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십의 전형, 이순신, 불운 탓하지 말고 현실적인 준비를 하라

2022. 2. 1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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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몇 주 후인 3월9일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이날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은 향후 5년간 국정을 이끌게 된다. 영광스러운 자리이면서도 그 무거운 책임감으로 인해 아마도 당선자는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번민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진정한 리더십을 다시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수없이 많다. 코로나 팬데믹의 의료 정책, 인플레이션과 저성장의 경고등이 켜진 경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적 현안. 폐업의 기로에 선 팬데믹 하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일할 곳이 없어진 청년 세대의 고민, 하늘 끝까지 치솟은 부동산 가격, 여기에 여전히 마주앉지 못하는 남북문제 등등 풀어야 할 현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또 있다. 갈등을 넘어 분열로 치닫은 보수와 진보 그리고 각 진영과 단체의 대립, 젠더이슈로 불거진 사회적 성 갈등 역시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사회의 불신풍조이다. 우리 사회는 남의 의견, 생각을 경청 혹은 존중하기는커녕 나와 다른 생각과 의견 등은 모두 부정하고 음모론으로 바라본다. 상대를 협의와 소통의 대상이 아닌 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갈등은 이제 세대와 남녀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번지고 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번 대선은 처음 겪는 상황이다’라며 고개를 젓는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의 즐거운 고민’이 아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고민’의 심정을 토로한다. 물론 모든 것을 대통령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화된 정부와 관료조직, 경제 및 사회단체를 비롯해 국회, 사법기관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이자 국가 원수라는 공식적 지위를 가진 리더이다. 민주적 리더의 선출인 선거를 앞두고 ‘고민과 숙고를 거듭하는 국민’들이 대다수라는 점에서 향후 선출된 리더의 행보와 그가 보여줄 능력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향후 선출될 리더가 완벽한 철인, 현인 혹은 전지전능의 능력자이거나 결점 없는 완전한 인격체라고 생각하거나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인간이고 그래서 단점과 약점, 모자라는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의 한국 사회의 난맥을 지켜보면 설사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께서 현신해 국정을 펼쳐도 과연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복잡하고 해결에 지난한 시간이 필요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대를 갖는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를 반대한 수많은 국민들을 껴안고 보듬고 분열과 갈등을 화합과 소통으로 치유할 수 있는 리더가 등장하기를 진정 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이다. 설사 그 리더가 내가 원하지 않는, 투표하지 않은 리더일지라도 그의 향후 5년간의 국정운영을 진정한 마음으로 응원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당면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리더십’을 다시 생각한다. 역사에서 리더십의 표본 같은 인물들은 많다. 우리에게도 세종대왕이라는 한민족 최고의 성군이 있었고 그밖에 성공한 리더십을 보여준 위인들 역시 많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찾고, 원하는 리더십의 정체는 팽창과 확산, 발전과 개발의 ‘마이웨이 리더십’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일 것이다. 이 통합에는 당연히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고귀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고 통합을 부르짖는 리더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리더는 그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게다가 리더가 우선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나 야망의 실현이 아닌 구성원의 안녕과 건강한 사회 구축이여야 한다. 그리고 헌신적인 희생 정신, 솔선수범의 모범적 자세, 위기를 돌파할 자질과 능력, 그 능력을 펼쳐낼 의지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런 리더십에 부합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과 함께 한민족 양대 위인이자 누구나 존경하는 성웅 이순신이다.

▶리더십의 모든 것을 갖춘 리더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23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 신화적 존재였으며 목민관으로는 백성을 최우선으로 사랑한 애민정신의 소유자였다. 또 불리한 여건에서도 불만보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생각한 충성심 가득한 신하였다. 두 번의 백의종군을 당하면서도 상관과 조직의 불의 앞에 결코 무너지거나 눈을 감지 않은 강직한 인물이었고 원칙의 적용에는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신념가였다. 또 있다.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14년간 변방의 하급장교직을 전전했지만 불평불만 없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조직원이었다. 그는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의 막중한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장수들의 의견에 귀를 열었고 조직의 단합된 의지가 분출하는 에너지의 강대함을 깨달은 소통의 달인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정체이다. 그의 애민, 원칙, 준비, 소통, 의지 등등의 리더십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이 모든 리더십이 하나가 되어 그는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로했다. 그가 남해바다를 장악해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의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전쟁을 치룰 수 있었고 그의 승리는 좌절과 실망에 빠진 백성과 장수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항전의 정신을 일깨워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억울하게도 왜군과, 그의 전공을 시기하는 일부 관료들의 반간계에 넘어간 선조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래도 자신의 직분을 다했고 모든 것을 다 잃었으며 이름뿐인 수군의 리더가 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의 이 같은 희생 정신과 구국의 리더십은 후일 조선의 왕은 물론 관리. 그리고 백성들에게 ‘올바른 리더십,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이순신은 중앙정부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둔전을 마련해 백성의 기본적인 삶을 해결하며 군량미를 비축했고 법에 따른 원칙을 우선했지만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부정 축재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질시와 모함에 따른 비합리적인 대우에도 결코 조직을 배신하거나 백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는 왜군과 싸우고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서도 자신의 직분을 다한, 한마디로 완벽한 리더였다.

▶불운을 탓하지 않았던 이순신

이순신은 154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를 지냈다. 하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덕수 이 씨인 아버지는 이정, 어머니는 변씨이다. 어머니는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 등을 잘 키워낸 현모였다. 이순신은 서울로 올라와 건천동 즉 지금의 충무로에서 자랐다. 당시 같은 마을에 류성룡이 있어 두 사람은 그때부터 교류했다. 류성룡은 저서 『징비록』에 이순신에 대해 ‘어릴 때부터 큰 인물로 자라날 자질을 갖추었다’고 기록했다.

이순신은 28세에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지만 시험 도중 말이 거꾸러지며 낙마해 왼발을 다치고 낙방했다. 그 후 32세에 무과 식년시 병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늦은 나이였다. 이순신의 첫 임지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종9품이었다. 직무는 국경 수비. 이후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가 되었으나 곧 충청도절도사 휘하 군관으로 갔다. 당시 선조는 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보고 무인 발탁을 서둘렀다. 이때 이순신은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가 되어 수군과 인연을 맺는다. 그런데 당시 전라좌수사가 발포진 관사 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겠다는 것을 이순신은 반대한다. ‘관사의 나무 역시 나라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순신의 정당한 반대에 마음이 상한 상관은 이순신의 인사고과에 최하점을 준다. 해서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1583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종사관이 된다. 이때 부친상을 당한 이순신은 3년 시묘를 하고 사복시 주부로 복직한다. 하지만 그의 변방 임지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함경도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사의가 되었으나 녹둔도에서 이순신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음으로 백의종군한다. 그러다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으로 부임한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잘 위무해 그 공으로 고사리진과 만포진 첨사를 겸직한다. 그리고 진도 군수로 명 받으면서 동시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임명되고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처음으로 수군 부대를 휘하에 두게 된다. 이때도 대신과 간관들이 종6품에서 정3품으로 승진하는 특진은 전례가 없다고 반대했지만 선조의 용단과 류성룡의 천거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순신의 나이 47세 때이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은 조선에게는 천만다행이고 선조의 여러 인사조치 가운데 최고의 인사인 셈이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딱 1년 전, 이순신은 그나마 1년 동안 수군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이순신은 늦은 나이인 32세에 벼슬길에 올랐다. 4년 전 무과 응시에서 낙방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활을 쏘고, 말을 타고, 글을 읽으며 자신을 연마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갖는 좌절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불운을 자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연마하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종9품의 낮은 직품에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기까지 무려 14년 동안 변방과 야전, 육군과 수군을 번갈아 맡으며 떠돌았다. 그럼에도 그는 승진을 위해 상관에게 아부하거나 그들의 부당한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그는 직분을 망각하고 부패한 상관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불이익을 받았다. 발포진 관사 내의 오동나무 사건 때도 이순신은 자신의 직속 상관의 청을 정당한 이유와 명분으로 거부했고 이후 불리한 처분을 받았으나 자신의 정당성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첫 번째 백의종군에 처해질 때도 변명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선처를 부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조정에서도 이순신의 존재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를 대비한 준비된 리더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수군 정비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수에 좌수영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훈련을 강화하고 전투선을 건조하고 수리했다.

그리고 그는 거북선을 건조했다. 거북선은 단순한 전선이 아니다. 이는 일본 수군의 특징을 파악한 연구의 산물이다. 일본 전선은 조선 판옥선과는 달랐다. 조선의 판옥선은 마감재가 두껍고 단단해 왜선과 정면에서 부딪쳐도 승산이 있었지만 대신 느렸다. 반면 일본 수군은 빠른 전선을 이용해 조선군의 배에 갈고리를 걸고 두 선박을 연결한 후 장검을 들고 육박전을 하는 전술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갈고리를 걸거나 건너올 수 없는 거북선을 만들었다. 또한 조선 수군의 특징을 살려 화포를 건조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함대를 점검하고 5월4일 첫 출전했다. 옥포해전이다. 이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함대는 전선 24척, 협선 15척 등의 대함대였다.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도 합류했는데 원균이 지휘하는 함대는 불과 수척이었다.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선 26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불과 부상자 3명이었다. 이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조선군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였으며 조선군에게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신호탄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이길 수 있는 전투를 했다. 해류, 지형, 날씨 등을 감안해 적을 아군이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해 전투를 벌인 것이다.

고성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격침시켰는데 이때 처음으로 거북선이 참전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이 쏜 조총에 왼쪽 어깨를 다쳤다. 또한 당항포에서 왜선 39척, 율포에서 7척의 왜선을 격침시켰다. 곧이어 한산도 대첩에서 그 유명한 학익진을 펼쳐 왜선 59척을 격침시키며 정헌대부(조선의 직급 중 하나)가 되었다. 또 부산포에 왜선 약 500여 척이 정박 중이라는 정보를 듣고 진격을 명했다. 하지만 수하 장수들이 왜군의 세가 강해 진격에 주저하자 맨 앞에서 독전기를 들고 진격해 왜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안골포에서 적선 4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일본에서 오는 병력과 군량미, 군장비의 보급로가 끊기면서 고전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전라, 충청의 서해안 곡창지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는 해전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 임진왜란 발발 1년 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의 모든 수군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굴의 의지와 신념의 주인공

1597년, 전세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명나라가 참전하고 이순신이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자 일본은 강화를 요구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군사를 훈련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백성들의 생업을 위해 힘을 다했다. 당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함대는 전력에서 일본 수군을 압도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순신이 원균에게 인계한 조선 수군은 한산도 근거지에 비축한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약 9900석의 군량미, 4000여 근의 화약, 전선에 배치된 총통을 제외하고도 약 300여 자루의 총통, 전선은 크고 작은 것을 합쳐 약 300척에 달했다. 모두 이순신의 노력과 혜안으로 마련한 식량과 무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당시 일본군은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순신을 제거하고 싶었다. 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반간계. 즉 조정 조정을 속여 조선 조정 스스로가 이순신을 제거하도록 만든 것이다. 거짓 정보에 속은 비변사는 이순신에게 출격을 명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기후와 불리한 여러 이유를 들어 출격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했다고 분노해 한양으로 압송하라 명하고 후임에 원균을 임명한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파직되고 압송된다. 당시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의 명을 무시한 죄, 적을 눈앞에 두고도 출진하지 않은 죄, 다른 장수의 공을 시기하고 이를 가로챘다는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이순신의 한양 압송길에 백성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이순신은 이항복, 이원익, 정탁, 류성룡 등이 힘을 써 풀려났지만 권율 장군 휘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이순신의 존재는 선조에게 전쟁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그에게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이 무렵 이순신의 뒤를 이어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그야말로 전멸당한다. 무려 300여 척의 위용을 자랑하던 조선 수군은 궤멸 당하고 불과 12척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와 대신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나간 선조에게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할 것을 주청한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수군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전선 12척과 군사 백수십 명이 전부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은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 명한다. 조정에서 보아도 이들이 수군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소를 올렸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이순신은 12척에 1척을 더해 총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명량해전을 준비한다. 그는 울돌목의 격류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300여 척의 왜군과 맞선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대장선이 선두에 나섰지만 나머지 12척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왜군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순신은 굴하지 않고 대장선 1척으로 무려 133척의 왜선과 대결해 적선 31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의 고군부투를 지켜보던 나머지 군선들도 전투에 참전했다. 이순신은 명량대첩의 공로도 다른 장수들에게 돌리고 다음 해전을 준비했다.

1598년 11월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퇴각을 시작했다. 총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 앞바다에 모였다. 이순신은 한 명의 왜군도 일본땅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승전 후 이순신의 서거를 알게 된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통곡했다. 그들의 진정한 리더가 숨진 것이다. 전사 소식을 알고 조정은 이순신을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선무공신 1등 그리고 덕풍부원군의 군호를 내려 그의 공을 치하했다. 이후 이순신은 정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되었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는 애민 정신

이순신은 백성을 사랑했다. 그는 백의종군 후 수군을 재건할 때도 백성들에게 둔전을 마련해주고 정착을 도왔다. 그의 진영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곡식을 비축하고 생활품도 마련해 백성들이 한산도에 정착하도록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교지를 적을 종이도 부족하자 종이를 조정에 공급했고 식량 또한 자급자족했다고 한다.

영화 ‘명량’을 보면 백성들이 몸을 던져 이순신을 돕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화약을 가득 실은 배가 대장선에 가까이 오자 백성들은 소리를 질러 이를 알렸고, 이순신의 대장선이 울돌목의 급류에 휘말리자 어부들이 배를 몰아 대장선에 갈고리를 걸어 끌어냈다. 영화에서 이순신의 아들 이화가 이순신에게 묻는다. “아버님은 왜 싸우려 하십니까?” 이순신은 말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그 충은 백성들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도 있는 것이다’라고. 이순신은 진정 백성을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이 백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자 보루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순신은 백성을 사랑하면서도 신상필벌은 분명했으며 원칙 앞에서는 공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술을 멀리하고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적과 마주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겸손해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이순신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는 이순신을 일컬어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하며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이 탄 가마를 앞서지 말라 명했다. 진린은 이순신이 서거하자 배에서 3번이나 거꾸러지며 ‘이제는 조선 땅에서 나와 같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구나’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진정한 리더의 진면목을 명나라 장수도 알아본 것이다.

[글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17호 (22.02.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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