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다정소중한 선물! - 김혼비 <다정소감> [북적북적]

권애리 기자 2021. 11. 2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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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318 : 이토록 다정소중한 선물! - 김혼비 <다정소감>

🎧 아래 주소로 접속하시면 음성으로 기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https://news.sbs.co.kr/d/?id=N1006549402 ]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덮어놓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집 [다정소감]을 함께 읽습니다. 위의 대목은 '다정소감'이라는 제목에 이르게 된 작가의 사유의 과정이 담긴 에필로그에서 발췌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김 작가가 펴낸 모든 책을 [북적북적]에서 소개했습니다. 심영구 기자가 작가의 데뷔작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읽었고, 제가 [아무튼, 술]과 (배우자 박태하 작가와 공저한) [전국축제자랑]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작가의 네 번째 책인 [다정소감]은 그냥 혼자 읽고 지나가려 했습니다. 좀더 다양한 도서들, 더 많은 작가들을 소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 읽고 나니, '이번에도 [북적북적]을 들어주시는 분들과 정답게 함께 읽고 싶다'는 마음을 결국 누르지 못했습니다.

[다정소감]은 (누가 읽어도 재미있을 책이지만) 김 작가의 글을 접한 적이 있는 분들이 더욱 반갑게 읽을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어떤 자세로 살아가려고 하는지,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내온 에세이들에서보다 좀더 내밀하게, 약간 더 직설적으로 나눠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김혼비 작가의 문장은 늘 호쾌상쾌유쾌한 끝에 따뜻하고 사려 깊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읽는 사람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도록 술술 소화되는 문장들로 조리해 놓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치열하게 이모저모 뒤집었던 것이 분명한 고민의 결과물들이 글마다 그득하게 담겨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혼비 작가의 글에서 받았던 이런 인상은 과연 이같은 다짐과 마음씀으로부터 비롯됐구나, [다정소감]의 책장을 넘기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들이 많았습니다.
 
"A는 그들에 관해 두 문단에 걸쳐 써놓았는데, 첫 문단이 그들의 '행태 묘사'였다면 두 번째 문단은 그들로 대표되는 '중년 패키지 단체 관광객의 행태 묘사'였다. 그는 예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딱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루브르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개탄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유명한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씩 박는 게 여행의 전부인 사람들"의 문화적 척박함에도 개탄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박물관은 지겨운 공간이었을 거라며 루브르와 그들의 잘못된 만남에 대해서도 개탄했다. 그들의 단체 티셔츠에 대해서도 개탄했다. 개탄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은 '그런 사람들'은 박물관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우연히 들른 블로그가 그의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볼 만큼 A 본인도 "유명한 작품 앞에서 한 장씩 박은" 사진들을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개탄맨 A의 글을 읽는 동안 그와 내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을 본 게 정말 맞는지 의아하고 당황스러웠다. A와 내 인식의 간극은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에서 기인하는지도 몰랐다. A보다는 내가 그들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중년, 단체, 패키지여행,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빚어내는 어떤 편견. '여행부심'과 '예술부심'이 이중으로 빚어내는 어떤 오만. 거기에는 후세대에 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를 생활 밀착적으로 관람하는 문화를 경험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예술에 관심을 갖고 취향이라는 걸 만들어가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며, 지금처럼 여행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여행을 가기까지 거쳐야 하는 복잡한 절차들이 쌓은 심리적 장벽을 패키지여행의 형태로 넘어보려는 세대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중년 안에서도 경험치와 감수성이 천차만별일 거라는 고려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미술관에 가는 건 '경험'을 쌓는 걸로 봐주지만, 그래서 당장은 지루해하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해도 그런 경험들 끝에 돌아올 '무언가'를 기다려주지만 5, 60대 중년이, 이제 와서, 떼를 지어,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는 건, 단지 패키지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으니 별생각 없이, 유명하다고 하니까, 그 앞에서 사진이나 찍고 싶어서, 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그들에게는 쌓을 '경험'도 미래의 '무언가'도 없을 거라는 듯이."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 中)

누군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이 사람의 글에는 유난히 자꾸 동감하게 되네' 같은 기분이 드는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위의 에세이에 '야 이거 속이 다 시원하다' 싶을 만큼 공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유를 풀어가는 전개 방식 자체가 '김혼비 작가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작 '판에 박힌 행동'을 한 사람은 중년 패키지 여행객들이 아니라 '판에 박힌 개탄'을 늘어놓은 블로거 A가 아니냐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단호함에 있어서조차 "A보다 내가 그들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여지를 두는 자세. 작가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생각을 해볼 기회가 A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겸허하게 틈을 남겨두고 한 번 더 상대방을 헤아려 본 뒤에 생각을 내놓는 태도. 김혼비 작가의 글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이런 마음씀의 모퉁이들이 그의 글을 '믿고 읽게' 해줍니다.
 
" "있잖아, 나는 요즘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무척 불편해. 물론 이제라도 사면 되겠지만, 나는 석 달 후면 일본에 없는데, 그 석 달 행복하자고 어차피 버리고 가야 할 비싸고 커다란 물건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래서 가장 필요한 건데도 못 사. 잠깐 참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음……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전자레인지 같은 거야. 함께하면 석 달 동안 무척 행복하겠지만 결국 남겨두고 가야 하는데…… 그건 너무 힘든 일이 될 거야."

서툰 일본어로 저렇게 말한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한 건지는 지금도 모른다. K의 얼굴에 알 듯 말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한참을 서 있던 그는 그저 알겠다며 돌아섰다. 점심시간은 거의 끝나 있었고 오후 근무를 무슨 정신으로 마쳤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 누군가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K가 서 있었다. 박스에서 막 꺼낸 것 같은, 투명비닐로 감싼 전자레인지를 들고서.

"나중에 나 주고 가면 되니까…… 석 달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그거 건네는 전자레인지를 엉겁결에 받아드는데 약간 혼란스러웠다.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계속 기다렸지만, 그는 그렇게 또 한참 서 있다가 "무겁겠다"며 내 손에서 전자레인지를 다시 받아 바닥에 내려놓고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를 붙잡아놓고 묻고 싶은 말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는데 정작 말이 되어 나오는 건 고맙다, 잘 쓰겠다, 내일 보자 이런 말뿐이었다.

K의 속내를 전해 들은 건 며칠 후였다. ………" ('뿌팟뽕커리의 기쁨과 슬픔' 中)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정말이지 알토란처럼 실한 24편의 에세이들이 실려 있습니다. '매콤달콤느끼'한 글맛으로 그때 그 사람을 추억하는 '뿌팟뽕커리의 기쁨과 슬픔', "내 나이 돼 봐"라는 상투적 표현의 상큼한 재정의가 이루어지는 '거꾸로 인간들', 엄마가 우산 들고 데리러 오지 않은 방과 후를 오히려 즐기던 아이들의 짜릿하고 우쭐했던 즐거움을 함부로 지우지 말라고 일러주는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 등. 작가 특유의 참신한 시선과 문장들을 모두 소리내어 읽고 싶은 욕심을 겨우 눌러 참았습니다.

하지만 [다정소감]을 직접 찾아 읽어주실 분들을 위해서 일부러 소중하게 남겨둬야지, 하고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않은 편도 하나 있습니다.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D가 웃으면 나도 좋아'라는 에세이입니다. 이 편에서 작가는 자신이 더 이상 쓰지 않는 표현들, 누군가를 무심코 배제하거나 상처 입힐 수 있는 표현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관용어들이 워낙 많이 등장해서 '이건 너무 표현을 제한하는 건 아닌가?' 같은 느낌까지 슬며시 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퍼뜩, 지난 몇 년간 읽었던 우리말 에세이들 중에서 데뷔한 지 오래 되지도 않은 이 신인작가의 글만큼 표현이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인상을 줬던 글도 별로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관용구들 없이는 제대로 된 표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나태하고 단조로운 언어생활이 맞을 것입니다.

'인기있었던 모 코미디 프로그램이 재미없어진 이유'라는 제목의 방송캡처본을 얼마 전에 소셜미디어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한 코미디언이 이른바 추녀 역할을 자주 맡았던 동료를 가리키면서 '예전엔 이 친구를 향해서 1차원적인 개그를 할 수 있었는데, 그런 게 진짜 재밌다. 그런데 요새는 뭐라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 못한다. 그래서 개그프로그램이 재미가 없어졌다. 검열 좀 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말에 동감하는 사람이 정성껏 화면 캡처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약간 놀랐습니다. 정작 제가 그 코미디 프로그램을 그만 보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그가 이야기하는 그런 개그들이 너무 불편하고 재미없어서였습니다. 웃고 싶어 틀었는데 불쾌해지는 순간들이 반복되자 자연스럽게 멀어졌는데, 그런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저와 비슷한 시청자들과 달리 저 방송을 캡처한 사람처럼 '추녀개그'가 그리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청자가 아니라 '프로페셔널 웃음꾼'이라면, 본인 표현마따나 아무나 할 수 있는 '1차원적인 개그'를 하지 않고도 포복절도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혼비 작가의 유머감각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아무튼, 술]을 소개하면서 저 역시 '어떤 독소나 떨떠름한 요소 하나 없이도 웃음의 잽과 스트레이트를 섞어서 끊임없이 날려오는 현란한 문장들이 인상적'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유머감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으르게 쓰기 쉬운 독이 있는 표현들을 자신의 글을 다 빼내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은 그저 자연스럽게 '웃기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작가의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이 작가가 프로페셔널한 노력을 해왔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화가 많이 났을 때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담긴 비속어가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길래 "내가 또 그러면 머리를 때려줘"라고 주변에 이야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을 때 제가 그 말을 또 뱉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자꾸 저에게 면죄부를 줬는데, 이제 진짜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 머리를 몇 대 때려줬습니다.) [다정소감]을 즐겁게 읽음으로써 김혼비 작가로부터 선물 받은 소소하고도 소중한 연말 다짐입니다. [다정소감]을 펼쳐드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소소하고 소중한 선물들을 책장마다 찾아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안온북스'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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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리 기자ailee17@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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