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민요에 메탈·랩까지 접목..'힙한 조선팝' 얼씨구~

유주현 2021. 12.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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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크로스오버 열풍
‘풍류대장’ 우승을 차지한 서도밴드.
“전통음악을 갖고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서도밴드 보컬 서재현)

JTBC 국악 크로스오버 오디션 ‘풍류대장’이 막을 내렸고, 국악의 새 시대가 열렸다. 우승을 차지한 ‘조선팝 창시자’ 서도밴드는 국악 창법을 가진 보컬이 민요, 판소리를 재료로 풀밴드를 이끌고 국악어법과 트렌디팝을 블렌딩한 환상적인 사운드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가슴을 때리는 웅장한 퍼포먼스는 ‘조선의 콜드플레이’라 칭송받았고, 독설로 유명한 심사위원 박칼린은 “존재해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다.

국악씬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다.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는 “음악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돌연변이’를 이해하면 사회의 변화를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다른 인간 활동보다 음악이 더 빨리 진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021년엔 국악의 ‘돌연변이’가 지배종이 됐다. JTBC 풍류대장, MBN 조선 판스타라는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이 동시기 방송되며 젊은 국악인들이 총출동해 ‘전통음악으로서의 국악’이 아닌 ‘대중음악으로서의 국악’을 들려줬다. 하늘을 찢는 태평소 가락에 시시상청 고음으로 ‘조선메탈’을 구현한 AUX, ‘창극계 프린스’ 김준수, ‘국악계 싸이’ 최재구까지, 국악과 대중음악의 과감한 크로스오버가 조금도 위화감이 없었다.

국악계, 시대와 소통할 접점 찾아

국립창극단 간판스타 김준수는 준우승에 올랐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옛날 음악’이었던 국악은 이제 박물관을 뛰쳐나와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김산옥, 박자희 등 ‘조선판스타’ 출신 국악인들은 지난 13일 비투비 이창섭과 콜라보한 국악 캐럴 싱글 앨범을 냈고, 16일에는 발라드부터 메탈까지 온갖 장르를 크로스오버한 국악 기획 앨범 ‘조선판스타 PANHORAN’을 발매했다. 타이틀곡 ‘햇님달님’은 슈퍼밴드2 우승팀 크랙실버의 오은철이 만들었다. 모바일 시장 양대산맥 아이폰과 갤럭시 광고도 국악이 정복해 버렸다. ‘풍류대장’도 24일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돌입했다. ‘한과 흥’의 공존을 넘어 ‘힙 & 펀’한 ‘조선팝’이 대세가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해 BTS 슈가의 ‘대취타’와 이날치 ‘수궁가’의 글로벌 히트에서 시작됐다. 국악계 내부에서 오랜 세월 고심하던 ‘대중화’가 무색하게, 국악은 담장 하나 뛰어넘자 순식간에 ‘K팝화’했다. ‘대취타’는 빌보드와 영국 오피셜 차트에 동시에 오르며 세계를 강타했고,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조회수 3억뷰를 돌파한 이날치는 2020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재즈&크로스오버 음반’‘모던록 노래’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돌연변이의 DNA는 어떻게 생겼을까. 보편적인 대중음악의 문법과 국악 특유의 변칙적인 어법이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날치는 베이스와 드럼으로 구성된 밴드 세션과 소리꾼 4명으로 ‘수궁가’의 눈대목들을 연주하는 얼터너티브 팝의 형태다. 장영규는 예전 인터뷰에서 “판소리를 각색한다기보다 리듬을 먼저 만들고 어울리는 판소리 대목을 고민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밝혔었다. 서도밴드도 흔한 밴드 구성이지만, 풀밴드를 이끌고 거대한 제사를 지내는 듯한 국악 창법의 ‘현대판 무당’이 오묘한 밀당으로 사람을 홀린다.

가장 트렌디한 대중음악의 어법이 이 DNA의 핵인 것이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서도밴드는 국악적 탄탄함이 있지만 진부한 창작국악 스타일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발상으로 최신 트렌드를 구현하고 있다”면서 “대중화라고 해서 어설프게 화성을 만들거나 국악을 얼마나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음악 최신 흐름에 최적화된 팀이 호응을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흥미로운 것은 ‘풍류대장’에 감돌았던 비장미다. ‘힙한 소리꾼들의 전쟁’이라는 부제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세미파이널에서 김준수가 ‘대취타’를 리메이크하며 이순신 장군의 명언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를 인용해 임전의 각오를 다졌고, ‘마이너의 설움’을 사자후로 토해냈던 소리꾼 최예림은 “국악인들이 더 이상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지 않고 좋은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며 눈물짓기도 했다.

‘조선의 메탈리카’로 주목받은 3위 AUX. [사진 JTBC]
사실 국악인들은 원래 연예인이었다. 60년대까지 대중가요의 양대축은 트로트와 신민요였고, 70년대엔 포크에서 국악을 적극 받아들여 김민기, 서유석 같은 청년문화의 기수가 5음계 선율에 국악장단을 지닌 ‘국악가요’를 개척했다. 하지만 극장 예술을 지향하던 제도권이 ‘전통가요’라 불리던 트로트와 차별화를 선언한 80년대 ‘뽕짝논쟁’ 이후 국악은 급격히 대중과 멀어졌다.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을 지낸 김희선 국민대 교수는 “90년대 전국노래자랑에서 국악반주밴드가 사라진 것이 상징적 변곡점이다. 더 이상 전문가 외에 민요를 부르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라고 짚었다.

지금의 ‘돌연변이’는 성역 안에 안주하던 국악계가 다시 시대와 소통할 접점을 찾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풍류대장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미스트롯’ 송가인도 한몫했다. 판소리 전공자로서 콘서트에서도 꼭 한곡씩 국악을 챙겨 부르며 트로트 팬덤에게 자연스럽게 국악을 어필한 것이다. 김 교수는 “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전수조교 송순단의 딸이 트로트를 부르자 원로학자들은 ‘국악은 이제 끝났다’고 푸념했지만 오히려 송가인은 트로트의 부활과 국악의 부활까지 견인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상승세를 타고 국악의 산업화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지난달 ‘한류 5법’ 발의를 완성하고 국립국악원에서 정책 토론회를 연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류가 각광받는 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국악 산업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발의한 ‘국악문화산업진흥법’은 다른 분야 문화 콘텐츠와의 융합·연계 사업 발굴, 전문인력 양성, 방송프로그램 확대, 일반인 대상 교육콘텐츠 개발 등을 골자로 한다.

‘트로트 여왕’ 송가인도 한몫

애초에 국악의 부활은 한류와 뗄 수 없다. 국악 크로스오버 스타들은 해외에서 먼저 떴다. 젊은 국악인들이 전통에 갇힌 국내를 벗어나 해외 월드뮤직 시장에서 살길을 찾은 것이다. 국악기 중심의 헤비메탈 밴드 잠비나이는 2017년 20개국 50회 공연을 비롯한 아이돌급 해외투어를 다녔다. 이날치의 장영규와 경기민요 이수자 이희문이 뭉쳤던 민요록 밴드 ‘씽씽’은 2017년 미국 공영라디오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공공의 지원도 있었다. 2005년 이후 서울아트마켓(PAMS), 저니투코리안뮤직, 아시아퍼시픽뮤직미팅, 뮤콘(Mu:Con) 등 공공기관의 쇼케이스형 페스티벌 플랫폼이 해외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이들의 해외진출을 도왔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2015년부터 지속해온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 사업은 팬데믹 와중에도 올해 블랙스트링과 신노이의 유럽 투어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BTS를 비롯해 드라마 ‘오징어게임’‘지옥’ 등 지극히 한국적인 색깔의 K콘텐트가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지금, 국악 한류의 전망은 더욱 밝다. 정길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은 “올해 독일 드레스덴 ‘한국의 밤’, 런던 K뮤직 페스티벌 등에서 국악이 K팝 못지않게 환영 받았다”면서 “무궁무진한 원천 콘텐트인 국악은 한류의 본산이다. 이제 국악을 공연예술로서뿐 아니라 음원 콘텐트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국악한류를 위해 다양한 경로로 수용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전했다.

세계 음악 산업에서 국악의 존재감은 아직 미미하다. 국악이 음원 유통이 아니라 페스티벌 참여를 통해 ‘공연예술’로 소개되어 왔기 때문이다. 2005년 서울공연예술마켓을 통해 해외 유통이 시작된 이래 각종 지원사업에서도 ‘공연예술’ 장르로 분류되면서, 해외 네트워크도 공연 관계자 중심으로 구축되었을 뿐, 음악 콘텐트 쪽 네트워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날치 1집 발매에 참여했던 이수정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기획국장은 “80년대 워너뮤직 산하 음반사에서 실황음반을 발매한 김덕수 사물놀이를 제외하면 2016년부터 세계 최고 인디 레이블인 벨라 유니온에서 앨범을 내고 있는 잠비나이가 세계 음악 산업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낸 유일한 사례다. 잠비나이의 활발한 해외 투어도 직접 개척한 것이 아니라 유통과 판매를 촉진하는 에이전트가 있었다”면서 “국악이 세계 음악산업의 일원이 되려면 아티스트를 관리하는 매니지먼트가 해외 에이전트들과 네트워킹을 활성화하는 것이 필수”라고 짚었다.

하지만 핵심은 콘텐트의 힘이다. 국악이 드라마 OST나 뮤직비디오 춤, 뮤지컬 퍼포먼스 같은 외적 요소에 기대지 않고 음악만으로 승부하려면 지금 대중의 삶 속에서 영감을 찾아야 한다. 이영미 평론가는 “30~40년대 ‘노들강변’이 트로트보다 익숙한 즐거움을, 50~60년대엔 ‘닐니리맘보’가 미국식 춤바람의 흥겨움을 줬다. 70년대 ‘진주낭군’은 민족주의와 민중적 역동성을 담아냈다”면서 “국악 대중화는 당대 대중의 욕망과 맞아떨어졌을 때 성공한다. 80년대 이뤄진 현대화 작업은 그게 없어지면서 국악계 안으로 들어갔지만 30여년간 국악인들의 기술적 수준은 높아졌다. 이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움으로 창조력을 발휘할 때를 만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대화, 대중화의 욕망이 강한 젊은 국악인들이 자기 이야기와 세상 전체가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찾을 때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유주현 기자/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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