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9화) [연재소설]

에린 2022. 1. 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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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은회색 SUV가 병원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강호는 기어 레버를 P에 넣고 고개를 숙여 차창 밖을 내다봤다. 세라가 화단 턱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유세라!”

세라는 이어폰을 낀 채 콘크리트 바닥에 코가 닿을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호는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세라의 시야에 흰색 나이키 운동화가 들어왔다.

“어, 왔니.”

세라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이어폰을 둘둘 말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강호는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지만, 세라는 시선을 피하며 차에 탔다. 침묵시위라도 하듯 창밖만 멀거니 쳐다봤다. 강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세라를 살폈다. 더 묻지 않고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창에‘서울 근교 단풍’을 써 넣었다.

“시간 괜찮지? 드라이브 갈래?”

“… 그러든가.”

세라는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홍제동 대로변에는 은행나무가 연한 노란색으로 물들었고 평일 버스와 승용차로 복잡했던 도로는 한산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세라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잠이 들었다.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하이패스 소리에 세라가 눈을 떴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회색 펜스 위로 나무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여기가 어디야? 배고프다.”

세라는 내비게이션으로 몸을 기울여 목적지를 찾았다.

“아까 병원은 왜 갔어? 눈이 더 안 좋아졌어?”

강호가 세라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눈? 어, 그래. 안과에 갔었는데.”

“의사가 뭐라는데. 인생이 거지 같을 정도였어?”

세라는 대답 대신 창문을 반쯤 내렸다. 차 안으로 세찬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뒤섞여놓았다. 순간 바람이 부는 대로 저항 없이 몸을 맡기고 싶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정 박사의 말이 바람결에 날아갔으면 했다. 강호가 창문을 올렸다. 세라는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앞머리를 정리했다. 헝클어진 강호 머리도 손가락으로 쓸어 내려줬다.

“날은 좋은데, 갈 데는 없고, 눈은 노안이라고 하고, 좀 짜증이 났어. 아, 오늘 영업부 송 과장 결혼식이네,”

세라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핸드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꼭 가야 하는 자리였어?”

“그런 건 아니고, 근데 말이야. 커플인데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 들어 보이면 어때? 싫어?”

“무슨 질문이 그래? 생각 안 해봤는데….”

강호는 연하게 웃었다.

“송 과장이 두 살 연상인데 신랑 될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나 봐.”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사실을 안다고 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런가…. 넌 그래?”

강호는 세라의 공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평소답지 않게 커플에 대한 편견을 내비치는 것도 이상했다.

홍천으로 들어서 은행나무 숲길로 가는 자동차 행렬에 합류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아는 사람만 찾는 가을 여행지였다. 이제 시월이면 사람도 차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명소가 됐다.

강호는 행렬을 빠져나와 ‘민물매운탕’ 간판을 단 식당 마당에 주차했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붐볐으나 운 좋게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매운탕을 주문하고 바로 한상차림이 푸짐하게 나왔다. 식당 아주머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메기, 빠가사리, 피라미를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물고기 이름을 알려줬다. 사람들이 얼마나 물어봤던지 이골이 난 것처럼 보였다. 아주머니가 국자로 휘젓자 탕 속에 잠겨 있던 작은 물고기의 까만 눈알이 국물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세라는 징그러운 생각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주머니가 다른 테이블로 가자 강호는 국자를 들어 생선을 국물 속으로 가라앉혔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 뚜껑이 들썩거렸다. 매콤하고 달큼한 냄새만으로도 허기진 배가 채워졌다.

“다른 거 시켜줄까?”

“아니. 그냥 먹을래, 나 잘 먹어야 해.”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정 박사가 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한 그릇을 더 시켜 강호와 나눴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꾸역꾸역 입속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강호는 천천히 먹으라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 한 잔을 세라 앞에 놓았다.


세라는 입맛이 없어도 끼니를 꼬박꼬박 챙겼다. 정 박사는 긴 싸움이 될 거라고 했다. 어쩌면 끝없는 모래사막을 맨발로 걸어가는 외롭고 힘든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한다. 좋은 생각만 하고 긍정적으로 생활한다면 병세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밥을 삼킬 때마다 떠올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은행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자동차 행렬이 점차 줄어들었다. 인근 길가에 주차하고 두 사람은 무리에 섞여 천천히 걸었다. 지천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세라는 은행나무 잎이 사방에 깔려 흙바닥이 아예 보이지 않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두 사람은 한 발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다. 강호는 깃발을 든 중국 관광객들이 옆으로 지나가자 세라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농장의 입구에 있는 표지판 앞에 섰다. 지병이 있던 아내를 위해 농장 주인이 은행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말에 세라는 숙연해졌다. 땅에 떨어져 쌓여 있는 수많은 은행잎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은행잎이 봄꽃처럼 날렸다. 노란 나비가 나무에서 피어났고 노란 눈송이가 소복이 내려앉았다.

세라는 눈이 시큰거렸다. 다행히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포즈를 취하며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른 한쪽에선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셀카를 찍었다. 노부모를 모시고 온 중년 부부도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을 찾아 돗자리를 들고 옮겨 다녔다.

농장 주인의 아내 사랑이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만 빼고 모두 행복하다는 회의감이 들어 세라는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은행잎이 쌓여 폭신대는 땅바닥을 콩콩 뛰었다. 아이의 아빠가 공룡 소리를 내며 뒤에서 으르렁댔다. 아이는 자지러지듯 도망치며 좋아했다. 아이의 아빠는 괴성을 지르며 주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맑은 얼굴로 아이만을 쫓았다.

세라는 아이와 같이 맨바닥을 콩콩 뛰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그랬듯이 아빠가 달려와 어깨를 와락 잡을 것만 같았다. 퇴근길에 치킨을 사 들고 두 팔 벌려 안아주던 아빠의 모습이 휘날리는 은행잎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뭘 그렇게 생각해?”

강호가 말했다.

“저 아이가 크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세라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응?”

강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저 아이가 엄마 아빠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넌 행복하니?”

세라는 꿈에서 깬 듯 강호를 쳐다봤다.

“행복? 갑자기 또 왜 그래?”

“그냥….”

“저 아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강호는 턱 끝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아이가 뒤따라오던 아빠에게 붙들려 배를 내보이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강호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세라 옆에 가까이 붙어 섰다. 다리를 시옷 자로 크게 벌려 세라와 키를 맞췄다. 카메라를 켜고 하나 둘 셋 구령을 세더니 세라의 어깨를 살며시 안았다. 세라는 카메라 렌즈를 보며 웃었지만, 마음은 계속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아이를 갖고 싶어….’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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