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OTT의 생떼, '목소리 안 주면 자막으로 다 바꾸겠다'

나경희 기자 2022. 1. 3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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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OTT 업체가 '뭐라도 일거리를 주는데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 여차하면 다 자막으로 바꿔버리겠다'는 듯이 대하는 태도를 참을 수가 없다."
지난해 12월13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스튜디오드래곤 등 8개 제작사 불공정약관 심사청구 기자회견’. ⓒ연합뉴스

점자가 눈에 띄는 명함이었다. “저희가 소리로 세상을 전달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시각장애인 분들과 소통하는 일이 많아요.” 이연희 한국성우협회 이사장이 말했다. 한국성우협회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성우 800여 명이 모인 단체다. “버스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나, 어디서든 좀 또랑또랑한 안내 목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다 우리 성우들이에요.” 차분한 목소리와 또렷한 발음에 자부심이 실렸다.

최근 한두 달 사이 영화·드라마가 아니라 기사나 SNS를 통해서 성우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2021년 말부터 한국성우협회가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같은 해외 OTT 업체(인터넷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를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선 여파다. 출연 계약서에 담긴 조항들이 성우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즈니 플러스가 성우들에게 제시한 계약서에 따르면 디즈니사는 성우가 녹음한 음성에 대해 거의 ‘한계가 없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문구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 재량으로써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형태로 그리고 모든 목적을 위해 작업물을 국제기준에 따라 편집, 수정, 삭제, 개정 및 변경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여 대본의 번역, 가사의 번역, 해당하는 경우 저작권과 인접권, 2차적 저작물 작성권과 편집권, 상기 모두에 대한 일체의 경제적 권리, 저작자인격권 및 기타 개발 이용권(개발 이용하지 않을 권리 포함), 이에 대한 갱신 및 연장을 포함하나 이에 한정되지 아니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어 더빙판과 관련한 본인(성우)의 서비스로부터 실현되었거나 실현될 모든 종류 및 성격의 권리를 유치권, 클레임 및 담보권이 없는 상태로 최초부터 보유한다.”

한국성우협회의 의뢰로 해당 계약서를 살펴본 노무법인 길은 “저작권법상에서 권리의 보호기간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으로 저작권, 인접권(저작물을 일반 대중이 누릴 수 있도록 전달한 사람이 갖는 권리) 등은 물론 저작자인격권까지 제한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라고 보았다. 여기서 저작자인격권은 ‘작품의 공표 여부 결정’ ‘자신이 저작자라고 작품에 표시’ ‘작품의 내용, 제목 등을 본래대로 유지’ 등의 권리다. 다른 사람에게 상속되거나 양도될 수 없는, 작가에게만 인정되는 권한이다.

디즈니사는 계약서에 ‘신개발 이용권(New Exploitation Method)’이라는, 그 의미조차 명확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다. “한 회원이 디즈니 측에 ‘내 목소리가 나중에 AI 개발에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냐’라고 물었더니 ‘AI 개발은 아니다’며 부정했다고 해요. 그럼 대체 ‘신개발’이라는 게 뭔가요. 아직 나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그럴듯한 단어로 퉁쳐서 모든 권리를 넘기도록 한 것 아닌가요.” 이연희 이사장이 말했다.

1월4일 서울 영등포구에서 한국성우협회 이연희 이사장(왼쪽)과 최재호 사무총장이 해외 OTT 업체의 불공정 계약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투명한 출연료 기준표 만들어야 한다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도 이전과 달라졌다. 성우가 되려면 보통 500~600대 1에 이르는 경쟁을 뚫고 공중파나 케이블 등 방송사 공채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각 방송사에서 2~3년 동안 전속 기간을 거친 다음에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전속 기간이 끝나면 모든 성우는 한국성우협회를 통해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노조) 성우지부의 노조원이자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협회)의 신탁회원으로 가입한다. 노조는 매해 방송사와 단체협상을 통해 성우들의 출연료 인상 폭을 결정하고, 협회는 성우가 녹음한 저작물을 재방송하거나 복제하는 등 2차 사용에 대한 대가를 관리한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성우들에게 노조와 협회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성우는 일대일 개별협상이 아닌 단체협상을 통해 정해진 기준에 따라 출연료를 받고, 2차 사용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다. 해외 OTT 업체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해외 OTT 업체들은 이 같은 관행을 ‘각개격파’ 방식으로 뚫었다. 노조와 협회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단체협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우들과 직접 일대일 계약을 맺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단일한 노조나 협회가 없는 미국 방식을 그대로 들여왔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출연료를 지급하는 기준은 ‘깜깜이’다. 한국성우협회는 성우들이 받았다는 출연료 정보를 알음알음 모아 해외 OTT 업체가 지급하는 출연료 수준을 대충 추정할 뿐이다.

그동안 성우들이 출연하는 국내 프로그램 시장은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KBS·MBC·EBS 등 공중파 방송이고, 다른 하나는 투니버스·대원방송 등 케이블 방송이다. 대체로 케이블 출연료는 공중파 출연료의 70% 수준이다. 해외 OTT 업체는 개별적으로 접촉한 성우들에게 국내 케이블 출연료의 1.2~1.3배(공중파의 약 0.8~0.9배)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성우협회는 해외 OTT도 케이블이나 공중파처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투명한 출연료 기준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성우 800명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내 OTT 업체는 현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대표 업체 중 하나인 CJ ENM은 한국성우협회와 표준적인 출연료 기준을 마련해놓은 상태다. 이연희 이사장은 해외로 진출했거나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국내 OTT 업체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국내 실연자들이 해외 OTT에 휘둘리고 있는 현실을 반면교사 삼아달라고 당부한다고 했다. “우리 OTT 업체들도 해외로 나가면 현지 실연자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거잖아요. 앞에서는 ‘K컬처’라고 홍보하고 뒤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연자들을 무시하는 갑질을 해선 안 되겠죠.”

한국성우협회는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측 실무를 담당하는 에이전트사(대행사)와 벤더사(제작사)에 10여 차례 공문을 보내 공개적으로 협의에 나서달라는 요청을 했다. 넷플릭스 측 에이전트는 조만간 한국성우협회 측과 협상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디즈니 플러스는 1월13일 현재까지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않고 있다.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웨버샌드윅 관계자는, 앞으로 디즈니 측이 한국성우협회와 협상에 나설 의지가 있느냐는 〈시사IN〉의 질문에 “법적인 부분까지 맞물려 있어서 바로 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홍보팀 차원에서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성우들의 투쟁에 다른 실연자(저작물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방법 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노조에 속한 성우지부뿐만 아니라 탤런트지부·작가지부·무술지부·코미디지부·연극지부 모두가 성우지부와 연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연희 이사장은 실연자들 모두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에서 자체 제작한 드라마가 엄청난 히트를 쳤다고 쳐요. 넷플릭스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지만, 출연자는 영상이 재방송이 되든 재가공이 되든 처음에 계약한 출연료만 딱 받고 끝인 거잖아요. 이런 구조는 성우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한국성우협회는 해외 OTT 업체들의 무리한 계약조건이 결국 국내 시청자들의 볼 권리를 제한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여전히 더빙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시각장애인은 25만명이다. 여기에 저시력자(안경을 쓴 교정시력이 0.04~0.3인 사람)까지 포함하면 50만명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0~5세 영유아 인구도 약 193만명이다. 시력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게 훨씬 더 편한 노년층 인구까지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더빙이 꼭 필요한 시청 소외계층이 아니더라도 성우의 목소리를 또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팬층도 두껍다.

해외 영상에 대한 선택권과 문화접근권

지난 10년 동안 국내 더빙 시장은 계속 위축돼왔다. 특히 공영방송에서도 해외 영화에 목소리를 입히지 않게 되면서 더빙 시장은 급격히 쇠락했다. 2015년 KBS가 45년 동안 이어져온 〈명화극장〉 프로그램을 폐지한 일은 움츠러든 국내 더빙 시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점점 더빙이 ‘원하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옵션’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연희 이사장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국민에게 선택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빙을 원하는 사람은 더빙을, 자막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자막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선택권과 문화접근권을 주자는 이야기다. 그는 일본이나 스페인처럼 해외 영상이 들어올 때 의무적으로 더빙을 해야 하는 제도가 갖춰져 있었다면 해외 OTT 업체들이 이렇게 시장 질서를 흔드는 행위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빙이 필수인 국가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경험이 있는 한 성우는 “해외 OTT가 ‘뭐라도 일거리를 주는데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 여차하면 다 자막으로 바꿔버리겠다’는 듯이 대하는 태도를 참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성우협회는 해외 OTT 업체를 상대로 표준적인 출연료 기준을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방송법 일부 개정과 국어기본법 일부 개정을 통한 ‘우리말 더빙 법제화’를 꿈꾼다. 2013년 처음 국회에 발의된 두 개정안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방송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되면 방송사는 “외국 수입 영화·애니메이션 등을 편성하는 경우 시청자가 한국어 자막과 한국어 더빙을 선택하여 시청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하고, 아동을 위한 외국 수입 애니메이션을 편성하는 경우에는 한국어 더빙을 이용한 방송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국어기본법 개정안은 공공기관 등에서 제작하는 콘텐츠의 경우 ‘우리말 제작’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연희 이사장은 “우리의 바람은 소박해요. 해외에서 잘 만들어 온 콘텐츠에 우리의 역량을 더해 모두가 즐거운 볼거리를 누리는 거예요. 이를 위해 지속 가능한 출연료 체계를 만들자는 거고요. 이제껏 그래왔듯이 우리의 목소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쓰임이 있고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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