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6] 황제의 시대가 절정을 달리던 때, 몰락의 씨앗이 뿌려졌다

장일현 기자 2022. 1.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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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된 지 45분쯤 지났을까. 나폴레옹이 부하 술트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적 중앙이 있는 고지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술트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20분이면 충분합니다.” 나폴레옹은 더 과감한 돌격을 원했습니다. “그러면 15분을 주겠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던집니다. “단 한 번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은 끝날 것이네.”

1805년 12월 2일 체코 남동부 모라바 지역 아우스터리츠(현재 슬라브코프우브르나). 체코에서 둘째로 큰 도시 브루노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이 거둔 많은 승리 중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고 있습니다. ‘전술상의 걸작’이라는 평가도 받습니다. 마침 이 날은 나폴레옹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에 오른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자신의 황제 즉위 1주년을 대승으로 자축한 셈이지요.

프랑스의 나폴레옹,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등 3명의 황제가 맞붙었다고 해서 이른바 삼제회전(三帝會戰)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병력 2만7000명과 대포 180문을 잃은 반면, 프랑스군 병력 손실은 7000명에 그쳤습니다. 나폴레옹은 고국에 있는 아내 조제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두 황제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소. 나는 조금 피곤하오. 지금 당장 당신을 껴안고 싶소.” 반면 나폴레옹을 적으로 맞아 싸워야 했던 불운의 러시아 황제는 절망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거인의 손 안에 있는 난장이들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5~1807년은 나폴레옹의 절정기였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강국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시대가 절정을 달리는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몰락을 가져올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랑드 아르메

1805년 전쟁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은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1798~1802) 이후 아미앵 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지만 누구도 이 상태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프랑스에 되돌려 준 것에 화가 났고, 프랑스는 영국군이 몰타 섬에서 왜 철수하지 않느냐며 분노했습니다. 1803년 5월 영국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이듬해 영국과 스웨덴이 협정을 맺은데 이어, 1805년 4월 영국과 러시아가 동맹(제3차 대불동맹)에 합의했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도 곧 동맹에 합류합니다.

나폴레옹이 영국 원정을 위해 프랑스 해안 불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가 대륙쪽 전투를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고,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대파한 일까지는 지난 편지에서 다뤘습니다. 이제 대륙으로 눈을 돌린 나폴레옹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랑드 아르메(대육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나폴레옹 군대는 적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1805년 8월 말 불로뉴에서 출발한 그랑드 아르메는 한 달만에 600km가 넘는 거리를 행군한 끝에 9월 하순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州) 울름에 도착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곳에 마크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 7만2000명을 배치해 놓고 있었지만, 기습을 단행한 그랑드 아르메에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프랑스군은 울름을 완전 포위했고, 달아난 일부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추격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10여일 만에 항복을 했는데 그 수가 무려 3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진군을 거듭, 뮌헨과 린츠를 거쳐 3주일여만인 11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 입성하게 됩니다.

울름 전투는 나폴레옹에겐 몸풀기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랑드 아르메의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습니다. 100여km 떨어진 아우스터리츠가 목표였습니다. 그 곳엔 오스트리아를 도우러 온 러시아군이 주력을 형성하고 있는 연합군이 병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었습니다. 상대 병력은 이미 수 만명에 달하는데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더 많은 지원군이 몰려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위키피디아> Napoleon at the Battle of Austerlitz, by François Gérard 1805. The Battle of Austerlitz, also known as the Battle of the Three Emperors, was one of Napoleon's many victories, where the French Empire defeated the Third Coalition.

병력은 연합군이 약간 우세했습니다. 러시아-오스트리아군은 8만5000명 정도였는데, 이중 3분의 2 이상이 쿠투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최고 지휘관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였습니다. 이에 맞서는 프랑스군은 7만3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투는 나폴레옹이 짜 놓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습니다. 상대방은 나폴레옹이 파놓은 유인 전술 함정에 완벽하게 걸려들었고, 참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투 직전 부하들을 데리고 전투가 벌어질 장소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이 지형을 잘 살펴보시오. 이 땅이 전장이 될 것이고, 그대들은 이곳을 무대로 전투를 벌일 것이오.” 그는 전투가 벌어질 곳을 미리 다 분석해 놓고 있었고, 그에 맞는 전술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패의 결과는 냉혹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은 와해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바덴 등 영토를 프랑스에 넘기고 전쟁 보상금으로 4000만 프랑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특히 1806년 8월 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퇴위, 1000여년 이어져 내려왔던 신성로마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 국왕에,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에 앉혔습니다. 또, 독일의 작은 국가들을 묶어 자신의 꼭두각시인 ‘라인동맹’을 창설했습니다. 독일 중부가 나폴레옹의 지배권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겐 아직 가야할 길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항복을 받으려 할 참입니다.

◇유럽, 황제에 무릎을 꿇다

1806년 하반기 프로이센은 제4차 대불동맹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에서라기보다 나폴레옹에 대한 두려움과 당시 판세·전투력 등에 대한 판단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라인동맹 지역에 프랑스군 20만명을 주둔시켰는데, 이런 대규모의 그랑드 아르메는 프로이센에겐 큰 위협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왕비와 왕자는 빌헬름 3세에게 전쟁을 하자고 독촉했습니다.

그해 7월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작센 공국, 스웨덴 등과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고, 8월말에는 프랑스에 라인동맹에 주둔한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고, 이는 프로이센의 엄청난 실수였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전투는 10월 중순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두 곳에서 벌어졌는데 단 하루만에 끝나버렸습니다. 독일 전역 패권을 놓고 벌인 승부치고는 너무 허무하게도 말입니다. 10월 14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약 220km 떨어진 예나.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그랑드 아르메는 오전 6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병력 3만3000명에 120문의 포를 보유했지만 이날 오후쯤에는 이미 궤멸 상태였습니다. 오후 2시쯤 1만3000여명의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전세를 바꾸진 못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2만5000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합니다. 승리를 쟁취한 나폴레옹은 예나에 의기양양 입성했는데요. 그를 맞이한 대중 속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헤겔이었습니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 쉘링과 함께 독일 관념론을 인류 지성 한가운데 자리매김하게 한 철학자였으며, ‘정반합(正反合)’으로 대표되는 변증법을 체계화한 인물입니다. 당시 예나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헤겔은 나폴레옹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계 정신이 말에 올라타 통과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Napoleon reviewing the Imperial Guard before the Battle of Jena

예나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격파한 것으로 알고 크게 기뻐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날 프로이센군 주력은 예나에서 약 20km 북쪽에 있는 아우어슈테트 지역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를 맞아 싸운 것은 다부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그랑드 아르메 제3군단이었습니다.

오전 7시쯤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은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예나와 마찬가지로 주변엔 온통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기에 양측은 상대방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적이 보이니 총을 쏘는 그런 ‘깜깜이 전투’가 계속됐습니다. 프랑스군은 전투 초반 사로잡은 프로이센군 병사를 통해 전방에 있는 군대가 프로이센의 주력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 양측 군대가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병력은 2만7000명, 프로이센군은 6만30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가 많아도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오후 1시쯤 전세는 결정이 났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병력 1만3000명을 잃었고, 빌헬름 3세는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핵무기나 스텔스 전투기, 항공모함 등 전세를 한번에 뒤집을 수 있는 첨단 무기나 장비가 없던 시절, 기껏해야 대포와 총, 인간의 용맹과 지휘관의 전술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던 시절, 이 정도의 병력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기록한 전투는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의 대승이었습니다.

이 전투와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다부 원수는 부하를 시켜 나폴레옹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 보고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귀관의 원수(다부)는 물체가 2개로 보이는가 보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부 원수는 극도의 근시였는데, 이를 빗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보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면서 엄청난 찬사와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다음날 발행된 그랑드 아르메 홍보 제5호에는 이 전투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군의 우익을 맡은 다부 원수가 기적을 만들었다… 그는 무인(武人)의 제1 소질인 탁월한 용맹과 견실한 성격을 발휘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다부 원수에게 아우어슈테트 공작의 칭호를 하사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결과, 독일 전역이 나폴레옹 영향권에 떨어지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은 10월 25일 베를린에 입성했습니다. 독일의 심장에 첫째로 들어가는 영광은 다부 원수에게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달 후 나폴레옹이 이곳에서 발표한 ‘베를린 칙령’은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가져오는 결정적 동기가 되고 맙니다.

전후 협상은 프로이센 왕비 루이제가 맡았습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 등 영토를 잃게 됐고, 1억2000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기로 했습니다. 육군 인원도 4만명으로 제한됐습니다. 가혹한 협상 내용에 프로이센은 분노했고, 언젠간 되갚겠다며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한편, 전투에서 패한 빌헬름 3세는 가까스로 도망친 뒤 재기를 위해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제 러시아가 등장할 차례 입니다. 이미 전에도 패한 적이 있던 러시아도 프랑스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전선은 북동 유럽으로 옮겨졌습니다.

1807년 2월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남쪽으로 37km 떨어진 아일라우에서 맞붙었습니다. 혹독한 북유럽의 겨울 날씨 속에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첫째 날에는 양측 모두 4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승부를 보지 못했습니다. 둘째 날 나폴레옹이 4만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6만3000명의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진행된 공방 속에서 하마터면 나폴레옹군이 격파당할 위기까지 겪었습니다. 모라 장군의 기병대가 러시아군 공격을 막아내는 바람에 패배를 면했고, 그날 밤 러시아군은 후퇴하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물러났지만 나폴레옹으로선 결코 승리라고 할 수 없는 전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4개월 후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철저하게 유린하게 됩니다.

<위키피디아> Napoleon at the Battle of Friedland (1807). The Emperor is depicted giving instructions to General Nicolas Oudinot. Between them is depicted General Etienne de Nansouty and behind the Emperor, on his right is Marshal Michel Ney.

6월 14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그랑드 아르메가 러시아군과 다시 싸우게 된 곳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남쪽으로 40여km 떨어진 프리틀란트였습니다. 프랑스쪽 병력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라인동맹 등을 포함해서 8만명, 러시아쪽은 프로이센 지원군(2만5000명)을 합쳐 8만3000명이었습니다. 새벽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프랑스의 란 장군은 1대 2의 불리한 싸움에서도 9시간을 버텼고, 오후 5시쯤 나폴레옹이 6만5000명의 병력으로 대공세를 시작하자 전세는 급속히 프랑스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적을 프리틀란트 마을로 몰아넣었고, 이곳에 대대적인 대포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러시아군은 2만여명의 병력을 잃고 도망쳤고, 나폴레옹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게 됩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조약에 서명했는데요. 이 조약에는 “러시아는 프랑스가 유럽을 통치하는 것을 지지하고, 프랑스 방침에 따라 대륙봉쇄령에 참가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모든 서부 유럽의 지배자가 됐습니다. 1805년 오스트리아, 1806년 프로이센, 1807년 러시아를 차례로 굴복시킨 결과입니다. 그의 제국은 에스파냐의 남부 세비야에서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발트해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국민은 4400만명에 달했습니다.

◇베를린 칙령, 그리고 저항의 시작

나폴레옹이 1805년 10월 울름 전투를 이기고 아우스터리츠로 향하던 때, 그에게 뼈아픈 패전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가 영국 해군에 참패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해전의 패배는 당시 육지에서 승승장구하는 나폴레옹에겐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을 그대로 나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806년 초겨울 프로이센을 완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전격적으로 대륙봉쇄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베를린에서 발령했기에 ‘베를린 칙령’으로도 불립니다. 영국과의 모든 통상을 금지하며, 영국 선박은 유럽 대륙의 어떤 항구에도 출입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할 경우 선박을 몰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에 대한 군사적 공략을 포기하는 대신 경제적으로 봉쇄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일종의 ‘경제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영국과의 경제적 단절이 유럽 여러 나라에게도 고통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항이 곳곳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하던 영국과의 무역이 막히자 유럽에선 생필품 부족 현상이 벌어졌고 밀무역이 성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무역과 자신의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오는 생산품 등에 대부분의 경제를 의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807년 당시 영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전체의 50%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포르투갈에겐 “굶어죽으라”는 말과 같았을 것입니다. 결국 포르투갈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들의 리스본 항구 출입을 허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7년 11월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병력 3만명을 주면서 포르투갈 점령을 명령했습니다. 쥐노는 쉽게 리스본을 함락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조제프 보나파르트, 스페인 왕, 나폴레옹의 형

나폴레옹은 내침 김에 포르투갈 공격에 협조했던 에스파냐도 지배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에스파냐는 왕권을 둘러싸고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는데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로 하여금 모두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마드리드가 아닌 바욘에서 대관식을 치른 조제프는 호세 1세라는 이름으로 1808년 7월 20일 마드리드에 들어오게 됩니다. 참고로 그는 나중에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는 1813년 폐위됩니다.

나폴레옹이 형을 에스파냐 왕으로 옹립한 일은 최악의 악수 중에 하나였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에스파냐 국민들이 항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스페인은 너무나 풍요롭고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푹푹 찌는 무더위, 뜨거운 태양에 타버린 척박한 땅. 여기에 집요한 게릴라들의 저항이 프랑스군을 괴롭혔습니다. 에스파냐 게릴라들은 “매일 100명 가량의 프랑스 병사를 살상했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오래전 프랑스 왕이 에스파냐에 대해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곳에서 소규모 군대는 패배하고, 대규모 군대는 굶어 죽기 십상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은 악전고투를 거듭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최대 숙적 웰링턴이 드디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미 인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이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도 대륙봉쇄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가 체면을 구기는 것을 본 러시아는 1810년 대륙봉쇄령을 파기하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했습니다. 황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철저하게 손보고 이를 전 유럽에 본보기로 삼겠다는 생각으로 러시아 원정(1812)을 단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황제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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