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불러일으킨 기후위기[할 말 있습니다](1)

2022. 2. 16.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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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인류 반격이 시작됐다.”

2020년 12월 8일 영국에서 마거릿 키넌(90) 할머니가 모 제약사의 코로나19 백신을 처음 접종한 다음 날 한 조간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입니다. ‘인류의 반격’이란 표현이 멋져 보였는지 몇몇 언론도 연이틀 비슷하게 제목을 베껴 썼습니다. 본질을 간과하고 현상에만 맴도는 한심한 저널리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반격이라니요. 어떤 인류의 무엇을 향한 반격일까요? 감염병, 바이러스에 대한 반격인가요?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코로나19는 신의 메시지

코로나19는 무차별적인 개발과 자연파괴, 자본과 에너지가 상징하는 인간의 소비 욕망에서 탄생했습니다. 그 탐욕스럽고도 무신경한 소비 현장은 육식, 야생동물 서식지 삭제, 석탄과 원자력 발전, 제품 생산과 운송과 판매를 비롯한 온갖 과정에서 일어나는 탄소배출, 군비경쟁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한몸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비이자 파괴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 곧 바이러스의 근원’인 것입니다. 자본을 축적하며 완성해왔고, 날로 고도화하고 있는 일상은 이미 완고한 기득권입니다. 점점 더 편안함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먹고 자고 배설하는 하루하루가 폭주하는 ‘욕망 전차’에 계속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매개로 지목하는 박쥐, 낙타, 천산갑 같은 동물들은 사실 죄가 없습니다. 실험실 유출설, 백신 음모설을 믿습니까. 음모설 맹신은 현상의 이면을 본다는 일시적인 착각을 선물할지언정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게 하지는 못합니다. 백번 양보해 음모설 일부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이 역시 인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류의 반격’은 결국 우리의 욕망에 당한 우리가 우리를 향해 반격한다는 ‘참담한 블랙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그저 1차원적으로 ‘반격과 퇴치’ 정도를 목표로 삼는다면 등 뒤에서는 코로나19보다 더 가공할 바이러스들이 줄 지어선 채 낄낄거리며 등장 순서만을 기다릴 게 뻔합니다.

코로나19를 단지 재앙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재앙인 동시에 지혜의 전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신(邪神)이자 사신(使臣·Messenger)인 셈이지요. ‘의인(義人) 10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하지 않겠다’는 창세기 일화에 빗대자면 이 바이러스는 지구에 온 신(神)의 마지막 사신일지도 모릅니다. 감염병이 휩쓴 지구에 멸종위기에 처한 듀공과 돌고래 떼가 돌아오고, 15만여마리의 홍학 떼가 출몰하고, 뿌연 히말라야 연봉들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경복궁에는 너구리 가족이 산책을 하고, 무엇보다 중국발 미세먼지가 줄어 아주 오랜만에 투명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마스크를 쓰니 맑은 공기가 찾아오는 역설! 감염병으로 인간의 움직임이 멈춘 곳에 나타난 이 역설적인 현상을 보면 자연과 신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욕망을 멈추라, 멈추기 어려우면 과감하게 줄여라, 기득권이 된 일상을 다시 살아라. 일상의 대전환을 시작하지 않으면,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멸할 것이니라.”

일상에서도 ‘탄소발자국’ 따져봐야

환경문제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인 것도 없습니다. ‘기후깡패’로서 이미 충분히 지구를 파먹고 망쳐놓은 선진국 중심의 에너지전환 정책이 제3세계 민중의 식량과 기회를 빼앗는 ‘사다리 걷어차기’는 아닐까요. 작게는 커피전문점의 친환경 이벤트부터, 요즘 유행하는 기업의 ESG(환경·사회·투명) 경영이 정말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것인지, 위장환경주의(Greenwashing)는 아닐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텀블러를 몇번이나 써야 종이컵 하나를 줄이는 효과가 있는지 계산하고, 우리 뱃속으로 들어오는 소 한마리와 내 자동차가 남기는 탄소발자국의 비중을 비교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누리는 모든 의식주와 물건들의 탄소발자국도 따져봐야 합니다. 고작 텀블러를 쓰고 분리수거를 하는 정도로 ‘지구를 지킨다’고 착각하고 안심하고 자위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경계대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최저수준인 전기세의 누적적자 문제도 이대로 방치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물가와 표를 의식한 정치논리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것이 아닐까요. 전기세를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 환경세(탄소세)를 얼마나 덧붙일지, 일상과 연계한 네가와트(Negawatt) 운동은 또 어떻게 펼칠 것인지 진지하게 토론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일상 대전환의 철학과 통합적인 상상력으로 지혜를 모을 때 비로소 기후위기 해결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습니다. 모두의 에너지(힘)를 ‘모으는’ 일이자 모두의 에너지(소비욕망)를 ‘줄이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전 세계 인구가 80억 가까이 된다지요. 가끔은 제 존재를 80억분의 1로 생각해봅니다. 우주 저 멀리서 지구를 바라보는 상상도 해봅니다. 정말 먼지만도 못한 미물입니다. 80억분의 1이라는 존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해결 방향도 속삭이고 있습니다. ‘분산과 연대’, 흩어져 뭉치라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바이러스의 감염경로가 연기론, 즉 촘촘하게 이어진 인연인 점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흩어져 있는 80억의 점이 그물처럼 연대하지 않으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는 더 무서운 기후위기에 갇혀 결국 파국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SNS도 알고 보면 이 인연의 인드라망, 그물이자 연대의 도구입니다.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환경단체들은 미진하다 비판하고, 기득권 에너지 산업계는 과도하고 급박해서 실현 불가능한 목표라고 비난합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터졌을 때는 숨어 있던 원자력 마피아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입니다. 수명이 한참이나 남은 원전들이 당장 가동을 멈춰 전력수급에 큰 문제라도 발생할 것처럼 겁을 주고, 소형모듈원전(SMR)만이 친환경 무결점 에너지의 대안인 것처럼 데마고기 수준의 선동을 합니다. 탄소중립 시나리오에 반대하는 이들과 언론이 종종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2050 탄소중립은 장밋빛 미래가 아닙니다. ‘지구 기온 상승 1.5도’를 사수하자는 목표치는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류가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최악을 막으려면 화급히 에너지전환과 탄소중립에 나서야 합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지구 문제는 존재의 문제

대부분의 부모는 밖에서 자녀가 다치거나 폭행을 당하면 격분합니다. 끝내 폭력 원인을 밝혀내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녀 인생에 전대미문의 폭력으로 다가오는 기후위기에는 다들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합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이 자녀세대들의 삶을 통째로 지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도 눈을 감습니다. 정녕 자식을 위한다면 더 크게 후회하기 전에 재앙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최대한 가깝게 잡고서 뭐든,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구 문제는 존재의 문제이자 종교문제입니다. 일부 종단을 제외하면 대다수 종교인도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에 무감각합니다. 시대문제에 예민하게 촉수를 뻗어야 할 문학조차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환경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문학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시대의 전위에서 현상과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고 할 때 당대 문학의 자세는 참으로 안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망가지는 지구 광장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한 채 여전히 골방에 박혀 생산하는 공허한 자의식의 시와 소설들이 못내 아쉽습니다. 마스크와 코로나19를 단지 작품 소재로만 활용하는 데 머무르는 작가들의 태도 또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후위기 앞에서는 복잡한 플롯이나 난해한 문학적 상징을 고민할 게 없습니다. 1980년대에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문학이, ‘시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큰 역할을 했던 시가 자꾸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시대정신을 놓친 채 소수 독자만 찾는 ‘그들만의 리그’가 돼버린 건 아닌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기후위기는 독재와 민주주의의 파괴 이상으로 거대 폭력과 억압이 되어 눈덩이처럼 돌진해오는 중입니다.

기후위기를 실감케 하는 기상이변은 해마다 되풀이되며 심각해집니다. 2020년 여름, 우리는 최장의 장마를 경험했습니다. 50일 넘는 장마로 거의 여름 내내 비가 왔습니다. 곳곳에서 강둑이 터지고 지반이 약해져 예상치 못한 산사태를 겪었습니다. 기나긴 가을 가뭄이 뒤를 이었고, 겨울에는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보름씩 한파가 몰아쳤습니다. 지구가 많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여러차례 경고를 보냈건만 꿈쩍도 하지 않으니 정말 본격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 듯합니다. 기후위기는 ‘사람을 위협하는 코끼리이자 독사이고 검은 쥐와 흰 쥐’(불교벽화 ‘안수정등도’에 나온다)의 형태로 수시로 모습을 바꿔가며 다가옵니다. ‘기후온난화’라는 말은 더 이상 쓰지 맙시다. 이 끔찍한 상황을 어찌 ‘온난’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육식

기나긴 장마가 끝나가던 8월 중순 어느 날, 아침저녁을 채식으로 바꿨습니다. 처음 몇 달은 소화가 되지 않아 무척 고생했지만 채소를 볶아먹기도 하면서 적응해갔습니다. 하루 두끼를 채식으로 바꾼 명분은 ‘뱃살 감량’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 그랬다는 거고 속내는 ‘내 몸부터 지금보다 좀더 작은 오염원으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축의 메탄 배출, 공장식 축산 시스템, 사료 생산과 원시림 파괴 등 육식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들이 온실가스 배출 원인의 50% 이상을 차지한다는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채식을 강권하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점심은 회사 동료들과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이따금 주말과 저녁 모임에서 폭식도 합니다. 다만 채식한 뒤로 음식물쓰레기 배출이 거의 없어지고 몸이 전보다 더 건강해진 느낌이라는 얘기는 종종 합니다.

‘언제부터 왜 나는 육식을 하게 됐나’ 생각해보니 별 이유가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육식을 시작했더군요. 태어나보니 지구였고 한반도 남쪽이었고 이곳에선 다들 자연스레 육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논리로 자연스럽게 채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이어왔지만 부작용은커녕 훨씬 더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아직 채소와 올리브유 같은 것들이 몸에 들어오는 과정에 남기는 ‘탄소발자국’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이왕 지구에서 살고 죽기로 한 이상 ‘식재료와 기후위기의 상관관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붙잡고 갈 화두입니다. 잘 먹고, 연대해야만 하는 우리 모두가 함께 무사히, 잘 살아내기 위해 나누고 싶은 고민입니다.

박신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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