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부 기자, 유학.. '번역'은 숙명이었다

한겨레 2021. 12. 3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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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기자 접고 유학 준비 중
우연히 출판 번역가로 데뷔
인덱스 정리부터 낭독까지
빠짐 없이 읽는 데서 '충만감'
지난 12월27일 경기 고양시에서 만난 김승진 번역가가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동아일보> 기자 일을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김승진 번역가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고교 동창과 마주쳤다. 출판사 편집자로 있다는 동창이 “옆 부서에서 번역가를 찾던데 한번 해볼래?”라며 스치듯 건넨 말이 단초가 됐다. 번역 경험이 전무한 그에게 출판사는 ‘샘플 번역’을 요청했고, 결과물을 보곤 두말없이 책을 맡겼다. 그가 2006년 <평전 커트 코베인>(자음과모음)으로 출판 번역가로 데뷔하게 된 사연이다.

“마치 벽돌을 쌓는 것 같았어요. 요행을 바랄 수 없고 한 줄 한 줄 일정한 시간 공을 들여야만 결과물이 나오는 거죠. 그게 답답한 사람도 있을 텐데, 저는 매력을 느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인연이었나 싶다. 그는 5년여간 기자 생활을 하며 “글 만지는 법”을 배웠고, 특히 1년 넘게 국제부에 있으면서 쏟아지는 외신을 실시간으로 훑고 빠르게 번역해 한정된 지면에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일을 했다. “돈 주고도 못 받을 번역가 수업 기간”이었던 셈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가 전공을 바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은 것은 “수요공급 곡선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세상을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어서”였는데, 이제 와 생각하면 ‘사회과학 전문 번역가’로서 맞춤한 학력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역의 짜릿한 기억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승진 번역가는 7년간 공부하면서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흥미로운 책을 만나면 국내 출판사에 번역·출간 제안서를 보냈다. 채택되지 않은 제안서가 더 많았고 <8시간 VS 6시간>(이후, 2011)처럼 빛을 본 경우도 있다. 그렇게 편집자들과 맺은 인연으로 한해에 두어권씩 꾸준히 작업했고 귀국할 무렵에는 1년치 일감을 안고 돌아왔다. 번역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2014년부터는 매년 4~5권씩 쉼 없이 번역해 지금까지 총 51권의 책을 냈다.

“번역가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안 빼놓고 읽는 사람이에요. 사회과학책의 경우, 독자는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읽는 경우가 많고 작가도 인덱스(찾아보기)는 편집자에게 맡기곤 하는데 번역가는 표와 그래프, 사진설명, 인덱스까지 꼼꼼히 봐야 해요. 누군가 오랜 기간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대중의 언어로 풀어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본다는 것이, 제게 표현하기 힘든 충만감을 줍니다.”

작가들도 미처 못 본다는 인덱스부터, 그의 작업은 시작된다. 책에 자주 나오는 용어와 고유명사 등을 엑셀 파일로 미리 정리해 두면 책의 핵심을 미리 파악하기 좋고 본문을 번역할 때 용어를 통일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음엔 “책을 끝까지 읽는 데 의의를 두고, 중간중간 영어 단어와 구문을 그대로 남겨둔 채” 초벌 번역을 한다. 이후 필요한 자료와 논문 등으로 비워둔 내용을 보완하며 재벌을 하고, 3벌부터 본격적인 ‘문장 쓰기’에 들어간다. 4벌에서 글을 더 세심하게 다듬는데, 이때 중요한 것이 ‘낯설어 보이게 만들기’다. “똑같은 문서를 계속 보면 오류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글자 크기를 작게 했다 크게 했다 하며 전혀 다른 문서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5벌이 끝나면 책의 도입부를 포함해 내용의 일부를 소리 내어 읽어본다. “오디오북이나 팟캐스트 등을 통해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경우가 많아진 만큼,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그가 일하며 터득한 이런 노하우는, 지난 시간 ‘출판 생태계’의 수많은 스승이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가르쳐준 것이다. “책의 모든 요소를 존중해야 한다는 걸 여러 유능한 편집자들과 일하며 배웠어요. 모르는 것이 있을 땐 제 변변찮은 인맥을 총동원해서 물어봤고요. 누구 하나 외면하지 않고 답을 줬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믿음으로 주위를 둘러봐요.”(웃음)

김승진 번역가는 자신이 ‘지식과 정보의 유통자’라고 여긴다. 기자로서, 번역가로서, 2016년부터는 대학 강단에서, 그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적·논쟁적 사건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대중의 언어’로 전달해왔다. 그에게 번역은, 어쩌면 숙명이었던가 보다.

고양/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그날 밤 체르노빌

애덤 히긴보덤 지음, 이후(2021)

1986년 4월26일, 체르노빌 참사 당일 벌어진 일들을 “분초 단위로 마치 영화처럼 묘사한” 책. 2006년 현장에 간 저자가 이후 10년간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기밀해제 문서 등을 샅샅이 살펴 심층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그날의 진실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마농지(2020)

에리히 프롬의 작품 중 4편의 에세이를 모은 이 책은 “불복종하는 역량을 잃어버린 현대인”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핵전쟁이라는 절멸을 향해 가는 인류의 책임과 자성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코로나19와 기후위기의 시대에도 울림을 준다”고.

앨버트 허시먼

제러미 애덜먼 지음, 부키(2020)

생애 자체가 격동의 20세기였던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의 일대기. “숙고하는 동시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그의 삶을 옮기며, 김승진 번역가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끝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를 천착했다고 한다.

지구를 살린 위대한 판결

리처드 J. 라자루스 지음, 메디치미디어(2021)

자동차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를 두고 1999년부터 진행된 미국 매사추세츠주 대 환경보호청의 소송은 대법원까지 이어지며 인간과 지구를 살릴 귀한 판례를 남겼다. “기후소송을 위한 모든 노하우와 그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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