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러시아' 열망 올라탄 푸틴, 20여년 '힘의 대결' 내달아

조기원 2021. 12. 2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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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의 우크라이나 전선][소련 해체 30주년-상]
푸틴 "소련 붕괴는 최대의 재앙"
체첸 강경대응·유가 상승 발판
소련 해체 혼란 수습하며 인기
러 국민 75% "소련, 가장 좋았다"
강대국 열망 딛고 대외 강경 행보
장기집권 길 트며 1인 독재로
헌법 개정 2036년까지 집권 가능
반대파 나발니 가두고 언론 탄압
인권단체 메모리알 해산도 강행
권위주의 체제 회귀 서구와 충돌
지난 14일 러시아 모스크바 대법원 앞에서 경찰이 인권단체 ‘메모리알’ 해산 재판에 항의하는 시민을 끌고 가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1991년 12월25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해체됐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구호가 등장했으나 혼란은 커져갔고, 세계는 이제 미-중 갈등으로 인한 ‘신냉전’의 초입에 서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세계가 맞닥뜨린 현실은 어떠한지, 냉전 해체 이후 한반도의 정세는 어떻게 요동쳤으며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인류가 겪고 있는 극단적 불평등의 해법은 없는지 두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국가연합(CIS) 창설과 관련한 정국 상황에 따라 저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대통령으로서 활동을 마칩니다.”

1991년 12월25일 저녁 7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담담한 어조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11분 남짓 계속된 이날 연설에서 “저는 나라를 해체·분열시키는 정책에 동의할 수 없으나 이런 상황이 주된 흐름이 되고 있다”며 소련 해체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감추지 않았지만, 이것이 시대의 흐름임을 받아들였다. 고르바초프의 고별 연설이 끝나고 30여분이 흐른 저녁 7시45분, 모스크바 크레믈(크렘린) 대통령 집무실에 게양됐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 국기가 내려지고 새로 탄생한 러시아의 삼색기가 올라갔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1922년 12월 탄생한 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스 독일과 처절한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전후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 제국’이 채 70년을 버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1991년 8월1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 주변 도로에서 시민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소련 공산당 강경파 쪽 탱크의 진입을 온몸으로 저지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올해 소련을 공식 계승한 러시아 정부는 소련 해체와 관련한 공식 행사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 배경에는 소련 해체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씁쓸한 기억이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 방송에서 방영된 ‘러시아 새로운 역사’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소련 해체 뒤 자신이 경제적으로 곤궁해서 자가용을 이용한 택시 영업을 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결국 소련의 붕괴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소련이라는 이름 아래의 역사적 러시아의 붕괴였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1000년 전 세워진 나라를 크게 잃었다.” 2000년 5월 권좌에 오른 푸틴은 5년 뒤인 2005년엔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회고하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손대고 싶은 사건으로 이를 꼽았다. 국영 여론조사 기관인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의 지난 3월 조사를 보면, 응답자 67%가 소련 붕괴를 “애석하다”고 답했다. 독립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 센터의 지난해 여론조사에서도 소련 붕괴가 애석하다고 답한 이들이 65%였다. 이 조사에서 소련을 “가장 좋았던 시대”라고 답변한 이들은 75%에 이르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최근 소련 해체 뒤 경제난 때문에 택시 운전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모스크바 대통령 별장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태우고 1956년형 볼가를 운전해 보이던 때의 모습. AFP 연합뉴스

옛 소련의 영광을 기억하는 이들의 향수를 달래며 지난 21년 동안 러시아를 견인해온 인물이 푸틴이다. 1990년대 러시아는 늘 술에 절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보리스 옐친(1931~2007) 대통령이 상징하는 비참한 나라였다. 러시아 정부는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 1월 이전까지 고정되어 있던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자유화했다. 이 ‘충격요법’의 결과는 참혹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해 199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00%를 넘겼다. 러시아인들의 소득은 급격히 쪼그라들었고, 생활 수준은 급격히 악화됐다. 1994년 제1차 체첸 전쟁 뒤엔 중앙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러시아는 체면을 구겼다. 한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대제국 소련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이 무렵 등장한 사람이 푸틴이었다. 옐친이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인 푸틴을 1999년 8월 총리로 선택했을 때만 해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체첸 반군이 러시아 내 다게스탄까지 밀고 들어오며 시작된 1999년 제2차 체첸 전쟁 때 강경 대응을 주도하며 러시아인들의 환호를 받았다. 기력이 다한 옐친이 그해 12월31일 전 러시아에 생중계된 송년 연설에서 “나는 내게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떠난다”며 이듬해 3월26일 치러지는 대선 때까지 푸틴 총리가 임시 대통령을 맡을 것이라 선언했다. 이 선거에서 ‘예정된’ 승리를 거머쥔 푸틴은 5월7일 대통령직에 올랐다.

레바다 센터 소장 레프 굿코프는 누리집에 올린 질의응답에서 옐친과 측근들이 푸틴 대통령을 후계자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통제하기 쉬운 관료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처음에 푸틴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프로그램과 자신만의 생각이 부족했다. 이 결여 때문에 푸틴은 대중의 지배적인 태도를 감지했다. 대중들의 혼란, 좌절, 원망, 확산된 공격의 물결을 타고 대중적 기대의 틀에 발을 들여놓고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고 말했다.

2000년 집권 이후 시작된 유가 상승세가 푸틴의 통치에 힘을 불어넣었다. 브렌트유 기준으로 2000년 평균 배럴당 30달러가 되지 않았던 원유 가격은 계속 올라 2011년에는 평균 100달러가 넘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러시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8%에 달했다. 3.9%의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던 1990년대와 전혀 다른 러시아로 변모한 것이다.

지난 2014년 9월28일 우크라이나 동부 하리코프 중앙광장에서 친정부 민족주의 시위대가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 하리코프/AP 연합뉴스

만신창이로 변한 러시아를 넘겨받은 푸틴은 집권 초 미국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위로 전화를 건 이가 푸틴이었다. 하지만, 옛 소련의 일부였던 조지아에서 발생한 ‘장미 혁명’(2003)과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2004) 등 친서방 시민혁명에 이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이 거듭되자 강경한 대외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푸틴은 이 일련의 움직임을 러시아의 숨통을 죄려는 ‘서구의 음모’라 본다.

이런 혼란 중에 2008년 8월 조지아와 벌인 전쟁은 동유럽을 옛 냉전 시절로 되돌리는 ‘거대한 불화’의 서막이었다. 이어, 2014년 3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하며 미국 등 서구 국가들과 결정적인 대립을 시작했다. 그럴수록 옛 제국을 그리워하는 러시아인들은 환호했다. 레바다 센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푸틴의 지지율은 2014년 10월 88%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푸틴 정부는 최근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여명의 병력을 배치해 내년 초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그와 함께 소련 시절을 연상케 하는 권력의 중앙집권화와 억압적 구조가 복원됐다. 푸틴은 헌법상 대통령 3연임 제한 조항 벽에 막히자 2008~2012년 총리로 물러나 실질적 권력을 휘두른 뒤, 2012년 5월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러시아 의회는 2020년 기존 임기를 무효화는 헌법 개정을 해 푸틴은 2036년 83살 때까지 집권할 수 있다.

사실상 독재 체제가 시작되며, 푸틴 정부의 반대파 탄압과 언론 통제는 심해지고 있다. 지난해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러시아 정부 개입 의혹이 있는 독극물 공격을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며, 현재 러시아에서 수감 중이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모스크바센터의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최근 일본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러시아 정치 체제는 (예전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관리된 민주주의’라고 불렸지만 현재는 본격적 권위주의 체제”라고 말했다. 굿코프 소장도 현재 “러시아는 군사적 용맹, 제국주의적 업적, 소련의 산업화 같은 과거에 호소해 정당화를 끌어내는 국가 가부장주의와 애국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며 이것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이끌고 다원주의를 제거한다”고 말했다. 그 정점에 푸틴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현재 러시아 대법원에서 진행 중인 인권단체 ‘메모리알’ 해산 청구 재판도 상징적 사건이다. 메모리알은 소련 핵물리학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이 주도해 1987년 설립한 단체다. 악명 높은 수용소였던 ‘굴라크’의 피해자를 비롯해 소련 시절 벌어졌던 인권 침해 등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활동을 해왔다. ​러시아 정부는 2012년 외국에서 지원 등을 받은 단체 등은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하고, 인터넷 등에 글을 올릴 때 외국 대리인이라고 밝혀야 한다는 등의 각종 규제를 가하는 내용의 법률을 만들었다. 법은 여러 차례 개정돼 규제 대상이 개인으로 넓어졌다.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된 단체나 개인은 올해 들어 지난해보다 9배나 늘었다. 검찰은 메모리알이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됐지만, 활동 때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며 해산 청구를 한 상태다.

지난달 대법원 공판 때 인권운동가 100여명이 법원 앞에 모여 “사람들의 기억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푸틴은 독립 신문 <노바야 가제타>의 편집장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이 신문도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될 수 있다고 싸늘하게 내비쳤다. 30년이란 먼 길을 돌아 러시아는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했고, 지난 냉전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러시아와 나토의 날 선 대립은 전세계를 다시 깊은 시름에 빠뜨리고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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