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2인자'는 없다..무대의 주인공은 1인자

2022. 1. 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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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이든 2인자는 있다. 그러나 2인자의 권한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1인자에게 잠시 부여 받은 것이다. 회사에서 1인자를 제외한 모든 조직원은 권력을 잉태할 수 없는 ‘태생적 불임’, 즉 미성숙의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손에 들어온 권력을 조금씩 맛본 2인자는 그 권력이 본래 자신의 것인냥 착각하고 오만해진다.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1인자의 2인자 시험은 절대평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시청률 17%를 넘어서며 새드엔딩으로 마감했다. 드라마는 영조의 죽음 이후 세손이 고초를 이겨내고 군주가 되고 궁녀 덕임과의 아슬아슬한 애정 밀당의 결과로 결국 덕임이 정조의 후궁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조의 복심이자 최측근 홍국영은 과도한 권력욕과 야망을 감추지 못하고 정조에게 내침을 당했고, 그 울분을 참지 못해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물론 드라마는 팩션(fact+fiction)이다.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시청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드라마에서 영조, 정조, 정순왕후, 홍국영, 혜경궁 홍씨, 화완옹주, 정후겸 등은 실제의 인물이고 드라마 속 이야기 역시 역사적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정조와 궁녀 덕임의 소설 같은 로맨스도 사실이다. 궁녀 덕임은 바로 정조가 지극하게 사랑했던 후궁 의빈 성씨이다.

의빈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그녀의 집안은 고조부 때까지 벼슬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아버지는 정조의 외조부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영풍부원군 홍봉한 집의 청지기(양반집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를 지냈다. 이런 연유로 덕임은 어릴 때 혜경궁 홍씨의 처소 나인으로 입궐한다. 천성이 착하고 영리한 덕임을 혜경궁 홍씨가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덕임은 네 살 위의 세손과 살갑게 지냈다. 세손이 덕임에게 승은을 내리려 하자 덕임이 울면서 “아직 세손비께서 후사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세손의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리고 세손이 왕위에 올라 4년이 지난 후 정조가 다시 덕임에게 승은을 내리려 하자 덕임은 또 거부했지만 정조가 이를 꾸짖자 결국 받아들인다.

후궁 덕임은 옹주를 낳고 얼마 후 정조와 왕실이 그토록 기다리던 왕자를 낳는다. 크게 기뻐한 정조는 태어난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은 아들을 원자로, 그리고 다음 해 세자로 봉한다. 당시 소용이던 덕임은 정1품 빈이 된다. 빈호인 ‘의宜’도 정조가 직접 하사했다. 하지만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았던 정조와 의빈에게도 비극이 찾아왔다. 젖먹이 옹주가 죽고 문효세자 역시 5살 때 홍역으로 세상을 떠난 것. 이에 충격을 받은 의빈 성씨는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복중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정조는 두 달간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정조는 친히 의빈 성씨를 기리는 조문을 짓고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묘를 지금의 효창원에 마련했다.

물론 당시 지존인 군주의 지엄한 손길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궁녀에게 없었다. 당연히 덕임이 정조에게,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정이 쌓였다고 해도 눈을 똑바로 뜨고 아픈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지점이 이 드라마가 갖는 포인트이다. 덕임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지존의 손길을 거부하고 영화와 권력을 손을 쥘 수 있는 왕의 여자가 되기를 마다했다. 또한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궁녀로 살겠다는 덕임의 말은 현재의 우리에게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가 하면 드라마에서 홍국영은 정조에게 결국 내쳐진다. 물론 홍국영은 정조 시대 정약용 같은 위대한 학자도, 채제공 같은 뛰어난 재상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부상과 몰락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다. 홍국영은 정조 초기 4년 동안 최고의 권세를 누리다가 갑자기 버림 받았다. 한때 정조의 ‘모든 것’이었던 홍국영의 추락에서 우리는 ‘2인자의 부침’을 발견한다. 그것은 1인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수많은 역사 속 2인자의 처세가 결코 만만한 교훈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만, 방심 그리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자기 합리화가 2인자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홍국영이 알려준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었다. 할아버지 영조는 정조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은 끊임없이 세손을 흔들었고 암살을 시도했다. 수많은 고초와 위협을 딛고 정조는 왕위에 올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위기를 겪었던 이 때 힘이 되어준 인물이 홍국영이다. 홍국영은 정조의 최측근 가신이었다. 그는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했다. 어린 시절에는 시동처럼, 커서는 정조에게 바깥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로, 세손일 때는 몸을 던져 목숨을 구한 인물이 홍국영이다. 해서 정조는 왕위에 올랐을 때 “그대가 있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다”라고 그를 칭찬했으며, “그대가 대궐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대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그를 신임했다.

영조는 죽기 3개월 전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노론은 반대했고, 세손 역시 대리청정을 거부했다. 그때 유일하게 홍국영을 비롯한 세손의 참모 조직 동덕회만이 대리청정을 찬성했다. 홍국영은 세손에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참고 또 참으면 저하의 세상이 올 것”이며 “물론 대리청정을 받아들여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고했다. 이 말에 세손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3개월 뒤 영조가 죽고 대리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고 있던 세손은 자연스럽게 영조의 후계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세손이 대리청정을 받지 않고 영조가 승하했다면 다음 승계의 권한은 노론의 핵심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의 선택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노론은 정순왕후와 손잡고 세손이 아닌 다른 방계의 군을 후계로 정했을 것이다.

세손이 왕이 되고 권력은 홍국영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직책은 도승지. 품계는 정3품이지만 의정부 삼정승을 비롯해 육조판서도 그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모든 국정은 정조에게 보고되기 전 홍국영이 먼저 살폈고 조정은 홍국영의 세력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홍국영은 도승지로서 왕명 출납을 관장했고, 금위대장, 숙위대장, 훈련대장을 겸직, 왕의 안위를 책임지며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홍국영이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국정원장, 수도방위사령관, 기무부대장, 경찰청장 등의 모든 직책을 독점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홍국영만을 찾고, 그만을 신임했다는 증거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붉은 꽃도 그 빛이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홍국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왕의 후계에까지 개입하면서 그는 정조의 눈에서 벗어났다. 1779년 9월26일, 홍국영이 정조를 처음 만난 지 딱 7년이 되는 날, 홍국영은 사직 상소를 올리고 떠났다. 떠나면서 홍국영은 바로 복권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정조는 홍국영을 찾지 않았다. 정조에게 ‘홍국영을 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정조는 홍국영의 도성 출입을 금했다. 홍국영은 횡성, 강릉으로 떠돌았다.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을 가까이하다 1780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의문이 든다. 홍국영은 정조에게 사냥이 끝나면 버려지는 사냥개였던가, 아니면 정조의 신임에도 홍국영의 권력욕이 몰락을 자초한 것일까. 그 어느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정조 즉위 후 약 4년간 홍국영이 보여준 권력욕, 탐욕, 방심, 오만의 흔적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1인자의 신임이 두텁고 그 권한을 위임받은 2인자는 조직원의 견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 권한의 행사에 따른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2인자의 권한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1인자에게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1인자를 제외한 모든 조직원은 권력을 잉태할 수 없는 ‘태생적 불임’ 즉 미성숙의 존재이다. 그 어떤 2인자도 처음에는 조심스럽다. 손에 들어온 권력을 조금씩 그리고 사방의 반응을 보면서 써본다. 그리고 별일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권력이 본래 자신의 것인냥 착각하고 오만해진다.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인사는 대부분 회전문 인사이다. 국정도 그런 비판을 받는다. 정부 요직에 인사가 나면 언론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인 ‘회전문 인사’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람이 없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는 1인자의 본능을 무시한 비판이다. 오너와 1인자의 관점에서는 일정한 테스트를 통과한 임원급이라면 김 씨나 박 씨나 사실 그 누구도 상관없다. 그저 내 사람, 즉 나에 대한 충성심만 확인되면 그만이다.

2인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점은 1인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즉 1인자의 목표와 지향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목표로 하는 회사의 미래, 그가 원하는 조직 문화, 그의 경영 철학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굴뚝 산업을 배제하고 디지털 경영, 이커머스를 꿈꾸는 1인자에게 조선, 섬유, 중기계 기업을 인수하고 공장 부지를 늘리자는 조언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1인자는 늘 시험한다. 충성심, 성실함과 상황 타개 돌파력 그리고 2인자 리더십 등이다. 이 기준에서 2인자는 ‘절대 평가’를 받는다. 즉 상대적으로 몇 점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1인자가 정해 놓은 기준점을 통과해야 한다. 재계에서는 2세, 3세들이 경영 수업을 받는다. 궁금증이 든다. 과연 그 경영 수업의 완성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업을 시작해 성공시켰다면? 10년을 창업주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면? 이 모두 정답은 아니다. 후계자가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은 후계자로서 그럴듯한 성적표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고, 그 어떤 2세, 3세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창업주의 성과와 열정을 능가하기 어렵다. 박사처럼 ‘경영 수업 수료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경영 수업이 끝나는 시기는 물리적 혹은 시간적으로 창업주나 1인자가 직접 경영을 하지 못하고 후계자가 실제적 경영을 시작하는 시점이다. 이 역시 절대적 평가이다. 마찬가지로 1인자는 2인자에게 대해 시험 평균 점수로 합격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2인자는 오감을 모두 열어야 한다. 귀도, 눈도, 감각도, 사고 등등 2인자는 어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 체크하고, 메모하고, 기억해야 한다. 또 매일, 주간, 월간 그리고 1년 단위로 무대를 연출한다. 무대에 등장할 때와 퇴장할 때, 약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계산해야 한다. 물론 이 무대의 주인공은 당연히 1인자이다.

온전히 오래가는 2인자가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사에서도, 현실에서도 ‘영원한 2인자’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자리를 거쳐 가는 것뿐이다.

▶이산에게는 충신, 정조에게는 부담

1748년에 태어난 홍국영은 정조보다 4살 위다. 명문 풍산 홍씨로 그는 선조가 아끼던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6대 손, 어머니 김 씨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인척이다. 그는 준수한 외모에 시도 잘쓰고 언변도 좋았다고 한다. 홍국영은 25세에 문과 병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이 되었다. 영조는 홍국영을 무척이나 총애했다고 한다. 그리고 1774년 9월26일, 홍국영은 동궁시강원 설서로 임명된다. 즉 살아있는 권력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차기 권력인 세자의 측근이 된다.

홍국영이 세손을 처음 보필할 때만 해도 세손의 위치는 불안 그 자체였다. 임금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현재 지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노론 벽파는 자신들이 사지로 몰아넣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결사 반대했고 심지어 세손을 암살하려 했다. 이때 홍국영은 세손의 곁을 지켰다. 세손은 그를 통해 민심을 파악했고, 조정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세손은 홍국영을 통해 궐내의 정보를 얻어 영조의 변덕과 노론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노론 벽파는 거세게 반대했고 세손 역시 흔들렸다. 이때 홍국영은 세손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이에 대처해야 합니다’라고 충언했다.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하고 바로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임명하고 그해 7월 홍국영은 도승지가 된다. 정조는 홍인한, 정후겸 등 노론에 대한 숙청을 시작한다. 이들의 죄목은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반대한 것과 홍국영을 제거하려 음모를 꾸몄다는 것. 정조는 “홍인한, 정후겸 등의 공격에서 나를 보호한 사람이 홍국영이다. 그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1등 공신이다”라며 만천하에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과시했다.

홍국영은 수어사, 총융사,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번갈아 맡았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세도’라 불렀다. 얼마 후, 정조의 침전에 자객이 침입했다. 홍상간, 홍계능 등이 호위청 무사를 포섭해 정조를 죽이려 한 것. 정조는 이에 경호부대 숙위소를 창설하고 호위군대인 장용영을 신설했다. 숙위대장은 역시 홍국영. 홍국영은 정조의 집무실 옆에 처소를 마련하고 24시간을 정조와 함께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욕을 드러냈다. 정비 효의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자 후궁간택령이 내려졌다. 홍국영의 13세 여동생이 ‘원빈元嬪’이 되었다. 원래 빈은 내명부 정1품으로 왕자를 낳은 후궁만이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럼에도 홍국영의 누이는 바로 빈이 되었다. 이는 당시 홍국영의 세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홍국영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후궁들은 감히 사용할 수 없었던 ‘근본 원元’을 사용했다. 이는 원빈인 궁의 근본 즉 안주인이 되겠다는 홍국영의 야심이었다. 하지만 원빈은 1년 만에 사망했다. 홍국영은 누이의 죽음에 분노해 이성을 상실했다. 그는 중전 효의왕후를 의심해 왕비의 궁녀들을 잡아 고문을 가했다. 정조는 불쾌했지만 홍국영을 문책하지 않았다.

홍국영은 그러나 또 선을 넘었다. 정조에게는 아버지 사도세자 소생 은언군, 은산군 두 이복 동생이 있었다. 은언군의 아들 이담은 상계군으로 정조의 조카. 홍국영은 상계군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군호도 상계군에서 ‘완풍군完豊君’으로 바꾸었다. ‘완’은 왕실의 뿌리인 ‘전주’에서, ‘풍’은 자신의 본관 ‘풍산’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왕실과 자신의 가문 결합으로 정조의 후계를 잇는다는 뜻. 홍국영은 점점 자신의 위치와 직분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홍국영의 질주는 멈출 줄 몰랐다. 그는 좌장을 잃고 세력을 상실한 노론을 포함한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는 사림파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뿐이 아니었다. ‘실록’에는 ‘홍국영이 의녀나 궁녀를 처소로 불러 어지럽고 더러운 짓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또 홍국영은 정조의 구상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규장각 재원 마련 방책이다. 규장각은 정조 국정 개혁의 원동력. 정조는 규장각에 인재들을 배치하고 공부에만 전념케 했다. 그러기 위해 재원이 필요했다. 이때 규장각 제학이 평안도에 보관중인 곡물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방안을 냈다. 즉 몇 만 석을 환곡으로 운영하면 2만 냥의 재원이 마련되므로 이를 운영비로 쓰자는 것. 정조는 찬성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환곡의 목적 외 사용은 불가라는 원칙을 들어 반대했다. 정조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홍국영이 자신의 뜻과 목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2인자의 권력은 칼집에 든 칼이다

홍국영은 결국 정조 인내심의 한계를 넘었다. 누이동생이 죽은 뒤 그는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은 후 효의왕후를 쫓아내려는 계획을 꾸몄다. 즉 효의왕후가 원빈을 독살했다고 증거를 조작한 것. 그러자 정조는 결심을 굳혔다. 1779년 9월26일, 정조와 홍국영이 첫 대면한 지 딱 7년째 되는 날, 정조는 홍국영에게 사직하라 명했다. 홍국영은 사직서를 올렸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을 수리하며 “그동안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명예직 고위 관료)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생겼으니 바로 홍국영이다”라고 마지막으로 홍국영에게 은전을 베풀었다.

조정은 권력 이동을 감지하고 곧바로 홍국영 탄핵을 시작했다. 권력에 가려졌던 홍국영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탄핵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이조판서 김종수는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음해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소를 올렸다. 1780년 정조는 홍국영에게 도성 안 출입금지를 명했다. 홍국영은 강원도 오지를 떠돌았다. 그의 마음은 울분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찼다. 그는 매일 술을 마시고, 통곡하며 지내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정조의 분신 같던 홍국영의 몰락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무조건 충성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태조의 정도전, 태종의 하륜, 세조의 신숙주, 이들의 공통점은 혁명으로 권력을 잡았고 태조, 태종, 세조가 명군이 되어 완성하고자 했던 ‘새로운 시대 건설’의 통치 철학을 정확히 이해한 2인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홍국영은 세손을 보호하고 그가 왕이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정조의 통치 철학을 논리적으로 완성해 정조에게 제공하는 대신, 오히려 권력에 취해 정조의 기대에서 벗어났다. 정조는 붕당 정치, 외척의 발호 등으로 아버지가 죽고 자신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노론 강경파를 숙청하면서도 노론의 뿌리를 뽑지 않았다. 이는 정조가 꿈꾸는 탕평의 세계를 위해서다. 또 효심 깊은 정조는 외척의 국정 농단을 막고자 외가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 가문을 고심 끝에 숙청했다. 그리고 젊은 인재들을 등용해 실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규장각을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통치 철학이다.

홍국영의 정조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홍국영은 노론 강경파를 숙청하고 또 다른 붕당을 형성했다. 그는 정조가 경계하던 외척이 되어 후계구도에도 야심을 드러냈다. 게다가 규장각의 운영에 있어 정조의 뜻을 반대했다. 정조는 홍국영과는 서로 바라보는 방향과 지점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정조는 이산으로서 홍국영을 아끼고, 그의 재주를 높이 샀지만, 군주로서는 홍국영의 효용가치가 상실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훗날 홍국영이 죽자 정조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사려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편안함과 근심)을 함께 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권력의 손잡이)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벌과 복을 주는 임금의 권력)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기록에서 정조는 말한다. ‘2인자로서 홍국영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권력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것을 멋대로 사용했다’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2인자의 권력은 이런 것이다. 잠시 받은 것, 언제든 1인자의 신호가 있으면 돌려주어야 하는 것, 함부로 사용하면 안되는 것, 그리고 그 권력의 크기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참으로 무섭고 그래서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2인자의 자세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14호 (22.01.2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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