그려낸 신경림, 판소리 형식으로 정치 풍자와 생명사상을 설파한 김지하, "개인적 고뇌보다 집단 전체의 운명을 넓은 역사적 원근법"으로 포착하는 서사시 영역에서 "독특하면서도 야심적인 실험"에 성공한 고은을 높이 평가한 것은 시인의 문학적 충동과 그 형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시대상황이 빚어낸 "화해불능의 난관을 돌파"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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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인문산책][한겨레BOOK] 이권우의 인문산책

한국 현대시: 그 문학사적 맥락을 찾아서
염무웅 지음 l 사무사책방(2021)

오늘 우리가 즐겨 읽는 서정시는 어떤 탄생과 성장의 길을 걸었을까? 평소 관심을 기울일 만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 주제를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전적으로 염무웅의 <한국 현대시: 그 문학사적 맥락을 찾아서> 덕이었다. 젊은 날 문학을 보는 눈을 키워준 노평론가의 글모음이라 관심을 두고 서문을 읽다가 이 주제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길래 내처 다 읽어냈다.

우리 역사가 자생적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했듯, 한시, 시조, 장시조 같은 전통시는 “사회변화에 부응하여 자연스럽게 발전되고 자기극복을 함으써 자생적으로 근대시”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임화가 말한 그 유명한 이식문학론에 적격한 사례가 나타난다. 우리 근대문학사에 최초로 등장한 시집은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였다. 염무웅은 수입된 외국문화와 자기 고유문화의 치열한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고 이식이라기보다는 “서구문학에 대해서 행하는 우리 민족문학의 역사적 전유”라 말하자 제안한다.

염무웅이 보기에 한용운, 김소월은 시문학사에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이런 시적 성취를 보여준 비결이 궁금할 정도다. 단, 게송과 선시라는 불교적 전통이나 민요를 활용했던 두 시인의 시형식을 직접 계승한 시인이 없다는 점에서 오늘의 서정시에 규범적 힘을 발휘하는 시인은 정지용, 임화, 김기림, 백석, 이용악, 서정주라고 적시한다.

정지용의 ‘향수’를 분석한 글은 우리 근대시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일단 그 주제는 물론이고 시 구절 자체가 동양의 고전을 교묘하게 차용했다. 거기다 시의 발상과 모티브를 비롯해 이미지와 표현에 이르기까지 스티크니의 ‘추억’을 모방했다. 이식의 강력한 자장에 놓여 있으나 그는 앞에서 말한 창조적 전유의 연장선에서 “원작의 평범한 추억담을 미묘한 울림의 한국어에 담아 탁월한 예술적 형상으로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했다. 이식 또는 모방과 창조성의 갈등을 넘어선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김흥규는 윤동주론을 쓰면서 삶의 윤리성과 실천성이 시적 탁월성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바는 아니라 말했다. 삶과 작품은 분리되어 있는 법이라는 관점이다. 염무웅은 이 문제의식을 일정 수용하면서도 위대하지 않은 삶이 위대한 문학을 낳을 수 없다고 명토 박는다. 문학과 행동의 긴장을 헤치고 윤동주의 시세계가 우뚝 솟은 셈이다. 김수영은 모더니즘과 사회의식의 갈등관계를 넘어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었다.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을 “기존의 문학형식에 대한 위협”으로 이루어낸 셈이다.

민요의 현대적 수용을 통해 같은 시대 민중의 고통을 탁월하게 그려낸 신경림, 판소리 형식으로 정치 풍자와 생명사상을 설파한 김지하, “개인적 고뇌보다 집단 전체의 운명을 넓은 역사적 원근법”으로 포착하는 서사시 영역에서 “독특하면서도 야심적인 실험”에 성공한 고은을 높이 평가한 것은 시인의 문학적 충동과 그 형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시대상황이 빚어낸 “화해불능의 난관을 돌파”해서다.

다 읽고나니 비로소 그의 문학적 세계관이 보였다. 서로 길항하고 갈등하는 두 가치의 강고한 바위를 뚫고 용출한 언어적 형상을 상찬하는, 이름하여 중용의 시학이라 이름 붙일 만했다. 귀하고 반드시 배워야 할 문학관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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