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윤슬’ 일렁이는 바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모래밭에서 그는 시를 썼다, 꽃빛을 연주했다

남해/이혜운 기자 2022. 2.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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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윤한과 떠난
1박2일 남해 치유 여행
피아니스트 윤한이 가족과 함께 한 달 살기를 한 남해 창선면 서대리의 하얀집 마당에서 자신이 창작한 곡을 연주하고 있다. /영상미디어 양수열 기자

고요한 겨울 바다. 낮게 깔린 구름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흐린다. 뭉근한 구름을 비집고 떨어진 한 줄기 햇빛이 수면에서 부서져 반짝인다.

“저게 ‘윤슬’이에요.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하죠. 남해 바다는 파도가 잔잔해 물 반짝임이 유난히 예뻐요. 그걸 본 한 시인이 ‘꽃빛 같다’고 했대요. 그 말을 듣고 숙소로 돌아가 ‘꽃빛’이라는 곡을 만들었어요.”

<1일 차> 11:00 죽방렴

경남 남해군 죽방렴에서 피아니스트 윤한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다 곳곳에는 고동색 나무대로 만든 지지대가 있다. 지족 해협의 거센 물살을 이용해 물고기를 원통에 가두어 잡는 ‘죽방렴’이다. 멸치를 잡는 곳에서 꽃빛을 떠올리다니!

“여기서 잡은 멸치도 기가 막혀요. 남해 앵강마켓에서 샀는데 새끼손가락 정도 되는 멸치가 어찌나 고소하던지. 비늘이 하나도 상처 입지 않고 은처럼 반짝거려요.”

고동색 나무대를 이용해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죽방렴.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윤한은 올해 시작을 가족과 함께 남해에서 한 달 살기로 보냈다. 딸 지오가 태어났을 때 백일잔치를 위해 남해로 왔다가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2010년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뒤 뮤지컬 배우,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 출연 등 스타 뮤지션으로 살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창작 활동에 도움을 주는 영감이었다. 2017년부터 경희대 실용음악학과 교수로도 재직 중이라 그에게는 방학이라는 물리적인 여유 시간도 있었다.

“남해는 해가 지면 적막처럼 어둡고 조용해요. 빛과 소리가 사라지지요.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영감과 치유를 받았어요.”

지난 24일부터 1박 2일 동안 그를 따라갔다. 윤한과 함께하는 ‘남해 음악 치유 여행’이다.

12:00 은모래비치길

죽방렴에서 차를 타고 물미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도로로 불린다.

”때때로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보면/ 당연한 듯 여겨지고/ 여전히 모두가 곁에 있고.”

차에서는 존 메이어의 ‘스톱 디스 트레인’이 흘러나왔다. 윤한이 드라이브할 때 즐겨 듣는 음악이다.

그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아직 ‘상주은모래비치’까지는 거리가 남은 남해대로 675번길 위였다.

“여기가 은모래비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에요. 은모래비치는 너무 관광지 느낌이 나잖아요. 화장실에, 주차장에, 장사하는 분들까지 수십 명이 있으니 전혀 풍경을 못 느끼겠더라고요.”

차에서 내려 도로 옆 나무 뒤편으로 걸어갔다. 발밑으로 은빛처럼 부서지는 모래사장과 오팔처럼 부서지는 바다가 펼쳐졌다.

“전 유명한 관광지를 가는 것보다, 그곳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을 더 좋아해요. 아름다운 것은 한 발짝 떨어져 볼 때 더욱 빛나는 법이죠.”

아침 수산시장에서 가장 좋은 생선으로 사장님 마음대로 내는 오마카세집 ‘갯내음식당’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3:00 갯내음식당

점심시간이 되자 그가 안내한 곳은 남해군 미조면 ‘갯내음식당’(055-867-1656)이다. 남해군청에서 소개받은 진짜 지역 맛집이라고 했다. 1인당 4만8000원을 내면 사장님이 그날 재료에 따라 오마카세(맡김차림)로 내주는 곳이다. 저녁 손님은 딱 두 팀만 받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다 냄새 물씬 나는 주인이 나온다.

“오늘은 감성돔이 좋아요. 볼락과 우럭도 맛있게 해줄게요. 우리는 아무리 예약을 해도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조리를 시작하기 때문에 조금 기다려야 해요.”

분홍색 반짝이는 도미회 옆으로 전복, 개불, 새조개, 해삼, 소라 등의 찬이 깔린다. 경상도 횟집답게 쌈장, 초장 등의 장이 나온다.

“우리는 장을 오미자 효소, 감식초 등을 넣어 직접 만들어요. 밑반찬도 당연히 직접하고요. 볼락회도 뼈를 하나하나 다 뺐어요.”

옥돌 위에 통통하게 누워있는 회를 한 점 집으려는 순간 윤한이 말린다. 남해 회는 유자 소주와 함께 먹어야 한단다.

진로 소주 한 병을 소주 컵으로 두 잔 따라낸다. 남은 공간만큼 남해 특산물인 유자 원액을 채운다. 잘 흔들어 따르자 소주잔에 가득 오렌지빛 유자 소주가 담긴다. 달콤새콤한 유자 소주 맛이 생선회 특유의 향을 싹 잡아준다. 회 한 점, 소주 한 잔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알딸딸하다. 전형적인 앉은뱅이 술. 여기서 멈추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올라가는 금산 보리암.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5:00 보리암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할 곳. 금산(錦山) 보리암이다.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국내에서 기도발이 잘 먹기로 유명한 3대 도량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수도한 절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한 후 왕위에 오른 곳이기도 하다.

윤한은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보리암에 올랐다고 했다. 바위들이 장엄한 기운을 내뿜는 보리암을 향해 걷다 보면 머릿속 잡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이란다.

‘탁탁탁탁.’ 목탁 소리가 들리자 그는 암자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암자 밑으로 다도해 섬들이 한눈에 보인다. 하늘에 배가 떠 있는 것 같다.

등산을 했으니 목이 마르다. 조금만 올라가면 금산산장이 나온다. 금산의 절경을 보며 물도 마시고, 컵라면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먹는 컵라면과 비견될 맛이다. 풍경에 취해, 맛에 취해 있다가는 금방 해가 진다.

보리암 아래로 다도해의 섬들이 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6:00 미조항

겨울 남해의 낮은 짧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다. 남해의 나폴리, 미항(美港)으로 불리는 미조항이다. 어부들이 없는 고즈넉한 미조항의 오후는 한가롭다.

미조(彌助)항은 원래 미륵이 도운 마을이라는 뜻. 그러나 윤한은 이렇게 말했다.

“미조라는 단어에는 무리에서 떨어져 길 잃은 철새[迷鳥]라는 뜻도 있대요. 단어가 너무 예뻐 작곡 중이에요.”

17:00 돌창고 프로젝트

이렇게 돌아다녔더니 배가 출출하다. 그의 단골집은 남해 서면에 있는 카페 ‘돌창고 프로젝트’(0507-1333-1965)다. 돌창고 프로젝트란, 남해 곡식 창고인 돌창고를 카페와 문화 공간으로 개발한 곳. 1920년대부터 남해에서 화강암으로 농업 창고로 지었다가 폐허 된 곳을 2016년 문화 기획자 최승용씨와 도예 작가 김용호씨가 만나 개발했다.

버려진 곡식 창고를 리모델링한 카페 ‘돌창고 프로젝트’의 인기 메뉴인 미숫가루와 덩어리 쑥떡(위). 카페 1층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아래).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돌로 된 이글루 같은 공간. 내부로 들어가니 1층은 전시 공간, 2층은 카페 공간이다. 대표 메뉴는 미숫가루와 덩어리 쑥떡. 국내 4대 떡집인 중현떡집에서 남해쑥을 넣고 만든 것이다. 이걸 요구르트 같은 달콤새콤한 우윳빛 소스에 찍어 먹는다. 쫄깃하고 말캉한 맛이 입안을 기분 좋게 만든다. 불빛 하나 없는 평원에 우뚝 솟은 돌창고, 그 안에서 미숫가루와 쑥떡을 먹고 있자니 한국이 아닌 어느 요르단 아지트에 있는 것 같다.

19:00 남해의 하얀 집

남해 한 달 살기의 가장 큰 단점은 배달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두워진 저녁, 윤한이 가족과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는 남해 창선면 서대리의 하얀 집으로 왔다. 에어비앤비에서 구한 곳이다. 거실에서는 바다가, 뒷마당으로는 산이 보인다. 거실에는 야마하에서 보내준 피아노가 놓여 있다.

“거실이 원형 돔 형태라 소리의 울림도 좋아요. 주변 집들도 붙어 있지 않아 마음껏 연주할 수 있고요.”

뒤편 마당으로 이동해 장작에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며 주변 한기를 따뜻하게 데운다. 주변 빛이 없어 좋은 점은 별빛이 잘 보인다는 점이다. 별자리 앱을 켜 하늘에 대본다. 저건 황소자리, 저건 오리온자리.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리 위로 별빛은 쏟아질 것 같다.

<2일 차>

10:00 카페 향이

남해의 아침은 이르다. 새벽 4시면 닭이 운다. 그러나 아침에 문을 여는 커피숍은 없다. 모닝 커피를 마시려 이동한 곳은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 창선면 ‘카페 향이’(055-864-3200)다.

김해에서 귀촌한 사장님이 직접 커피를 내리는 곳이다. 2층 통창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단팥죽, 꿀자몽, 에그샌드위치 등 아침 메뉴도 풍부하다. 너무 달지 않은 단팥의 포근한 맛과 꿀이 잔뜩 들어간 자몽의 상큼함이 잠을 깨운다.

“여기에 앉아 지리산을 보며 책도 읽고, 간단한 업무도 했어요. ‘내가 남해에 있구나’ 실감할 수 있는 곳이지요.”

11:00 가천다랭이마을

다시 차를 타고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이탈리아 남부 해안 같은 절경을 따라 도착한 곳은 가천다랭이마을. 비탈진 계단을 긴 노동의 시간으로 일군 곳이다. 그러나 겨울의 다랭이마을은 초록빛이 아닌 갈색빛이다. 수확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도로를 따라 마을 건너편으로 간다. 오른편에 바다를 두고 색색의 지붕들이 펼쳐진다. 문화 사업 일환으로 다랭이마을 지붕에 그려놓은 꽃 그림들이다. 갈색의 토양은 지붕 색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그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마을을 향해 한 줄기 햇빛이 내려온다.

“저걸 실버라이닝(silver lining)이라고 해요. 아무리 구름 낀 상황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있다는 것이죠. 전 이 단어도 너무 좋아해요. 제니퍼 로런스와 브래들리 쿠퍼가 출연한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도 여러 번 봤어요.”

남해에서 가장 힙한 피자집 ‘헐스밴드’의 통창으로 보이는 풍경(위). 대표 메뉴인 페퍼로니 피자. 화덕에 구워 도가 쫄깃하다(아래).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2:00 헐스밴드 & 일식면예찬

점심 메뉴는 살짝 고민했다. 남해로 출장 오기 전부터 아내 전민정씨는 둘째 날 점심은 이곳을 가야 한다고 했다.

“남해에 몇 없는 힙한 감성의 피자 집이에요. 괌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가는 길, 한자로 적힌 간판을 보자 윤한이 말한다. “아, 저기 국물도 맛있는데. 어떻게 하지?”

결론은 다 가자! 일단 아내가 추천하는 힙한 감성의 피자 집부터.

흰색 바탕의 외벽에 검은색으로 가게 이름이 적힌 남해 서면의 ‘헐스밴드’(0507-1310-9332). 전씨 말대로 괌 어느 해변가 피자 집 같다. 가게 앞으로는 해풍 나무와 바다가 있는 장항해수풀장이, 뒤편으로는 남해의 논밭이 보인다. 공간이 풍경을 이긴 걸까, 가게 내부 통창으로 보이는 남해 논밭조차 이국적으로 보인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페퍼로니 피자와 꿀에 찍어 먹는 고르곤졸라 피자. 주문과 동시에 화덕에서 구워준다. 도가 쫄깃쫄깃한 나폴리 피자 스타일. 자연 치즈로 만든 토핑도 맛있지만, 빵이 맛있어 피자의 손잡이 부분까지 다 먹게 된다. 짠 것을 먹었으니 단것을 먹어야 할 차례. 윤한이 달려가더니 초콜릿을 사왔다. 헐스밴드에서 직접 만드는 에스프레소 초콜릿이다. 봉봉 스타일로 초콜릿을 깨무니 에스프레소가 터져 나왔다.

국물이 아쉬워 달려간 곳은 일본식 라면을 파는 남면의 ‘일식면예찬’(0507-1441-2097). 대표 메뉴는 돼지 뼈 육수에 어류(魚類) 육수를 섞고 각종 해조류를 올린 ‘교카이 돈코츠 라멘’이다. 진한 돈코츠 라멘의 국물에 해조류가 더해져 시원하다. 전날 과음했을 때, 해장으로 좋다고 한다. 땀을 쫙 빼고 고개를 드니 이곳은 남해인가, 일본인가.

남해 남면에 위치한 ‘백년유자’(위). 남해 특산물인 유자 원액을 와인처럼 시음할 수 있다(아래).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4:00 백년유자

디저트를 위해 남면에 위치한 ‘백년유자’(055-864-6004)로 간다. 어제 맛본 유자 소주의 원액을 여기서 샀다고 했다. 사장님이 유자 원액과 유자몽(유자+자몽) 원액을 와인처럼 시음할 수 있게 내준다. 맛을 본 후 유자 에이드와 유자몽 에이드 한 잔씩을 사서 자리에 앉았다. 입안이 상큼하게 정리됐다.

16:00 이순신 순국 공원

탁 트인 바다를 향해 총길이 200m, 높이 5m의 거대한 벽이 서 있다. 이 벽을 채운 건 도자 타일 3850장. 노량해전을 여덟 테마로 그린 이순신 ‘순국의 벽’이다. 푸른빛 도는 은은한 도자기 벽화다.

이동환, 배형민, 김범석, 조정태, 김호민 등 5명의 작가가 도판 전문가 이호영과 함께 노량해전을 주제로 만든 ‘순국의 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여기만 오면 겸허해지고 숙연해져요.”

이곳은 관음포 앞바다.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남해군은 2017년 280억원을 들여 18만7106㎡ 규모의 ‘이순신 순국 공원’을 만들었다. 노량해전을 ‘조명 연합 수군의 출전’ ‘이순신 장군의 출전 기도’ ‘전투의 발발’ ‘치열한 전투’ ‘장수들의 죽음’ 등 여덟 테마로 구성해 이동환, 배형민, 김범석, 조정태, 김호민 등 작가 5명과 도판 제작 전문가 이호영이 맡아 만들었다. 그 벽들 한가운데 원형의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으로 만들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하고 있대요. 코로나가 끝나면, 여기서 영감 받은 곡으로 연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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