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가지런한 마음

한겨레 2022. 1. 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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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금희의 식물 하는 마음]김금희의 식물하는 마음
게티이미지뱅크
역시 모든 일에는 ‘적당히’가 중요하다. 문제는 그렇게 뭔가를 적당히 하려고 하면 의구심이 들면서 그런 건 무성의나 편의적인 타협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해를 맞아 식물들을 살펴보다가 일종의 ‘수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좁은 발코니, 겨울이라 제대로 환기할 수 없는 내부 공기, 충분하지 못한 습도와 광량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한 잎 한 잎 자라고 있었으나 문제가 적잖아 보였다. 수형이 한쪽으로 기울어 균형을 잃은 게 가장 심각했다. 자구(새순)를 쑥쑥 내어 다른 가족에게 한 포트 선물할 수 있었던 나의 자랑 필레아 페페는 방패 같은 잎들을 무성하게 내었을 뿐 아니라 키도 성큼 높였으나 해를 좇느라 몸체가 기울어져 있었다. 화분진열대 다리에 겨우 기대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일년간 두배나 자라 저러다가는 천장에 닿겠구나 싶은 필로덴드론 옐로 고스트는 죽죽 뻗은 가지 중 일부가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잎들이 30센티미터 가깝게 크다 보니 줄기가 무게를 버텨낼 수 없는 것이다.

내 방에 놓인 식물들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북쪽이라 해가 잘 들지 않는 방이었다. 창을 가릴 수 없어 벽면에 화분진열대를 붙여 놓았는데, 희박한 햇빛을 붙드느라 몸체가 창 쪽을 향해 부등호처럼 꺾여버렸다. 얼마나 단호하게 꺾였는지 해를 향한 갈구가 즉각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유묘 때부터 함께해온 필로덴드론 실버메탈, 필로덴드론 라시나텀 등이 그런 상태다. 잎 서너장 달고 여릿여릿하게 우리 집에 왔던 아이들이 그렇게 쑥쑥 자라 비뚤어진 모습은 자책감을 안겨주었다. 온전히 내 잘못으로 비뚤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도 할 말은 있다. 화분을 적당히 돌려가며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막상 식물들이 그렇게 자리 잡으면 홱 돌려놓기가 어려웠다. 빛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애써 그렇게 자란 잎들에게 또다시 적응이라는 고난을 안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쁜 성장을 방치한 셈이었다.

연말이 되면서 남편과 나는 생각을 한번 하는 것과 여러번 하는 것에 대해 대화하곤 했다. 책을 읽다가 아쉬움이 들면 뭐랄까, 생각을 한번만 해본 글 같아,라고 설명했고 그러면 서로 어떤 뜻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은 생각을 여러번 하는 것이 과연 좋은 걸까? 하고 이야기했다. 생각을 하다가 하다가 또 하면 결국 첫 생각으로 돌아와버리지 않나 하면서. 그냥 슬쩍 돌려놓으면 되는 화분을 이 생각 저 생각을 열심히 하다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비뚜름하게 자라도록 만든 것처럼. 역시 모든 일에는 ‘적당히’가 중요하다. 문제는 그렇게 뭔가를 적당히 하려고 하면 의구심이 들면서 그런 건 무성의나 편의적인 타협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식물을 기르는 데는 당연히 키우는 사람의 성향이 작동한다. 성향이란 쉬이 그렇게 하고 되도록이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철삿줄로 칭칭 감아서라도 최적의 형태를 잡고 누군가는 외목대에 아름다움을 물씬 느껴 늘 가위를 대기시킨다. 분재는 그런 조형의 욕구를 극단으로 구현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식물 집사 중에는 나처럼 뭔가를 인위적으로 하는 행위가 영 내키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모양이 안 멋지더라도 뭔가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만 하면 일단 흐뭇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적어도 가드닝에 있어서는 꽤 낙천주의자인 셈이다. 적어도 식물들을 대할 때는 조금은 마음이 느슨해지고 어느 면에서는 무덤덤해진다. 정확히는 의심하지 않는 마음이 든다. 쓸 때나 읽을 때나 심지어 내 스스로 펼쳐나가고 있는 생각의 연쇄 속에서도 언제나 정말 그러한가, 옳은가, 착시가 아닌가를 묻는데 식물들 앞에서는 그런 날카로운 반문을 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질서로 움직이는 완전한 세계가 있으니까. 내가 할 건 의혹이나 불신이 아니라 경탄과 그를 통한 일종의 발심(發心)이다.

새해 첫 주 동안 부지런히 가드닝 용품을 사들였다. 가장 많이 산 것은 지지대였다. 인터넷으로 손품을 팔아보니 식물들의 다양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지지대가 있었다. 고리가 있는 것, 없는 것, 고리 모양이 원형인 것, 반원인 것, 난석이나 수태를 넣어 뿌리 발아를 도울 수 있는 것, 금동형으로 되어 마치 정원의 아치처럼 아름다운 것, 덩굴식물이 감고 올라가면 아주 멋질 횃대형 지지대까지. 그렇게 해서 피사의 탑처럼 기운 필레아 페페를 일으켜 세우고, 꺾일 듯 무거운 옐로 고스트의 잎들을 들어올렸다.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식물이지만 지지할 곳이 없어 바닥을 넝쿨째 기고 있던 베멜하(베루코섬과 멜라노크리섬의 하이브리드 종)도 소중히 일으켜 세워주었다. 뭔가 일상이 바르고 가지런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새해의 수선은 작은 사고를 내고 말았다. 물꽂이를 해서 몇달간 수북한 뿌리를 낸 베고니아를 화분에 옮겨 심다가 부러뜨린 것이다. 생수병에 담겨 있다 보니 줄기가 앞으로 휘었고 그걸 펴서 지지대 가까이 붙이겠다며 힘을 불끈 준 순간, 톡 하며 베고니아가 부러졌다. 몰두하느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있던 나는 그 튼튼한 줄기가 부러지며 공기 중으로 뿜은 오이향처럼 청량한 비극의 냄새를 똑똑히 맡고 말았다.

가지런하고 적당한 마음. 상상해보면 잘 접은 손수건의 네 귀퉁이나 현관 앞에 벗어놓은 몇 켤레의 운동화들이 떠오르는 마음. 하지만 그 어디에도 통제나 강박의 긴장은 없는 마음. 과연 올해 나는 그런 마음의 균형을 얼마나 유지하게 될까. 예측은 할 수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 지금을 떠올릴 때 지지대를 써서 멋지게 일으켜 세운 식물들보다 아쉽게도 부러뜨리고 만 베고니아를 더 선명히 기억하리라는 것. 그때의 낭패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굽은 것을 펴겠다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그것이 부러지는 순간 마음 전체를 순식간에 평정하던 어떤 깨달음을 말이다.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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