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말띠 '지워진 여성'들 되살아나[책과 삶]
[경향신문]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음
문학과지성사 | 259쪽 | 1만4000원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날, 채진리는 등굣길에 ‘쿵’ 하는 짧은 떨림을 느낀다. 세상이 그 순간 크게, 그것도 나쁘게 변했다는 것을 진리는 직감한다. 학교에 도착했더니 동급생의 절반이 세상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남학생들은 진리를 비롯한 여학생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학교가 원래는 남학교였다고 주장한다. 다정했던 남자친구 훈우는 진리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태도도 무례해졌다. 그날부터 학교는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다. 진리의 여성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라지고 나면 누구도 그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진리가 태어난 1990년은 ‘백말띠의 해’다. 남아선호가 극심하던 중 “백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속설까지 돌아 그해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수)는 116.5명을 기록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자연 출생 성비를 105~106 정도로 본다. 황모과 작가는 첫 장편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에 태어나지 못한 여성, 지워진 여성들을 복원한다.
이야기는 ‘갈 곳’이 아니라 ‘가야 할 곳’을 향한다. 인물 간 대화는 다소 부자연스럽고, 내용 전개는 투박하다. 진리는 “우린 목격자이고 생존자이고 메신저”라며 “앞으로도 나랑 함께 살아남자”는, 작가가 빙의한 듯한 말을 남긴다. “구조적 성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가 여론조사 선두를 달리는 세상에, 소설은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황 작가는 “대선 의제에서도 여성들은 사라졌다. 세상의 반을 지우고도(아니 지워야만) 표를 얻을 수 있다는 이들이 정책과 제도를 결정하는 자리에 포진해 있다”며 “지워진 수많은 존재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라며 소설 속에 어떤 ‘지워진 세계’를 재현했다”고 썼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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