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적 없는 가난한 사람들

신지민 기자 2021. 12. 1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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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양동 쪽방 주민 8명의 생애사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내가 생각해도 대단해요, 살아 있는 게.” 이석기(66)씨의 말이다. 이씨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남의집살이하다가 무작정 서울로 왔다. 낮에는 파지를 줍고, 밤에는 파지를 실어 나르는 리어카에서 자며 살았다. 이후 10년 넘게 전남 신안의 염전에서 70만원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일하다 경찰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 돈마저 고향 형님에게 안겨주고는 다시 서울에 와 노숙을 시작했다. 2019년 5월, 그에게도 ‘내 집’이 생겼다. 양동 쪽방촌은 그의 첫 ‘내 집’이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후마니타스 펴냄)는 이석기씨처럼 서울역과 힐튼호텔 사이에 있는 ‘양동 쪽방촌’에 사는 주민 8명의 이야기를,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이 듣고 적은 책이다. ‘없는 집’에서 태어나 배고픔과 가정폭력, 미래가 없는 삶에서 탈출하려고 무작정 상경한 이들은 끝없는 노동에도 불구하고 방 한 칸 구할 여력이 없어 거리와 쪽방을 오가는 생활을 해온 ‘가난의 굴레’를 증언한다.

양동 쪽방을 공통분모로 모인 이 책의 주인공들은 쪽방뿐 아니라 거리와 병원 등을 오가며 생활해온 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세간의 개념은 ‘무능한 사람’ ‘게을러서 스스로의 생계조차 꾸리지 못하거나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넝마주이, 머슴살이, 새우잡이배, 염전, 양계장, 돼지농장, 각종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삶을 꾸려온 이들은 단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그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돌아간다.

주인공 대부분은 명의도용 범죄의 피해자였다. 장영철(66)씨는 바지사장으로 명의를 도용당했다. 세금 8억원이 나왔다. 장씨도 모르는 휴대전화가 마구 개통돼 800만원의 통신요금을 남겼다. 그전에는 조직폭력배가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며 장씨를 유인해 2천만원을 대출받게 한 뒤 돈을 챙겼다. 이석기씨 역시 비슷한 명의도용 피해를 보고 6개월 수감 생활까지 했다. 이렇게 이들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며 살았다. 거리생활을 경험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요양병원이나 정신병원으로 유인당해 입원한 경험을 증언한다. 정신의료기관이 기초생활수급자를 입원시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입원치료비를 받기 때문이다. 김강태(64)씨도 김기철(63)씨도 이렇게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생애구술사 작가 최현숙은 책의 맺음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거리 사람들이 어떻게 쫓겨나고 어떻게 버티며 살고 있는지 알아내 함께 연대해야 한다. 그러니 싸움은 각자의 안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여전히 치열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의 말처럼 쪽방촌 재개발이나 이주 대책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더 좋은 집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삶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한국사진사

박주석 지음, 문학동네 펴냄, 5만5천원

‘사진’의 어원은 영어 ‘포토그래피’의 일본식 번역이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외양뿐 아니라 내면의 정신까지 표현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 우리 고유의 단어다. 꼼꼼한 사료 발굴로 한국 사진의 역사를 정리했다.

오히려 최첨단 가족

박혜윤 지음, 책소유 펴냄, 1만6천원

미국 시골의 이동식 주택에 거주하는 저자는 두 아이, 남편과 함께 흔한 4인 가족 모습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오래 지속가능한 관계가 되기 위한 이들의 유쾌한 일상을 통해 가족관계의 진짜 쓸모를 발견할 수 있다.

꼬리

박수용 지음, 김영사 펴냄, 1만5800원

다큐멘터리스트 박수용이 시베리아 호랑이 ‘꼬리’와 보낸 마지막 1년을 담은 기록. 생태를 관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호랑이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와 내밀한 우정을 나눈다. 시베리아의 대자연과 야생호랑이들을 찍은 화보도 수록됐다.

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지음, 문학동네 펴냄, 1만5천원

판사 출신 작가가 쓴 헌법 이야기.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 사회적 기본권 등 익숙하지만 피상적으로 알기 쉬운 개념을 심도 있고 알기 쉽게 풀어썼다. 지혜로운 공존을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 법학적 관점에서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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