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콘크리트 속 철제 진열장, 그 안에 유물 떠있는 파격

노형석 2021. 12. 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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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재개관 특별전 \'야금\']
리모델링 공사중 공간 그대로
정구호 디자이너 진열장 놓고
금속제 고미술·현대작품 배치
전시를 자체가 세련된 볼거리
‘야금’ 전을 대표하는 유물인 전 고령 출토 가야금관(국보). 고대인이 금관을 쓴 위치를 상상하며 떠있는 듯한 모습으로 연출했다. 맞은편에 과테말라 화산에서 흙과 용암이 생성되는 광경을 담은 김수자 작가의 영상이 흘러간다.

작품을 가리는 안목과 돈 굴리는 재력은 겸비하기가 어렵다. 물론 두 가지를 다 갖추면 천하무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일급 수장가의 힘이다. 미술품에 관한 한 거래든, 전시든 모든 것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 항상 세간의 주목도 받게 된다. 시선의 절대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겠다.

한국 미술 명가로 꼽히는 삼성가가 지금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 펼쳐 놓은 재개관 특별전 ‘야금’은 이런 최고 수장가문의 위력을 십분 발휘해 풀어놓은 전시다. 전시 제목인 ‘야금’은 캔 광석을 가열해 금속을 녹여서 정련한 뒤 갖은 형상물로 빚어내는 과정을 지칭한 말이지만, 전시장에선 큰 의미가 없다. 정구호 디자이너가 직접 고안한 기둥 스타일의 철제 진열장 24개의 존재감 때문이다. 이 도열한 진열장들은 전시의 실제 주인공에 가깝다. 최고 경지의 국가문화재급 고미술품과 한국 현대미술의 소장품 45점을 담아 전에 없던 전시 연출 방식으로 보여준다. 신과 성자, 세속의 권력, 예술혼 같은 여러 열쇳말로 나눠 배치하면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겨레의 장인, 작가들이 최고의 기술력과 창작 역량으로 만든 금속제 미술품의 진수를 진열장에 놓거나 매달지 않고 떠 있는 듯한 모양새로 내보인다.

호암미술관 전시장 전경. 정구호 디자이너가 직접 고안한 기둥 스타일의 철제 진열장 24개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땅에서 나온 주요 금속제 미술품을 담아 내보이고 있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경주의 신라 금관들과 더불어,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삼국시대 금관의 최고 걸작인 가야금관과 지금 현대기술로도 온전히 재현하지 못하는 촘촘한 가는 선 문양의 신비로운 거울 다뉴세문경, 날렵한 세형동검과 청동제 창무기의 일종인 동모, 절의 깃발을 달아맸던 용머리 모양의 금동제 보당 등 국보 5점과 보물 2점이 이름난 등장 유물들이다. 이런 쟁쟁한 작품을 둘러싼 전시의 틀거지는 작품에 눌리지 않고 세련된 파격을 구현한다.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유지로 만든 호암미술관은 1982년 이래 내부 공간에 손을 대지 않다가 내년 봄 완공을 목표로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 중이다. 공사 중에 뜯겨 생살을 드러낸 내부의 거친 노출 콘크리트 공간이 그대로 재개관전의 공간이 되었다. 삼성가 전시는 어떤 의도가 생기면 어떤 상황에서든 거기 맞춰 최적의 조건을 구현한다. 이 전시 또한 그렇다. 거친 공간에서 작품들이 견뎌야 하니 금속만한 프레임이 없다. 정구호 디자이너는 높이가 3m를 넘는 24개의 검은색 철제 가구 같은 진열장들을 따로 만들었다. 싣는 작품에 따라 내부 얼개와 크기가 각기 다른 서너 종류의 특제 진열장을 2억원의 비용을 들여 따로 제작했다. 큐레이터인 이광배 책임연구원은 각각의 전시품들을 성격과 기능에 맞게 세부적으로 그 프레임 안에서 다시 연출했다. 전시 연출의 요체는 두 가지. 전시장 어디서든 모든 출품작들을 조망할 수 있고, 개별 출품작들도 사방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 그래서 유물들은 대부분 떠 있는 듯한 포즈로 등장하게 됐다.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들머리 호숫가에 새로 설치된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표작 <마망>. 거미 모양을 한 이 대형 조형물은 원래 서울 한남동 리움 미술관 앞에 설치되어 있다가 여기로 옮겨졌다.

금관은 고대인이 썼던 위치를 짐작해 진열장에 올렸고, 거울은 신관이 목에 걸었던 위치에서, 칼은 고대 무인이나 권력자가 찼던 위치에서 각각 배치되었다. 묘하게 어울리며 서로 삼투되는 듯한 현대와 옛것의 이미지 조합들을 즐기는 맛도 있다. ‘야금’ 전을 대표하는 유물인 가야금관이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뒤로 돌아가 바라보면 유물 앞 맞은편 벽에 투사되는 김수자 작가의 설치 영상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과테말라 화산에서 흙과 용암이 생성되는 광경을 담은 역동적인 영상이 풀꽃을 형상화한 금관의 정적인 미감과 함께 겹쳐지면서 관객은 물질과 역사, 예술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한국전쟁 때 부서진 신라기의 ‘선림원종’을 원광식 주철장이 재현한 복원품과 이우환 작가의 돌과 철판 설치작품, 작은 금속인물상 2만여개로 한국 지도를 만든 서도호의 작품들까지, 전시는 시종일관 철제 구조와 철제 명판, 철제 가벽 등의 금속틀로 금속제 명작들을 담아낸다.

숲속 낙엽들이 운치있게 쌓인 미술관 들머리 호숫가에는 새로 설치된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표작 <마망>이 눈길을 붙잡는다. 거미 모양을 한 이 대형 조형물은 원래 서울 한남동 리움 미술관이 2004년 개관할 때 건물 앞에 상징물처럼 설치되어 있다가 2012년 철거된 뒤 최근 여기로 옮겨졌다.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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