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남한산성 수어장대' 등 관아건축 8건 보물 지정

김종목 기자 2021. 12. 2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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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화재청은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남한산성 수어장대’ 등 8건의 ‘관아(官衙)건축’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23일 지정했다. 중앙 관아 1건, 지방 관아의 감영과 동헌 3건, 객사 2건, 남한산성의 병영 관아 2건이다. 지역별로는 서울 1건, 대구 1건, 경기도 3건, 강원도 2건, 경남도 1건이다.

종친부 경근당(왼쪽 건물)과 옥첩당. 경근당은 정면 7칸, 옆면 4칸으로 된 이익공 공포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정면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옥첩당은 정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초익공의 팔작지붕으로, 건축물의 규모나 공포의 형식 모두 경근당보다 격을 낮추어 위계를 두었다. 문화재청 제공

감영(監營)은 ‘조선시대 중앙에서 지방 8도에 파견된 관찰사가 정무를 보는 관청 공간’, 동헌(東軒)은 ‘각각의 읍치(邑治)에서 지역행정을 총괄하는 지방관의 집무 공간’, 객사(客舍)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절을 올리는 곳’이다. 앞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관아건축 5건은 모두 객사 건물이다. 5건은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 통영 세병관(국보), 여수 진남관(국보), 전주 풍패지관(보물), 나주 금성관(보물)이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문화재청 제공

관아건축은 ‘왕조시대 관원들이 모여 나랏일을 다스리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문화재청은 “관아건축은 본래 관원이 나랏일을 보는 곳인 만큼 궁궐건축이나, 사찰건축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다. 비교적 높은 기단과 익공식 공포, 팔작지붕 등을 사용하여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게 지어졌다”고 했다. 서울(한성부)에 집중됐던 관아건축은 수차례 전쟁으로 파괴돼 남아 있지 않다. 현존 관아 대부분은 지방에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학교 등으로 전용되면서 상당 부분 변형되기도 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1751년(영조 27년) 중층의 장대를 건축하고, 안에는 무망루, 밖에는 서장대라 편액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36년(헌종 1년) 개건된 것이다. 이 때 지금의 ‘수어장대(守禦將臺)’란 현판을 달았다. ‘수어’는 ‘외적의 침입을 막다’를, 장대는 ‘전쟁이나 군사훈련 때 지휘관이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만든 장소’를 의미한다. 하층은 정면 5칸, 옆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중층 건물이다. 하층 실내 공간의 기둥 내부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과 평난간으로 구획한 공간으로 꾸미고, 그 둘레의 퇴칸부는 네모난 벽돌(방전)을 깐 바닥공간으로 하여 두 영역을 나누었다. 상층의 실내 공간은 전체에 장마루를 깔고 사방으로 널판문을 달았다. 이와 같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정확히 구분하여 구조와 실내공간을 이에 맞춘 것은 기능을 우선하는 군사건축적 성격을 보여준다. 문화재청 제공
남한산성 연무관(좌측면). 연병장을 바라보는 높은 위치에 건립한 연무관은 정면 5칸, 옆면 4칸으로 정면과 배면에 퇴칸을 두고 있으며 중앙부에서 기둥을 뒷면으로 이주하고 벽을 세워 국왕이나 수어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을 두고 “19세기 중앙 관아건축의 배치와 구성, 연결방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조선 후기 중앙 관아건축물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왕권강화 일환으로 종친부 권한과 조직을 확대하고, 종친부 건물을 대규모로 늘릴 때 중건(1866)됐다. 경근당과 옥첩당은 고종대 302칸에 달했던 종친부 건축군의 중심 전각이다. 경근당(敬近堂)은 대군, 왕자군 등 종친들의 대청으로 종친부의 중심 건물이었다. 좌우로 각각 옥첩당(玉牒堂)과 이승당(貳丞堂)을 두고 복도각으로 연결했다. 이승당은 1950년대 이후 사라졌다.

안성 객사 정청(우측면). 안성 객사는 고려 때인 1363년(공민왕 12년) 이전에 건립된 이후 조선 후기에 지붕기와를 바꾸었고, 근대기인 1931년, 1995년 2차에 걸쳐 이건하여 원위치가 아닌 단점이 있다. 정청의 공포 형태와 구성은 수덕사 대웅전과 유사하면서도 살미와 살미 사이에 장식재와 같은 동그란 부재를 깎아 놓은 특징이 있다. 공포에 이런 모습이 남겨진 건물은 안성 객사 정청이 유일하다. 또한, 대들보와 종보는 고려 후기 건축물의 전형적 특징인 항아리형 보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려 시대 건립되어 현존하는 객사 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 최상위 관직자였던 종2품 관찰사가 파견된 감영(監營) 중 경상도 감영의 정당(正堂, 관찰사가 공식적으로 행정업무를 보는 곳. 관찰사가 일상생활을 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도 사용했다)이다. 문화재청은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2고주 7량가의 지붕가구를 이루고 있고, 지붕마루의 양성 마감과 용마루에 취두를 갖춘 팔작지붕 등은 조선 후기 관아건축으로서 위계와 높은 품격의 건축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 다시 시작된 강우 측정 기구인 측우대, 깃대를 꽂았던 깃대꽂이 등도 남아 있다.

강릉 칠사당(우측면). 정면 7칸 측면 4칸의 5량가 건물로, 실 배치는 중앙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왼쪽은 온돌방 1칸과 마루방 2칸, 누마루 2칸, 그리고 대청에서 누마루로 올라갈 수 있도록 툇마루 앞으로 대청마루보다 높은 작은 툇마루를 덧달았다. 중수·중건 시기, 시대적 배경, 역사적 인물과 사건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점, 관아건물로 대청마루 등 다양한 마루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공간의 변화와 위계를 구분하고 있는 평면 형태와 구성, 바닷가에 위치한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는 물고기 모양 화반과 삼익공의 공포 형식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남아있는 지방의 동헌 건물 중 매우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문화재청 제공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의 청량산 정상에 성의 안팎을 모두 굽어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에 자리잡았다. 문화재청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물론이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 역대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올라서 옛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던 곳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했다. ‘남한산성 연무관’도 보물이 됐다. 1626년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의 중심 건물이다. 1795년(정조 19년)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됐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정면). 정면 7칸 옆면 4칸의 평면에, 가구는 2고주 7량가이며, 팔작지붕 겹처마에 양성을 하였으며, 용마루에 용두,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망와를 설치했다. 원주 선화당은 조선후기 남부 6도 감영의 선화당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고, 중수와 개건, 도시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같은 자리에 실물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1875년 개건 당시의 건축적 양상을 보여주는 포작과 ‘주삼포’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기록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

‘안성 객사 정청(正廳)’은 안성 객사 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행하는 공간이다. 현존 객사 중 가장 오래됐다. ‘강릉 칠사당’은 강릉대도호부 관아 구역의 지방 수령 집무처다. 칠사(七事)는 농사, 호구, 교육, 병무, 세금, 재판, 풍속을 말한다.

감영의 정당(正堂)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공간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 거제현과 거제도호부의 객관인 ‘거제 기성관’도 보물이 됐다.

거제 기성관(정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직사각형 평면을 갖는 단층 팔작집인데, 정청에 해당하는 중앙의 3칸은 그 전면의 지붕을 양익헌(객사 건축에서 중앙에 정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붙어있던 건물로서, 주로 지방관과 외국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 부분보다 한 단 높게 만들어 앞에서 보았을 때 솟을지붕을 가진 것처럼 꾸민 점이 특별하다. 뒷면의 지붕은 전체가 같은 지붕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전후면의 지붕면을 다르게 구성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문화재청 제공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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