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원추리·아카시아, 이름을 빼앗긴 꽃들
백수린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 나오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은 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여중생 이야기를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으로 담은 단편이다. ‘아카시아가 만개하면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하게 향기로워지’는 둑방길 등을 배경을 하고 있다. 2019년 발표한 소설인데도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추천명 ‘아까시나무’ 대신 ‘아카시아’라고 쓰고 있다. ‘아까시나무’라고 썼으면 아카시아 고유의 향기가 제대로 전해졌을까 싶다.
꽃 이름 중에는 다른 식물에게 이름을 빼앗겨 그 이름을 부를 때 눈치를 봐야하는 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목련이다. 도시 공원이나 화단에서 흔히 보는 목련의 정식 이름은 백목련이다. 백목련은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자라긴 했지만 중국에서 들여와 관상용으로 키운 것이다.
이름이 ‘목련’인 진짜 목련은 따로 있는데,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자생하는 우리 나무다. 진짜 목련이 중국에서 들어온 백목련에 이름을 빼앗긴 셈이니 억울할 법하다. 그러나 지식이 늘어나 이름을 세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백목련은 전국적으로 많이 심었고, 목련은 남쪽 지방에서 자란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측면이다.
목련은 백목련보다 일찍 피고, 꽃잎은 좀 더 가늘고, 꽃 크기는 더 작다. 또 백목련은 꽃잎을 오므리고 있지만, 목련은 꽃잎이 활짝 벌어지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목련에는 바깥쪽 꽃잎 아래쪽(기부)에 붉은 줄이 나 있고 꽃 아래쪽에 어린잎이 1~2개 붙어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달래와 산달래도 비슷한 경우다. 우리가 봄에 흔히 냉이와 같이 나물로 먹는 것을 달래라고 하지만 실은 산달래다. 산달래가 달래에서 이름을 빼앗긴 셈이다. 달래는 가는 잎이 1~2개, 산달래는 비교적 굵은 잎이 2~9개 있는 점이 다르다. 길가나 숲 그늘에서 달래와 산달래가 함께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잎만 있을 때는 그게 그것 같지만 꽃이 피면 확연히 다르다.
앞의 두 경우는 몰라도 원추리에 이르면 납득하기 어렵다. 원추리는 우리 산과 들에서 흔하게 자생하는 백합과 여러해살이풀이다. 아름다운 꽃을 오래 볼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요즘 도심 공원이나 길가 화단에서도 원추리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한반도에 가장 넓게 분포하는 종, 사람들이 흔히 원추리로 아는 종 이름(국명)을 백운산원추리로 바꾸어 놓았다. 그냥 원추리를 찾으면 나오는 것은 전에 왕원추리(Hemerocallis fulva)라고 부른 것이다. 왕원추리는 중국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들여온 것으로, 한강시민공원 등 넓은 터에 대량으로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연에서 흔히 보는 원추리는 이름을 백운산원추리로 바꾸고 중국산 관상용에 원추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아무리 식물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학계 영역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국민 언어 습관, 상식에서 너무 벗어나면 횡포와 다름없다.
학계에서는 열대지방에 진짜 아카시아(Acacia)나무가 있다며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미국 원산의 나무는 아까시나무(Robinia pseudoacacia)라고 부르도록 정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카시아’라는 친숙하고 정감 어린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은 열대지방 나무를 뭐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라고, 한 세기 넘게 써온 이름을 바꾸어 큰 혼란을 초래했는지 모르겠다. 전에는 혼란이 더 커지기 전에 아카시아로 이름을 원위치시켰으면 했는데 이제는 ‘아까시나무’라고 쓰는 사람도 제법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아카시아는 우리 자생종도 아니고 원래 속명(屬名)을 이름으로 쓰는 관행에서도 벗어났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원추리는 다르다. 학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이 수백년 써온 꽃 이름을 함부로 바꾸고, 더구나 다른 외래종에게 이름을 주는 것을 수긍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아카시아처럼 혼란이 커지기 전에 시급히 원추리 이름 체계를 바로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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